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 천재 과학자의 회한

이준목 2023. 9. 1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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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과학의 발전이 낳은 인류 최악의 발명품.'

바로 '핵무기'를 지칭하는 수식어다. 2022년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전세계의 핵무기 보유량은 무려 1만2705기에 이른다. 현재 전세계에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는 미국,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총 9개국이다. 세계 정세가 복잡해지면서 핵무기와 핵전쟁을 둘러싼 긴장감은 연일 고조되고 있다.

핵무기의 역사는 언제 시작되었고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9월 12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16회는 '핵폭탄 개발 –영화 오펜하이머의 진짜 이야기' 편을 통하여 핵무기의 역사와 과학자들의 고뇌에 대하여 조명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이른자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세계적인 과학자다. 최근 국내에서도 개봉한 <오펜하이머>는 바로 2차대전 당시 인류 최초의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와 오펜하이머의 활약상을 다룬 작품이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 당시 뛰어난 두뇌와 리더십으로 천재 과학자들을 이끌며 최초의 핵무기 개발을 성공시킨 주역이었다.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미국 맨해튼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줄리어스는 독일계 유대인 출신의 재력가였고, 오펜하이머는 유복한 환경에서 어릴때부터 언어와 과학 등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오펜하이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린 오펜하이머는 암석을 공부하는 취미가 있었고, 미국의 유명 지질학자들과 편지로 토론까지 주고받았다. 오펜하이머의 지식과 전문성에 감탄하여 그가 당연히 어른일 것이라고 예상하여 초청까지 했던 학자들은, 어린 오펜하이머가 나타나자 깜짝 놀랐고 전문가 못지않은 강연에 또 한번 감탄하며 열렬한 박수를 보내줬다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미국 최고명문인 하버드대 화학부를 조기에 졸업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물리학의 성지로 꼽히던 케임브리지대학원에 진학한다. 하지만 영국 유학생활은 평생 천재 소리만 듣던 오펜하이머에게 인생 첫 좌절을 안겨줬다.

미국에서 이론 물리학을 전공했던 오펜하이머는 미국에서의 실험 위주 물리학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급기야 오펜하이머는 불화를 겪던 지도 교수 패트릭 블래킷(영국의 유명 실험물리학자)의 책상위에 있던 사과에 화햑약품을 주입했다가 적발되는 대형사고를 저질렀다. 다행히 블래킷은 사과를 먹지않아 화를 피했고 오펜하이머는 정신적 결함을 인정받아 협상 끝에 정학 처분으로 마무리됐다.

1926년 22살의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떠나 독일 괴팅겐 대학교로 편입한다. 독일의 저명한 이론 물리학자였던 막스 보른이 오펜하이머에게 독일에서의 공동연구를 제안한 것. 당시 오펜하이머는 "고통스러운 실험실을 벗어날 수 있다는데 큰 해방감을 느꼈다"고 고백하며 실험물리학을 포기하고 적성에 맞는 이론물리학에 집중하는 길을 택했다.

양자역학은 원자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현대물리학의 기초이론이자, 훗날 원자폭탄 개발의 기본 원리가 되는 이론이다. 보른은 양자역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제시했으며 1954년에는 관련 연구로 노벨상까지 수상하게 되는 인물로, 오펜하이머가 양자역학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펜하이머는 괴팅겐에 진학한 지 1년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당시 신학문으로 평가받던 '양자역학을 배운 젊은 물리학자'라는 명성을 얻으며 물리학계의 라이징스타로 떠올랐다. 미국으로 금의환향한 오펜하이머는 불과 25세의 나이에 미국의 UC버클리대학교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의 교수에 동시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런데 성공한 물리학자이자 교수로 평탄한 삶을 걸어가던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한순간에 뒤바꾸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등장이었다.

독일을 장악한 나치 정권의 팽창정책과 유대인 탄압으로 유럽에서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이는 미국의 과학발전에 뜻밖의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한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많은 독일 과학자들이 나치의 탄압과 전쟁을 피하여 해외로 떠났다. 망명자들의 철저한 사상검증을 우선시했던 유럽과 달리, 과학발전이 뒤처진 미국은 아인슈타인같은 석학들의 망명을 적극 환영했다. 이는 2차대전 이후 훗날 미국이 유럽을 제치고 과학계의 주류로 떠오르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핵무기의 개발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나치의 탄압이 극심해지던 1938년, 독일 과학계에서 '핵분열'의 발견은 전세계 과학계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핵분열 이론을 바탕으로 무기를 제작하는 게 가능해질 경우, 이제껏 인류 역사상 찾아볼수 없었던 강력한 대량살상무기가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원자폭탄의 원리가 히틀러의 손아귀에 먼저 들어갔다는 것은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기 충분했다.

