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광복군 "내겐 왜놈들이지만…이젠 같이 잘 살아야"

강태화 2023. 8. 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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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지금도 내게는 '왜놈들'일 뿐이야. 그렇다고 나쁘게만, 반대로 좋게만 지낼 필요도 없어요. 중요한 건 내 나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꼭 지켜야 한다는 거에요.”

지난 13일 영구 귀국한 오성규 애국지사(100)가 서울중앙보훈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고 있다. 오 지사의 입원실에 일본에서 가져온 훈장증과 국가유공자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중앙보훈병원


일본에 대한 생각을 묻자 오성규 애국지사(100)의 호흡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예전 일은 해결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또 다시 생각을 가다듬고는 “그래도 이제는 서로 협력해서 같이 잘 살아야 한다”고 했다.

오 지사는 일제 강점기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했다. 지난 13일 영구 귀국 전까지 일본에 생존해있던 마지막 광복군이었다. 16세 중학생 시절부터 젊음을 통째로 독립운동에 바치고 100세가 돼서야 고국 땅을 밟았다. 그럼에도 그는 18일 중앙SUNDAY 인터뷰 내내 “날 잊지 않아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를 이렇게 환대하게 해 죄송스럽다”고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오성규 애국지사와 함께 입장하고 있다. 뉴스1

Q : 고국에 돌아와 맞은 광복절이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
A : “도쿄를 떠나기 전날 짐을 싸놓고 생각했다. 짐을 다 챙겨놓고 나니까 가져갈 거라곤 작은 여행가방 하나가 다였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내가 이제 정말 드디어 내 고국으로 돌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정말 가슴이 벅차오르더라. 늘 생각했다. 죽을 때는 정말로 내 나라에 돌아가서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Q : 가방에 무엇을 담아서 오셨나.
A : “다른 건 다 필요 없다고 했다. 가족 사진들과 내 나라에서 준 국가유공자증이랑 훈장이면 충분했다. 잘 움직이질 못하니까 이제 옷도 별로 필요가 없다. 그런데 소중한 훈장인데, 난 이름도 없다. 난 아직도 ‘주태석’이다. 박민식 장관이 날 데려간다고 도쿄에 와서는 그걸 보더니 법을 바꿔서라도 내 이름을 꼭 찾아준다더라. 고국이 또 고맙다.”

지난 13일 영구 귀국한 오성규 애국지사(100)가 서울중앙보훈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고 있다. 오 지사의 입원실에 일본에서 가져온 훈장증과 국가유공자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중앙보훈병원

서울중앙보훈병원 오 지사의 입원실엔 보물처럼 가져온 작은 액자 3개와 훈장증ㆍ국가유공자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침대 옆에는 김포공항 환영식에서 누군가가 만들어준 환영 카드를 걸어놨다. 그런데 그의 말처럼 1990년에 받은 건국훈장 애족장엔 오성규가 아닌 광복군 활동 당시 썼던 가명인 주태석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광복군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아군끼리도 가명을 썼다. 혹시라도 일본군에 잡혔을 때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동지들끼리 고향이 어딘지도 잘 묻지 않았다고 한다. 오 지사에 대한 훈장 수여가 광복 이후 45년이나 걸렸던 것도 이러한 당시 상황과 관련이 있다. 또 훈장 수여 후 이름을 수정할 없는 현행법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는 100세가 되도록 여전히 ‘이름 없는 영웅’으로 남아있다.

Q : 귀국 직후 김학규 제3지대장 묘역에서 거수경례로 환국 신고를 했다.
A : “광복군 3지대에 있었다. 김학규 장군이 내 상관이었고, 이전에도 한번 묘역을 찾은 적이 있었다. 당연히 상관에게 환국 신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고를 하고 옆을 봤는데 이전에 없던 오광심 지사의 묘가 나란히 있더라. 김학규 장군의 부인인데, 오 지사는 같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종친이라고 나를 아주 예뻐했다. 그 귀한 알사탕을 나한테만 몰래 주셨던 게 지금도 생각난다.”

오성규 애국지사가 13일 오후 서울 동작구 서울현충원을 찾아 김학규 광복군 제3지대장 묘소를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Q : 광복군에 가담했던 때가 고작 16살 중학생 때였다.
A : “2~3명과 같이 북경에 있다가 광복군에 들어가기 위해 중경(충칭)까지 걸어갔다. 짚신을 신고 20일을 걸었다. 발에서 피가 나도록 걸었다. 나라고 왜놈들이 왜 안 무서웠겠나. 가다가 왜놈들 만나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했지. 어렸지만 죽을 수 있을 거란 걸 몰랐겠는가. 그래도 왜놈들 통치를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생각만 했다. 도착해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이더라. 동지들이 대부분 10대 후반이었다. 사실 내가 거기서도 가장 어렸다. 어쩌면 굳은 마음을 먹었던 그 때가 제일 행복했던 때였던 것 같다.”
이날 인터뷰는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전화로 진행됐다. 코로나가 재확산되는 상황에서 오 지사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국가보훈부의 결정이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의료진이 기자의 질문을 통역하듯 일일이 오 지사의 귀에 대고 큰소리로 다시 전달한 뒤 답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와 작은 떨림을 통해서도 지난 100년 굴곡진 현대사를 관통해 온 그의 한 많은 인생의 깊이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난 13일 영구 귀국한 오성규 애국지사(100)가 서울중앙보훈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고 있다. 오 지사의 입원실에 일본에서 가져온 훈장증과 국가유공자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중앙보훈병원

