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홍범도에 뛰는 차도선'... 현충원에서 재회한 봉오동의 주역들

김선재 2023. 9. 1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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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2] 이념·종교·사상의 차이를 넘어 하나로 뭉친 사람들

대전현충원 해설사 경험을 바탕으로 이곳에 묻힌 다양한 인물들의 생애와 사연을 소개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생각해야 할 점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말>

[김선재 기자]

 애국지사 홍범도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917호)
ⓒ 김선재
1920년 6월 봉오동과 10월 청산리에서 우리 독립군의 만세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습니다. 독립 영웅들은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지 10년 만에 현대식 무기를 갖춘 독립군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 군대로 일컬어지던 일본군에 용감하게 맞섰고 연달아 이겼습니다. 봉오동과 청산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917호에 잠들어 계십니다.
    
장군은 처음에 의병 활동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현재 함경남도와 양강도 사이 고갯길인 후치령에서 홍범도와 의병들은 화승총을 쥐고 일본군을 격파했습니다. 장군은 이후 어려워진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연해주로 건너갔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기와 탄약, 그리고 동료를 모았습니다. 마침내 군대를 만들어 독립전쟁에 나섰습니다.

홍범도 장군과 동료들은 피와 눈물이 서린 독립전쟁을 수행하면서 여기저기로 흩어졌습니다. 조국 해방을 미처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은 중앙아시아와 만주에 안장되기도 했습니다.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와 눈을 감은 분도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역만리 타향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서로에게 등을 기댄 전우들이 각기 다른 사연을 품고 재회했습니다. 대전현충원에 묻힌 홍범도 장군과 그 전우들 이야기를 두 편에 걸쳐 전달해드리겠습니다.

나는 홍범도에 뛰는 차도선
 
 애국지사 차도선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36호)
ⓒ 김선재
 
'나는 홍범도에 뛰는 차도선'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의병장이었던 홍범도나 차도선과 같이 몸이 날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많은 분께서 홍범도 장군은 잘 아시겠지만, 차도선 장군은 잘 모르시리라 생각합니다. 차도선 장군은 1907년 홍범도 장군과 함께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 지역에서 의병 봉기를 선포했습니다.

차도선 장군은 원래 대한제국 지방군대인 진위대 소속이었습니다. 일제는 1907년 대한제국군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이어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시행하며 산포수가 가진 화승총마저 수거하는데요. 이에 분개한 68명 포수와 함께 차도선, 홍범도 두 장군이 1907년 11월 15일 무장봉기를 일으킵니다.

당시 차도선 장군은 나이가 44세였고, 홍범도 장군이 39세였는데요. 나이가 많은 차도선 장군이 도대장, 홍범도 장군이 부대장을 맡았습니다. 봉기 다음날인 16일 안산면의 친일파였던 주도익 면장을 처단하면서 첫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11월 22일에 후치령에서 일본군과 순사 10여 명을 물리쳤고, 11월 24일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몰려온 북청수비대 역시 격퇴합니다.

12월에는 활동반경을 넓혀 북청, 풍산, 황수원, 갑산, 삼수 등을 기습하고 전과를 올렸습니다. 의병이 주로 다루던 무기는 화승총이었는데, 신식 소총이 나오던 당시 화승총은 박물관에나 가서 볼 수 있을 법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병은 그 지역 지형에 밝다는 이점을 살렸고, 특히 사냥을 업으로 삼던 포수는 사격에 능숙했기에 승리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차도선·홍범도 의병부대는 소속된 인원이 1000여 명에 달하고 부대를 4개로 나눌 만큼 급성장했는데요. 이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은 3개월 동안 10여 차례 전투에 나섰으나 번번이 패배해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하지만 곧 의병들에게 시련이 닥치게 됩니다. 정규군은 계속해서 탄약과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지만, 의병 측은 식량과 무기, 탄약이 늘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인원마저 늘었기 때문에 그해 겨울을 넘기기가 어려웠습니다. 일본은 의병의 약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의병을 고립시켰고 가족을 끌고 와 협박했습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의 아내 역시 일본군에게 끌려왔습니다. 일본군은 아내에게 편지를 쓰도록 협박했는데요. 장군이 투항하도록 요구하는 편지였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끝내 이를 뿌리치며 혀를 깨물었습니다.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합니다.

