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죽게 한 장화홍련 아버지, 왜 구제받았나

이준목 2023. 8. 17. 15: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TV 리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이준목 기자]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고전소설이자, 이른바 가정비극을 소재로 한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이른바 못된 계모 vs 전처의 자식 구도라는 뒤틀린 관계가 한 가정의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하여, 가장의 역할과 후처제의 제도적 모순이라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이야기가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 17세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한 실화라는 점이다.

8월 16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69회에서는 '조선의 충격실화, 자매 살인사건은 어떻게 소설 장화홍련전이 됐나'편을 통하여 한 현실과 픽션을 넘나드는 한 고전소설의 탄생비화와, 그속에 담겨있는 숨은 메시지들을 조명했다.

17세기 조선 북부인 평안도 철산 땅에 거주하던 좌수(座首, 고을 관리) 배무용은 훌륭한 인품으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배무용은 지역 유지의 딸이었던 장씨와 혼인했다. 장씨는 시집을 오면서 친정으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고, 남편 배무용 역시 부잣집 아내를 맞이한 덕분에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장씨는 어느날 꿈속에서 신선으로부터 받은 꽃이 아리따운 선녀에 되어 가슴에 안기는 태몽을 꾸고 두 딸을 낳았다. 자매의 이름은 모두 꽃에서 따온 배장화(薔花, 장미꽃)와 배홍련(紅蓮, 붉은 연꽃)이라고 지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장화와 홍련은 동네에서도 소문이 날 만큼 예쁜 아이로 성장했고, 네 가족은 더할 나위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아 배씨 가족에게 청천벽력같은 비극이 닥친다. 어머니 장씨가 원인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 장씨는 죽음을 앞두고 남편 배무용에게 "두 아이를 어여삐 여겨 잘 길러 시집가서 잘 살게 해주세요"라고 유언을 남긴다. 장화와 홍련은 어머니의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신을 붙잡고 통곡했다.

<장화홍련전> 원본에는 없는 내용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3년의 시간이 흐르고, 장화와 홍련의 인생을 뒤바꿀 또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배무용이 재혼을 하게 되면서 허씨라는 여인이 장화와 홍련의 계모로 들어오게 된 것. 남녀차별이 당연했던 조선 시대에 전처 장씨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한 배무용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재혼을 선택해야 했다.

허씨는 당시 스무 살에 불과하여 중년에 접어든 남편 배무용과는 나이 차이가 큰 데다 심지어 후처였다. 학자들은 조선 시대의 혼인 관습을 감안할 때 허씨라는 인물이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여식'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궁핍한 사정 탓에 좋은 혼처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고 당시 기준으로 스무 살은 결혼 적령기로는 늦은 나이에 해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망 높고 부유한 배무용으로부터 혼담이 들어오자 재혼이라고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소설 <장화홍련전>에서는 허씨의 외모를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얼굴이 한 자가 넘는 데다 두 눈은 퉁방울같고 코는 질병같고 입은 메기같고 머리는 돼지털같고, 키는 장승처럼 크고 목소리는 이리나 승냥이 소리 같았다"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표현만 놓고 보면 거의 사람이 아니라 무슨 짐승이나 괴물에 가깝다. 심지어 그 수위도 문학적 표현과 거리가 멀고 현대로 치면 명예훼손이나 인신공격 수준의 '악플'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실제로 외모에서 연상되듯이, 허씨가 극중에서 하는 행동 역시 대부분이 남을 헐뜯거나 괴롭히는 악행들 일색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의미심장한 비밀이 숨겨져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소설 <장화홍련전>의 원본(추정)에는 계모 허씨의 성격이나 외모 비하적 언급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면서 계모에 대한 내용이 각색-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소설이 유명해지면서 메인 빌런(악당)이 되는 허씨라는 인물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극중 허씨의 포지션이자 모든 비극의 단초가 되는 '계모'라는 존재에 대한 당대의 부정적인 인식을 반영한다.

조선 시대는 지금보다 평균 수명이 짧았고, 특히 결혼한 여성들은 의학의 한계로 인하여 출산 후유증 등으로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남성의 재혼은 빈번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은 자신이 죽고나서 남겨진 자식들이 후처로 들어온 계모에 의하여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까라는 공포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여성들의 계모에 대한 경계심과 거부감은 문학 속의 '악인 계모'를 탄생시키는 배경으로 이어진 것.

