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덕 교수의 바이블 디스커버리] <11> 예수님의 말놀이

2023. 9. 12.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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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팔레스타인에서는 성인끼리 말놀이를 즐겼습니다.

언젠가 예수님은 음욕 문제를 거론하다가 만일 오른 눈이 실족하게 하면 빼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발언을 그렇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 아주 역동적이고 강력했지만, 다양한 말놀이는 청중이 식사 때를 넘기고 허기를 참으면서 귀를 기울일 정도로 빠져들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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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팔레스타인에서는 성인끼리 말놀이를 즐겼습니다. 말놀이 가운데 흔한 게 수수께끼였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수수께끼는 삼손이 결혼식 피로연에서 하객에게 옷을 걸고 냈던 수수께끼입니다.(삿 14:14) 스바 여왕은 수수께끼로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했습니다.(왕상 10:1)

예수님도 대중을 상대로 수수께끼를 자주 활용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예수님이 여기서 말한 침노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막 14:58)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은 또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눅 13:32) 예수님이 여우라고 부른 실제 인물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대답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였습니다.

예수님이 즐겼던 또 다른 말놀이는 과장하기였습니다. 언젠가 예수님은 음욕 문제를 거론하다가 만일 오른 눈이 실족하게 하면 빼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파격적인 발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마 5:29~30)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지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발언을 그렇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지 않습니다. 셈어족에 속한 유대인 청중은 예수님이 말놀이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대상의 관심을 사로잡아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하려고 구사하는 수사의 일종인 과장법은 유대인이 사용하는 셈어의 대표적 특징이었습니다.

과장법은 발언과 거기에 담겨있는 실제 의미를 서로 구분하는 게 중요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중세 초반 일부 수도사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좇는 게 신앙의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동굴에 들어가서 평생 나오지 않거나 신체를 억압하고 스스로 훼손하는 사람들마저 생겨났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신학자 오리게네스(185~254) 역시 그랬습니다.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마 19:12) 오리게네스는 예수님의 발언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바람에 자진해서 남성의 상징을 제거했습니다. 과거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던 과장법을 몰라서 빚어진 슬픈 일이었습니다.

동음이의어를 활용하는 펀(pun) 역시 예수님이 즐겨한 말놀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외식을 문제 삼았습니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 23:24) 우리에게는 이런 하루살이와 낙타의 대조가 낯섭니다. 가장 작은 곤충과 가장 큰 동물을 비교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래 의도와 거리가 먼 해석입니다.

1세기 유대 언어인 아람어로 보면 본뜻이 선명해집니다. 아람어로 하루살이는 갈마(galma) 낙타는 감라(gamla)입니다. 그대로 예수님 말씀을 옮기면 “맹인 된 인도자여 갈마는 걸러내고 감라는 삼키는도다”가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하루살이를 조심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좀스러움과 자비와 정의를 외면하는 태도를 동음이의어로 풍자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 아주 역동적이고 강력했지만, 다양한 말놀이는 청중이 식사 때를 넘기고 허기를 참으면서 귀를 기울일 정도로 빠져들게 했습니다.(막 6: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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