홍범도 장군 아내분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저 '단양이씨'로만 알려졌는데요. 2021년 애국장을 수훈한 그는 '단양이씨'로 독립유공자 정보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후에 '단양이씨'가 남긴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홍범도 장군의 일기에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당시 홍범도 장군과 차도선 장군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됐는데요. 차도선 장군은 휘하에 250여 명 부하를 살리기 위해 일제의 회유책을 역이용하기로 결심합니다. 일본군에게 휴전을 제의하며 병력을 보존하기로 마음먹는데요. 홍범도 장군은 끝내 항전을 주장했고, 이윽고 서로 갈라져 차도선 장군과 그를 따르는 부하들만 산을 내려갑니다.

하지만 일제는 휴전 약속을 어기고 차도선 장군을 감금했습니다. 부대원 전원은 무장 해제되었습니다. 일본군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안 차도선 장군은 뒤늦게 후회하며 옥에 갇힙니다. 그대로 포기할 수가 없던 차도선 장군은 1908년 5월 7일 일본군 감시망을 뚫고 옥에서 탈출합니다. 그리고는 홍범도 장군을 찾아가 과오를 진심으로 뉘우칩니다. 그는 대장 직위를 내려놓고 백의종군하며 무장투쟁에 다시 나섰습니다.

차도선 장군의 탈출은 가족들에게 비극이 됩니다. 일본군이 차도선 장군 집으로 쫓아와 집에 불을 지르고, 차도선 장군 아내와 친형 차도심을 인두질하며 고문합니다. 하지만 차도선 장군 가족들은 비극에 굴하지 않고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차도심은 대장간을 운영하며 의병부대에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첫째 아들 차리덕은 아버지와 함께 의병대원으로 활동합니다. 둘째 아들 차운학은 항일지하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고 해방을 넉 달 앞두고 총살됩니다. 셋째 아들 차원복 역시 지하운동에 가담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손자들 역시 독립군 부대와 유격대에 소속되어 항일의 길에 함께 나섭니다.

이후에도 차도선 장군은 만주에서 항일활동을 줄기차게 이어갑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후원했고, 계속해 독립군을 모집하고 훈련시킵니다. 1920년대가 되어 나이가 많아진 장군은 더 이상 전면에 나서기 어려워지자 자신이 사는 마을에 서당식 학교를 만들고, 마을 어린이 10여 명을 가르치며 반일 교육으로 여생을 보냅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항일운동에 매진했습니다.

이런 차도선 장군과 관련해 독립유공자 가짜 후손 사건이 있었습니다. 중국과 수교가 맺어진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중국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유해를 국내로 들여오는 사업을 추진해 1995년 6월 23일 차도선 장군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됩니다. 당시 안장식에는 차도선 장군 후손이 아닌 엉뚱한 인물이 유족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은퇴한 세무공무원이었던 연안 차씨 종친회 사무총장 차 모 씨가 족보를 위변조해서 후손으로 등록하려 했던 것입니다. 당시 진짜 후손들이 중국과 북한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그 허점을 노린 시도였습니다.

후치령 전투에서 함께 수많은 일본군을 쓰러트렸던 홍범도와 차도선은 100여 년 시간이 흐른 뒤 대전현충원에서 재회했습니다. 차도선 장군 묘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36호에 있습니다.
  
교회와 학교 세우며 교육운동 이끈 김희백 지사
 
 애국지사 김희백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127호)
ⓒ 김선재
 
한편 국내 의병 활동을 정리하고 연해주로 넘어온 홍범도 장군은 재기를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1910년 조선이 강제로 병탄되자 홍범도 장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선인과 함께 '병탄 무효 선언서'를 발표합니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해 조선인을 탄압하는데요. 체포령을 피한 홍범도 장군은 각지를 다니며 군자금을 모으고 항일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합니다. 권업회에서 '청년회'를 조직하고 노동자는 '노동회'로 모았습니다.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블라디보스토크 노인회', '21인 형제 동맹' 등 끝없이 조직에 나섰고 독립을 준비해갔습니다.

