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땅 위에 쓰는 시

2023. 9. 15.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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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대한민국 1호 여성 조경가
자연과 사람이 조화되는 삶
디자인하기 위해 온몸 바쳐

그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 손톱이 닳고 거칠어 보이는 아주 작은 손이었다. 호미나 삽을 들고 힘차게 다니는 여든 살 넘은 할머니 조경사의 작은 체구는 마법을 부리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 1호 여성조경가 정영선 선생을 EBS 다큐영화제 개막식에서 만났다. 개막작이 그의 삶을 기록한 작품 ‘땅 위에 쓰는 시’였다.

내가 산책하는 한강의 샛강공원과 선유도 공원, 매주 지나칠 때마다 감탄하며 보는 용산 아모레퍼시픽 사옥의 정원, 풍요로운 예술의전당의 숲, 서울아산병원의 숲. 그 자체로 미술 작품인 호암미술관 희원은 정영선 조경가가 작업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86년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와 공원, 93년 대전 엑스포 기념 공원도 만들었다. 정 선생은 효율성을 높이 평가하던 도시의 난개발 시대를 거치며 자연과 삶의 조화를 지키는 데 온몸을 바쳤다. 요즘은 흔한 일이지만 아파트 단지의 주차는 지하로, 지상은 녹색으로 조경하는 프로젝트를 처음 시도한 것도 정 선생이다.

종종 놀러가는 파주의 지인네 중정을 그가 만들었다는 것도 내게 특별했다. 우리는 그 정원을 미술 작품 관람하듯이 즐겼다. 노각나무에 꽃이 필 때도 만났고, 나무수국이 지기 전에 보자며 찾아가기도 했다. 집 안에 끌어들인 자연은 계절마다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원의 풀 한 포기도 예사롭지 않았다.

영화 상영 직전 마이크를 잡게 된 정 선생은 사진 찍을 때 수줍어하던 그 모습은 아니었다. 강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영상 속의 조경 작업이 내 모든 것은 아니다, 영상 속의 작업이 내가 대단하다는 걸 말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메시지였다. 영상 프레임 너머의 삶이 있는 것이고, 영상의 아름다운 조경이 바로 선생 자신은 아니라는 문학적인 해석이 필요한 멘트였다. 이어 시를 쓰며 살 줄 알았는데 조경사로 산다는 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영화 제목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는 땅 위에 시를 쓰는 사람이다.

조경사의 일은 나무와 꽃을 예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정 선생은 ‘조경’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편견이 아쉽다고 토로했다. “조경은 예쁜 화장이 아니에요. 그 공간, 자연과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해야 하는 작업이에요. 나는 작업을 맡으면 시 쓰듯이 생각해요. 그 땅을 그 땅답게,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해야 하는 것인데… 일종의 ‘연결사’로 보면 돼요. 땅이 갖고 있는 역사나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 자연과 이웃과 잘 조화되는 걸 생각하죠.”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삶을 고민하는 것이 조경가의 소명이라는 말이다.

은퇴를 잊고 현역으로 일하는 이유도 아직 꿈을 꾸고 있어서였다. 한국적인 경관을 이 시대에 제대로 복원해 후대에 남기고 싶은 거였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은 ‘소박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양평의 산중에 집을 짓고 사는 정 선생의 정원은 온통 한국 토종의 풀꽃들로 웅성거렸다. 조경 현장에서 구하기 힘든 풀꽃이 선생의 정원에서 공수될 때도 많다고 한다. 매일 새벽 세 시간씩 관리하는 정원의 풀꽃은 이렇게 전 국토에 퍼지고 우리 눈에 보이게 된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도 손바닥만 한 정원이 있다. 햇빛이 쏟아질 때도 비와 눈이 내릴 때도 그 작은 정원을 보며 기운을 얻는다.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가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땅 한 평 갖기 어려운 도시의 삶에서 몽상적인 주문같이 들리지만, 아스팔트를 생명력 있는 대지의 대체물로 인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 선생의 서울아산병원 조경 철학을 보자. 병원에는 환자도 보호자도 의사도 간호사도 울 곳이 필요하다. 넓은 잔디밭, 보기 좋은 꽃밭이 아니라 몸을 숨기고 잠깐씩 울 곳을 만들어야 했다.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나무들을 고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경하는 마음에 고개를 수그린다. 그 작은 손이 자꾸 생각난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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