"갚으려면 300년도 더 걸릴 것" 회사에 손배소 당한 노동자들의 현실

이준목 2023. 9. 1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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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KBS <추적 60분>

[이준목 기자]

최근 30년간 기업이나 국가기관이 개인(노동자)을 상대로 제기한 197개 사건, 381개의 소송을 분석한 결과 총 배상규모는 약 3160억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회사는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가압류 제도를 적극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단지 회사에 맞섰다는 이유만으로, 1년 이자만 몇십억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에, 가족들까지 피해를 입는다는 두려움까지 겹치며, 많은 노동자들은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된다.

9월 15일 방송된 KBS 시사고발 <추적 60분>에서는 '3,160억을 배상하라, 인생을 압류당한 사람들' 편을 통하여 회사로부터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한 노동자들의 현실과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논란을 조명했다.

"갚는 것보다 이자가 더 많이 늘어난다"
 
 KBS <추적 60분>의 한 장면.
ⓒ KBS
 
2001년 현대차에 입사한 하민수(가명)씨는 10여 년 전 소송을 거쳐 지난해 정규직이 되었지만, 회사로부터 막대한 손해배상을 떠안게 됐다. 2010년 현대자동차의 사내 하청 불법파견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 하청노조는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25일간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벌였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사내하청노조 323명을 대상으로 점거 당시 생산라인 가동중단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현대차는 소송을 포기하는 노동자에게만 손해배상소송을 취하해줬고 경력을 축소하는 조건으로 특별 신규 채용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압박을 견디다 못한 대부분의 직원들이 회사의 요구를 따랐고, 이를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민수씨는 2017년 2월 2심 판결에서 내려진 손해배상금 220억(원금 80억)을 혼자 떠안게 됐다.

현재 이자가 붙어서 손배금은 230억까지 불어난 상태였다. 민수씨는 "갚으려면 300년 안 걸리겠나? 근데 갚는 것보다 이자가 더 많이 늘어난다. 평생 못 갚는다"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민수씨는 합의를 거부한 이유에 대하여 "살아가면서 꿈꿔온 것을 한번을 이뤄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상규 현대제철 비정규직 노조 지회장은, 비정규직의 근본적인 문제가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똑같은 일, 똑같은 현장에서 근무하면서도 정규직 임금의 50%를 받았다. 안전모에서 목욕탕 라커룸까지 천지차이다. 다양한 차별이 많았다"고 밝혔다.

2021년 정부는 현대제철에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라는 시정명령을 내렸고, 노동자들은 근로자지위확인소송까지 제기하여 승소했다. 하지만 현대제철은 직접고용대신 자회사 현대 ITC를 설립하여 정규직 임금의 80%만 주고 직원들을 채용하면서 오히려 덩치만 커진 더 협력업체가 되어버렸다.
 
 KBS <추적 60분>의 한 장면.
ⓒ KBS
 
노동자들은 원청인 현대제철에 대화를 요구했으나 회사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관계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했다. 2021년 현대제철 비정규직 지회는 53일간 당진공장 통제센터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현대제철은 불법파업을 이유로 200억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장을 받은 노동자들은 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였고 극단적 선택까지 고민했다는 이도 있었다.

회사는 자회사에 입사하려면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취하할 것과 더 이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전체 대상인원 5300명 중 3분의 2에 이르는 3400명의 하청 노동자들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회사를 선택했다.

현대제철은 똑같은 업무를 하는데 왜 자회사를 만들었냐는 제작진의 질의에 서면으로 "현대 ITC는 노사간 소모적 분쟁해결을 위하여 설립했다. 대기업에 준하는 임금을 적용하지만 현대제철 직영과는 다른 일을 한다"고 답변했다. 또한 "현대 ITC 입사는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며 자회사에 입사한 인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취하할 계획이 없다. 협력업체 근로자의 처우 개선을 위하여 원청(현대제철)이 협상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혓다.

경북 구미에 있는 아사히글라스 화인테크노 공장에서 근무하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 개선을 위하여 2015년 노조를 설립했다는 이유로 한 달 만에 전원 해고를 당했다. 2016년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이들의 해고를 부당노동행위로 판정하고, 2017년에는 고용노동부에서 직접고용 시정명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아사히글라스는 불응으로 일관했다.

