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식 기자의 느낌표!] 역사는 미래 거울, ‘성혁명’ 잘 대처해야

최경식 2023. 8. 26.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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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년은 총명한 천성에다 해박한 학식까지 마냥 간직해 마치 봄철의 윤택한 숲 같고 또 둥근 보름달과도 같네. 침실에서 이불을 함께하니 정이 진실로 도탑다. 궁중의 '대식(對食)'을 본받은들 뭐가 해로우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통해 고려를 무너뜨리고 출범한 조선 왕조는 고려사회의 폐해를 답습하지 않았다.

조선 사회가 반드시 정도를 걸었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고려사회에 비해 훨씬 건전한 기풍이 조성됐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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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의 역사1
고려의 제31대 왕인 공민왕(오른쪽)과 노국대장공주. 총명한 개혁군주였던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사망한 후 문란한 성생활에 빠져들었다. 위키백과 제공


“이 소년은 총명한 천성에다 해박한 학식까지 마냥 간직해 마치 봄철의 윤택한 숲 같고 또 둥근 보름달과도 같네. 침실에서 이불을 함께하니 정이 진실로 도탑다. 궁중의 ‘대식(對食)’을 본받은들 뭐가 해로우랴.”

이 글귀는 고려시대 대문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담긴 한시 ‘차운공공상인(次韻空空上人) 증박소년오십운(贈朴少年五十韻)’의 한 구절이다. 얼핏 보면 한 소년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시처럼 보이지만 그 내막은 심상치 않다. 바로 고려 후기 고승인 유가대사와 소년의 동성애를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의미하는 ‘대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동성애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묘사하면서 이것이 “뭐가 해롭냐”라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고려시대는 이 같은 글귀가 자주 노출돼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였다. 문화적으로나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일반 민중들은 물론 귀족, 심지어 군왕들도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겼다. 마치 고대 그리스 사회처럼 동성애가 만연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특히 고려의 제31대 왕인 공민왕은 왕실 내에 동성애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자제위’를 구성해 집단으로 동성애 행각을 벌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공민왕은 자신의 부인인 노국대장공주를 지극히 사랑했던 이성애자였다. 더욱이 약화돼 가는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총명한 개혁 군주이기도 했다. 그랬던 왕이 사랑하는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180도 달라졌다. 사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국정을 내팽개치고 난잡한 성생활을 추구하다 결국 동성애의 길로 빠져들었다. 이는 동성애가 선천적인 것이 아닌 후천적인 것이라는 역사적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공민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 지도층의 동성애 행각은 국가 전체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국가의 도덕적 경계선이 허물어진 것을 넘어 국가의 존립 기반을 뒤흔들었다. 공민왕과 동성애 조직인 자제위 간 내부 갈등이 발생하면서 공민왕은 자제위의 리더격인 홍륜이라는 사람에게 살해를 당했다. 가뜩이나 위태로웠던 고려는 마지막 개혁군주였던 공민왕의 비참한 죽음으로 빠르게 ‘망국’의 길로 나아갔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만약 공민왕이 동성애에 빠지지 않고 국정을 잘 돌봤다면 고려는 옛 고구려의 고토를 수복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제2의 중흥기를 이뤘을 가능성이 높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통해 고려를 무너뜨리고 출범한 조선 왕조는 고려사회의 폐해를 답습하지 않았다. 보수적인 성리학 사상이 조선 사회를 지배하면서 성적 문란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특히 세종대왕은 동성애를 ‘극추(極醜)’라고 일컬으며 노골적으로 혐오했다. 극추는 지극히 추한 일이라는 뜻이다. 며느리였던 세자빈 봉씨가 궁녀인 소쌍과 동침한 사실이 드러나자 뒤도 안 돌아보고 폐위시키기도 했다. 조선 사회가 반드시 정도를 걸었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고려사회에 비해 훨씬 건전한 기풍이 조성됐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바탕 위에서 조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본받을 만한 예법을 정착시킬 수 있었다.

이 같은 역사적 사례는 동성애로 대변되는 성적 문란함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우리가 표방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가 무엇인지를 실증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성혁명’ 물결이 정치 사회 문화 미디어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전방위적으로 파고들고 있는 가운데 과거의 사건들은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주는 셈이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과거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해나가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자세다.

여러 가지 사안들을 보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다는 뜻에서 칼럼 제목을 ‘느낌표!’로 변경합니다.

최경식 기자 kscho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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