마침내 1919년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 심지어 일본 본토에서도 '독립만세' 외침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에 고무된 '조선인 군정부'는 홍범도 장군을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독립전쟁 수행 명령을 내립니다. 홍범도 장군은 부하 106명을 이끌고 독립전쟁의 무대가 될 북간도로 진군합니다. 그때 홍범도 장군이 발표한 '대한독립군 유고문'에 결의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당당한 독립군으로 몸을 포연탄우(砲煙彈雨) 중에 던져 반만년 역사를 광명되게 하며, 국토를 회복하여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우리 독립군의 목적이요 또한 우리 민족을 위한 본의"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때 홍범도 장군과 함께 대한독립군에 소속되어 함께 싸운 동료도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먼저 독립유공자 1묘역 127호에 김희백 애국지사가 있습니다. 1899년 10월 17일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장율리에서 태어나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지사의 조부는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은진 중학교와 명신 여자중학교를 설립해 교육 운동을 이끌던 지사는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다가 일제의 감시가 심해 북간도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다 1919년 대한국민회가 설립되면서 이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에 떨쳐 나서게 됩니다. 이때 간도에서 만들어진 대한국민회는 미국 등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국민회와 구분하기 위해 간도국민회라고도 부릅니다. 3.1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됐고, 각 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자치기관이 만들어지는데요. 대한국민회는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독립운동단체였습니다.

이곳에서 김희백 지사는 홍범도 사령관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에 소속되어 여러 비밀 임무를 수행합니다. 군자금 모집과 무기 운반 그리고 밀정 색출 등입니다.

김희백 지사가 운반한 체코 군인이 사용하던 소총은 우리 독립군 무장에 도움을 줬습니다. 1차 세계대전 후 독립에 성공한 체코 군인들은 고국에 돌아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였습니다. 사용하던 무기를 처분할 방법을 찾고 있던 그들에게 북로군정서 지휘관이었던 이범석 장군은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던 당신들처럼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들이오"라고 체코군을 설득했습니다. 식민 지배를 겪었던 체코군은 연민을 느껴 우리에게 무기를 대량으로 팔고 고향으로 떠났습니다.

이후 김희백 지사는 일제 밀정을 사살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가지만 1924년 북간도 용정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됩니다. 1925년 3월 16일 지사는 강도 살인죄로 징역 12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릅니다. 1937년 출소 후 만주로 돌아왔지만 옥고의 여독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만주 명월구 교회 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지사는 1989년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는데요. 지사는 "광복되는 날 대동군 선산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해방된 나라가 지금까지 분단된 까닭에 지사가 남긴 유언을 지켜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완벽한 승리 이끈 이화일 지사 
 
 애국지사 이화일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30호)
ⓒ 김선재
 
독립유공자 1묘역에는 또 다른 대한독립군이 한 분 더 안장되어 있습니다. 바로 독립유공자 1묘역 30호에 안장되신 이화일 지사입니다. 1882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지사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아버지 이방윤과 함께 간도로 이동해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듭니다.

1919년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에 입대하고 2중대 3소대 1분대 분대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는데,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그에게 특별한 역할이 주어집니다.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 류준열 배우가 연기한 이장하 분대장의 실제 모델이 바로 이화일 지사입니다.

봉오동 전투 당시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을 골짜기 깊은 곳으로 유인할 필요를 느꼈는데요. 홍범도 장군은 이화일 분대장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화일 지사는 명령에 따라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해 부대원과 고려령 북쪽 1200m 고지와 마을에 매복했습니다. 적이 오기를 숨죽여 기다리다가 총격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성공적으로 유인해 왔습니다.

일본군은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 독립군이 매복한 작전지점까지 유인되어 왔습니다. 숨죽여 있던 우리 독립군은 먼저 도착한 적의 척후병을 그대로 통과시켰습니다. 이윽고 일본군 본대가 종대로 열을 지어 포위망 안에 들어왔는데요. 일본군은 골짜기를 통과하기 전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수색을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잘 훈련된 우리 독립군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부대가 완전히 매복에 걸려들었을 때 홍범도 장군은 일제 사격을 지시합니다. 우리 독립군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도작전을 수행한 이화일 분대장이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며 옛 부하였던 김희백 지사, 이화일 지사를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지하에서 만나셨다면 아마 봉오동의 큰 승리를 회상하셨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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