Q : 국내 진공을 위한 한·미합작특수훈련(OSS) 도중 해방 소식을 접하게 됐는데.
A : “드디어 내 나라를 찾았다는 생각 뿐이었다. 서로 만세를 부르며 얼마나 좋아했고, 얼마나 벅찬 감동이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다 부둥켜 안고, 막걸리를 다 꺼내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100살이 돼서야 돌아오게 될 지 그때는 정말 몰랐다.”

Q : 해방 이후 남북이 아닌 적(敵)으로 맞서 싸웠던 일본으로 가게 됐다.
A : “서울에 왔는데 경찰들이 나를 잡아가더라. 조사를 받았다. 고향도 북쪽(평안북도 선천)이고 해서 ‘빨갱이’ 아니냐고 생각했던 거 같다. 서울에 오자마자 며칠을 조사 받고 겨우 (김구 선생이 주도했던)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한 사실을 확인받고서야 풀려났다. 빈손으로 풀려 나왔는데 그때는 고향인 북쪽으로도 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서울이라고 지낼 곳도 먹고 살 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라곤 일본에 있는 한 지인뿐이었다. 조국이 해방되고 나니까 나도 하지 못한 공부도 하고 싶었다. 또 먹고 살기 위해 장사라도 하려면, 정말 살기 위해선 그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곧장 밀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Q : 아들에게도 광복군 활동 사실을 늦게까지 알리지 않았다고 들었다.
A : “나중에 말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광복군이셨냐’며 많이 놀라더라. 그래도 자랑스러워했다.”

지난 13일 영구 귀국한 오성규 애국지사(100)가 서울중앙보훈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고 있다. 오 지사의 입원실에 일본에서 가져온 훈장증과 국가유공자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중앙보훈병원

오 지사는 해방 직후 이념으로 나뉘어진 당시 상황에 대해 큰 실망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세월이 많이 흘러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는 뭐든 좋은 기억을 하고 싶다”며 당시 느꼈을 배신감과 환멸감 등에 대한 질문에 한참 동안이나 입을 굳게 닫았다. 그런 뒤 “이젠 나이가 있으니 한국에 살면서 크게 기대하기 보다는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조용한 여명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한국말을 잘 할 줄 모르는 아들 얘기에도 말을 아꼈다. 일본을 향해 총구를 겨눴던 광복군 출신의 아버지를 두고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으로 살아야 하는 아들에 대한 고민이 느껴졌다.

반면 야구 얘기를 꺼내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며 다시 말문이 트였다.

Q : 일본에서 재일교포 고교 야구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A : “야구를 아주 좋아한다. 집에 있을 때도 야구 방송만 틀어 놓고 지낸다. 장인 영감이 재일교포 고교 야구협회 이사장을 하고 있었다. 장인이 회장이 되고 내가 이사장을 했다. 야구를 통해서 일본에 사는 동포들을 좀 묶어주고 그런 걸 좀 해보고 싶었다. 옛날에는 재일교포 야구 선수를 데리고 한국에 가서 시합을 하면 전승을 했다. 솔직히 야구는 아직까지는 왜놈들이 좀 나은 것 같다.”

Q : 일본에 맞섰고, 또 평생을 일본에서 살았다. 후세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 같다.
A : “내게 일본은 그래도 여전히 왜놈들이다. 왜놈들…. 예전에 있었던 일은 그냥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일본은 자기 나라 이익만 생각한다. 그래도 이제 와서 보니 이웃에서 사이 나쁘게만 살면 뭐하겠는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해도 된다. 옛 일만 기억하기 보다는 같은 민주주의 국가니까 이제 서로 이해하며 살아야 한다. 이제는 일본과 함께 서로 협력해서 같이 잘 살아야지. 그런데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나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내가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오 지사는 보훈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고 있다. 불편한 곳이 적지 않지만, 그간 거동이 불편해 일본에서 주로 왕진(往診)을 받아왔기 때문에 첨단 의료 장비를 활용한 정밀한 진단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오 지사는 “치과 치료도 받고 보청기와 신발도 맞췄다”며 “모든 것이 고맙고, 이보다 더 이상 잘해 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챙겨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보훈부는 오 지사가 검진을 마친 뒤 문제가 없으면 보훈요양원 특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지난 13일 영구 귀국한 오성규 애국지사(100)가 서울중앙보훈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고 있다. 오 지사의 입원실에 일본에서 가져온 훈장증과 국가유공자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중앙보훈병원

오 지사가 귀국하면서 국내 독립유공자는 8명이 됐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독립유공자는 미국의 이하전 지사(건국훈장 애족장)가 유일하다. 보훈부는 이 지사 역시 본인의 의사에 따라 영구 귀국을 추진하거나, 사후 국립묘지 안장 등의 방안을 마련해 놓은 상태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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