실제로 나치는 1939년 '우라늄 클럽'을 설치하고 최초의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비밀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우라늄 클럽의 책임자는 오펜하이머의 독일 괴팅겐 시절 동료였던 하이젠베르크였다. 독일에서 건너온 핵분열 소식은 전세계 과학계 역시 분열시켰고, 이제 과학자들은 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어제의 동료에서 서로를 견제하는 적이 되어버렸다.

미국으로 망명 온 과학자들은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손에 넣을 경우, 전세계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인슈타인과 과학자들은 1939년 8월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우려했고, 더 나아가 "미국이 나치보다 먼저 핵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아인슈타인의 편지가 전달된지 한달만인 9월 1일, 2차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고품질 우라늄 생산지인 주요 광산들도 대거 확보한다. 영국은 나치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가장 먼저 눈치챘지만, 나치와의 본토 항공전과 런던 대공습(1940-41)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면서 원자폭탄 연구를 추진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영국은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어 핵무기 관련 나치의 행보와 영국의 핵무기 개발 보고서도 전달하며 지원을 호소했다.

1941년 10월 9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계획을 전격 승인한다. 이듬해인 1942년에는 일본의 기습적인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며 참전을 망설이던 미국내 여론도 뒤바뀌었다. 루스벨트 정부는 참전과 함께 '무조건 독일보다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13일, 훗날의 인류 역사를 바꾸게 되는 극비 원자폭탄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가 막을 올리게 된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실제는 미국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지만, 그 시작은 맨해튼의 한 사무실에서 연구를 시작되어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참여 인원만 13만 명에 이르렀고, 연구 비용은 약 20억 달러(현재 가치 44조 3천억)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에는 존 폰 노이만, 닐스 보어, 한스 베테 등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 '어벤져스'가 대거 가세했다. 그리고 이 엄청난 과학자들을 이끌며 프로젝트를 지휘한 인물로 낙점된 것이 바로 당시 38세의 젊은 물리학자였던 오펜하이머였다.

오펜하이머는 이미 미국 정부의 원자폭탄 개발회의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핵무기 제작과정에서의 여러 가지 난제들에 중요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참가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괄사령관인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하나같이 두뇌가 비상하고 자존심이 강한 천재 과학자들을 통솔할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여러 과학자 중에서도 오펜하이머는 이야기의 핵심과 문제점을 파악하는 능력이 특출하고, 어학과 언변까지 갖췄다는 이유로 그를 과학자를 지휘할 연구소장으로 낙점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미국에서도 루스벨트 대통령과 일부 고위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당시 부통령인 트루먼도 처음에는 알지 못했을 정도로 철저히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루스벨트가 오펜하이머에게 친서를 보내어 보안의 중요성을 강조한 내용도 남아있다.

프로젝트의 핵심인물들이 모인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일대에는 고립된 사막내에 비밀리에 건설된 타운 안에 군인과 과학자, 그들이 가족까지 약 35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주했다. 곳곳에는 삼엄한 검문소가 설치되었고, 관계자들은 철저히 직위와 보인인가에 따라 구별된 출입증을 반드시 착용해야 했다. 또한 과학자들 역시 일부를 제외하면 자신이 무슨 연구를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으며, 서로의 이름이나 개인신상을 밝히지않고 일련번호로 호칭을 대신하게 했다고 한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빛을 발하기 까지는 수많은 난제를 넘어서야 했다. 당시로서 갓 공개된 핵분열 이론을 무기로 상용화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기술로는 원자폭탄에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을 대량생산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플루토늄을 활용하여 최초의 원자폭탄인 '가제트'를 완성했다. 연구 과정에서 누구보다 부담감이 컸던 오펜하이머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호리호리하던 체중이 50Kg대까지 김소하기도 했다.

2차대전의 전세가 점점 연합국 측으로 기울어가던 1945년 들어 상황이 급변한다. 그해 4월 12일 맨해튼 프로젝트를 승인했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뇌출혈로 급사하고, 불과 18일 뒤에는 전황이 불리해자자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나치 독일이 패망한다. 이제는 굳이 폭탄을 쓸 일이 사라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연구가 늦어진 것을 자책하면서도, 한편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통하여 오히려 그 위험성을 알려야한다는 명분으로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치는 패망했어도 일본이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기에 전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루스벨트의 뒤를 이은 트루먼 대통령은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를 진행한다. 실험 4일전 극비리에 기폭장치를 자동차로 운반하다가 경찰의 과속 단속에 걸려서 탄로가 날뻔한 아찔한 장면도 있었지만, 다행히 경찰이 트렁크를 조사하지 않아 위기를 모면하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3년간의 기다림 끝에 뉴멕시코 엘라모고도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진행되고, 트리니티 테스트는 성공을 거둔다. 당시 실험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매우 밝고 흰 섬광이 번쩍였고, 구름은 파동 형태로 퍼져나왔다. 검은 구름이 피어올랐는데 주황색 빛이 번쩍이더니 우리가 아는 버섯구름으로 변했다. 그리고 얼마후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고 폭발의 순간을 증언했다. 인류에게는 '핵무기의 시대'가 도래하는 순간이었다.