2019년에는 해고 직원들이 도로 앞에 래커칠로 항의표시를 하자, 회사는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도로포장을 새로 한 후 노동자들에게 도로포장 비용 52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회사는 전문업체가 내린 견적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실제로는 재판과정에서 실시한 감정결과 래커칠을 지우는 데는 그 10분의 1도 안되는 380만 원이면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회사는 재판이 진행중이라며 손해배상소송은 취하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2020년 기준 택배노동자의 주간 평균 노동시간은 71.3시간, 하루 평균 배송물량은 313.7개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에 2021년까지만 약 22명의 택배 노동자가 과로사로 사망했다.

2022년 2월 택배노조는 과로사 방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 이행을 요구하며 19일간 CJ대한통운 본사를 점검하고 농성을 벌였다. 회사는 점거농성에 따른 업무방해, 시설물 파괴 등을 근거로 택배노조 조합원 88명에게 20억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손해배상제도가 악용되는 현실
 
 KBS <추적 60분>의 한 장면.
ⓒ KBS
 
그런데 이런 사건들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다른 손해배상-가압류 사건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원인은 불법파견-부당해고-부동노동행위 등 구조적인 문제에 대하여 회사의 '교섭 거부'에서 시작되지만, 회사의 손해배상-가압류 소송이 제기되면서 '노동자의 불법행위'로 모든 사건의 초점이 옮겨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측이 법정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데 손해배상제도가 악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노조들의 잦은 파업과 불법행위에 대하여 국민적인 인식이 크게 나빠진 것도 노동자들에게는 부담이다.

고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은 2003년 회사의 손배소 철회를 요구하며 크레인 농성을 벌이다가 목숨을 던졌다. 당시 김주익은 월급 대부분이 회사에 압류되어있었고 실수령액은 13만 5천원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약 20년이 지났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일을 해도 빚은 계속 생기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하며 "하청노동자들은 안전용품이나 보호구를 자비로 장만해야 한다. 중고시장에서 구매를 했더니 파는 사람이 정규직이더라"며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씁쓸함을 드러냈다.

2022년 6월 대우조선 노조는 불황기에 삭감된 임금 정상화를 요구하며 51일간 점거투쟁을 벌였다. 회사는 파업으로 인한 공정중단을 요구하며 5명에게 470억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노동자들은 평생 일해도 만져보지도 못할 금액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일터는 연매출 수천억에서 수조원에 이르는 대기업들이기에 손해배상의 규모는 막대할 수밖에 없다. 20여 년간 손배가압류에 짓눌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만 수십명에 이른다.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사건 당시 직원으로 손해배상 소송 대상자가 된 김정욱씨는 "이 손배를 갚지 못하면 동료에게 전가되거나 우리 자식들에게 대물림될 수 있겠구나라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2019년 손배가압류 피해노동자 236명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 1년간 진지하게 극단적 선택을 고민했다는 노동자들이 남성 30.9%, 여성은 18.8%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반 인구 대비 각각 남성 19.6배, 여성 14.3배에 이르는 심각한 수치다.

전문가는 "이 정도로 높은 수치를 보는 일은 흔치 않다. 일반 노동자 월급으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손배금을 보면서 점점 고립되는 상황, 경제적 책임을 혼자 짊어지게되는 상황이 주는 고통이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 개정안, 소위 '노란봉투법'이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있다. 법이 개정되면 그동안 단체로 책임져야 했던 손해배상을 개별적으로 다르게 제한할 수 있다. 또한 현재는 직접 근로계약을 맺은 하청업체와만 교섭할 수 있었던 노동자들이, 이들의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원청과도 교섭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재계와 대기업 등 반대파들은 개정법이 무리한 노사분규를 조장하며 기업과 경제가 망가질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우려하고 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한국노총 사무처장 시절에는 "손배가압류가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발언했던 인물이지만, 장관 취임 이후로는 입장이 180도 바뀌어 노동조합밥 개정안을 반대하고 있다.

이 장관은 "그 당시는 노동조합이었으니까 노동계 입장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다. 현재는 국무위원으로소 노동 정책을 집행하고 지켜줄 수 있는 법을 설계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지난 6월 대법원은 현대차 노조 손배소 판결에서 개별 조합원의 책임을 일부 제한한 판결을 내렸다. 최근 미국에서는 유튜브 하청노동자에게도 구글이 공동사용자 (Joint employer)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노동계는 '노란봉투법'이 이러한 법원의 판결이나 국제적 흐름과 부합되기에 반드시 통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재계는 손해배상 책임에 예외를 두는 것 자체가 민법에 위배되고 재산권 침해의 소지가 있으며, 현장에서 엄청난 혼란이 초래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간극은, 우리 사회가 노동자를 어떻게 대우하고 인식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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