폭탄의 위력은 TNT 폭탄 20kt 정도와 맞먹었다. 폭발의 여파는 3km밖에 있던 폐가를 산산조각으로 날려버렸고, 16km밖에 있던 본부에서도 열이 느껴졌다고 하며, 충격파는 무려 160km나 떨어져 있던 사람도 느낄 정도였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이후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미국은 그해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우라늄 원자폭탄 '리틀 보이(위력 TNT 15kt)'를 투하했고, 3일 뒤에는 나카사키에 더 깅한 플루토늄 원자폭탄 '펫맨(21kt)'를 투하한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확인한 일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투하 장소를 선택하는 데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펜하이머는 기왕 폭탄을 사용해야 한다면 최대한 많은 피해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히로시마와 나카사키는 당시 대규모 산업도시로 일본에게는 중요한 군사검이자 전쟁물자 생산을 담당하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굳이 전쟁의 승리가 굳어져가고 있던 상황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게 꼭 필요했었는가라는 의문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논쟁거리다. 폭탄 투하 20년이 지난 후 오펜하이머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같은 질문을 받고 "전쟁으로 수천만명이 죽었고, 그러한 잔혹함은 20세기 중반에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폭탄을 사용한 전쟁의 종식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라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오펜하이머는 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오펜하이머는 1946년 창립한 원자력위원회의 자문위원을 맡게 되었고, 유명 잡지의 표지모델로도 등장하며 주목받으며 스타 과학자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2차대전 이후 전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COLD WAR)'이라는 또다른 혼돈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소련은 팻맨과 맞먹는 위력을 지닌 최초의 원자폭탄 RDS-1를 개발해내며 유일하게 원자폭탄 기술을 보유했다고 믿던 미국을 충격을 빠뜨렸다.

이러한 소련의 빠른 핵 개발속도 이면에는 '스파이'가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독일 출신의 영국 물리학자 클라우스 폭스는 "한 국가가 핵을 독점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주장하며 주요한 핵기술 정보를 소련에 넘겼다. 미국과 소련은 당시 핵무기 개발과 관련하여 엄청난 첩보전을 벌였고, 미국의 핵무기 설계도가 스탈린의 책상에 놓여있다는 소문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핵개발에 자극받아 '수소폭탄'을 제작하려는 트루먼 정부에게 '불가능한 기술'이라며 원자폭탄 개발때와는 달리 적극 반대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미운 털이 박혀 프로젝트에서 배제당한다.

미국은 1952년 결국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지만 불과 1년만에 소련 역시 보란 듯이 수소폭탄을 제작해냈다. 이후로도 발전을 거듭한 소련은 1961년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수소폭탄인 '차르봄바(TNT 5만kt)'까지 완성하기에 이른다.

죽기 전 오펜하이머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미국은 수소폭탄 기술이 또다시 소련에 유출되었다고 의심했다.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하고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던 오펜하이머도 용의자로 지목됐다. 설상가상 오펜하이머는 과거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던 사실과 불리한 증언들이 밝혀지며 '소련의 스파이'라는 의혹에 휩싸였다. 청문회를 통하여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오펜하이머의 불륜 행적을 둘러싼 '사생활 스캔들'이 공개된 것도 큰 타격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최종적으로 스파이 혐의는 벗어났지만, 국가기밀을 다루기에는 위험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보안 인가와 공직 자격을 모두 박탈당했다. 그동안 쌓아올린 업적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며 미국의 영웅에서 배신자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던 오펜하이머가 정작 원자폭탄이 낳은 냉전의 희생양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오펜하이머는 이후 교직으로 돌아가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67년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022년 조 바이든 행정부는 당시 오펜하이머에게 내려진 각종 조치가 부적절했다고 선언하며 68년만에 다시 명예회복을 할 수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세상을 떠나기 2년전 한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남겼다. 침울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 오펜하이머는 "우린 이 세상이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몇몇은 울거나 웃었지만 대다수는 침묵했다"면서 "힌두 경전 '바가비드 기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선문답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어쩌면 그는 생의 말년에 이르러 핵무기 개발을 주도했던 것을 후회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오펜하이머는 20세기에 과학기술의 발전과 부작용이라는 양면성을 그의 삶을 통하여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자연세계에는 비밀이 없다. 오직 사람의 생각과 의도에 비밀이 있을 뿐이다'이라는 오펜하이머의 어록은, 시대가 흘러도 계속 이어지는 과학발전과 윤리의 관계성에 대하여 다시 고민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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