배무용과 허씨는 혼인 이후 무려 세 아들을 얻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어느덧 장화는 20세, 홍련은 18세의 성숙한 처녀가 됐다. 혼기가 찬 아름다운 두 자매에게 명문가들에서 잇달아 혼담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계모 허씨는 이런 상황을 불편한 심기로 바라보고 있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재산' 때문이었다.

조선 초기에 아내의 재산은 사망할 경우, 아내의 혈연에게만 상속됐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계모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있을 경우, 전처의 재산이라도 상속받는 게 가능해진다.

전처 장씨는 친정에서 시집오면서 많은 재산을 남겼다. 장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유산의 상속자가 된 것은 두 딸 장화와 홍련이었다. 자매가 결혼하면 장씨의 유산도 함께 가져가게 되므로 허씨와 아들들은 더 이상 부유한 생활을 보장받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허씨는 재산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떻게든 장화와 홍련이 시집가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질투심에 휩싸인 허씨는 장화와 홍련을 구박하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배무용은 허씨에게 "우리가 빈곤하게 지내다가 전처가 친정에서 재물을 많이 가져와 지금처럼 넉넉하게 되었소. 부인이 지금처럼 편히 먹는 것도 그 덕이오"라며 허씨를 나무랬지만, 정작 딸들이 학대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보호하지는 않았다. 가문의 몰락으로 혼인시 많은 재산을 가져오지 못했던 허씨는, 전처와 비교하는 남편의 발언에 자격지심이 폭발하여 더욱 분개했고, 오히려 장화와 홍련에 대한 학대는 더욱 심해졌다.

어느날 혼인을 앞두고 있던 장화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허씨는 잠들어있던 장화의 방에 들어가 정체불명의 핏덩이같은 물건을 들고나왔다. 허씨는 배무용에게 핏덩이의 정체는 장화가 몰래 '낙태한 태아의 사체'라고 주장했다. 이는 배무용과 장화는 물론이고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할 만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배무용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정작 딸 장화에게 진실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에 여성의 낙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소문만으로도 개인과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므로 일을 키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허씨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배무용에게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면, 장화를 죽여 문제를 덮어야 한다"고 경악할 만한 제안을 부추긴다.

사실 이 사건은 모두 허씨가 꾸민 음모였다. 허씨는 배무용과 두 자매의 대화를 엿듣고, 잘못하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쫓겨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두 자매를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

배무용은 며칠 뒤 깊은 밤 장화를 불러 허씨의 아들인 이복동생 장쇠와 함께 갑자기 외갓집에 다녀오라고 지시한다. 숲속을 함께 지나던 이복남매는 한 연못 앞에 이르러 장쇠가 돌연 말을 멈추더니 장화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장쇠는 "이 연못이 누이가 억만년 지낼 곳이오. 누이가 낙태까지 했으니 누이를 죽일 수밖에 없소"라고 소리치며 본색을 드러낸다.

그제야 계모의 함정에 빠졌음을 눈치챈 장화는 홀로 남겨질 동생 홍련을 걱정하며 "너의 말대로 죽겠다. 허나 외가에 홍련을 보살펴달라 전할 시간을 다오"라고 눈물로 호소한다. 그러나 장쇠는 이복누나의 마지막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장화는 끝내 연못에 빠져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는다.

현대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아무리 이복형제라고 해도 같은 혈육인 남동생이 누나를 살해했다는 설정이나 심지어 '실화'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여성의 순결을 강조했던 조선 시대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을 가문의 수치로 여겨서 가족들이 '명예살인'을 했던 경우도 종종 실제로 존재했다. 장화라는 여성이 누명을 쓰고 살해당한 이유와, 그 행위자가 하필 같은 혈육이자 남성인 장쇠라는 것은, 유교적 가치관을 내세워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고 문란함을 죄악시하던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장쇠는 누나 장화를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끝에 간신히 목숨만 건져 집으로 돌아온다. 실종된 언니의 행방을 걱정하던 홍련은 계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장쇠를 찾아가 몰래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된다. 장화가 낙태를 하여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기에 연못에 빠져 죽었고, 이를 지시한 인물은 바로 아버지 배무용이라는 이야기였다.

홍련은 언니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고 했으나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에서 자손-처첩-노비 등이 부모나 가장, 주인을 고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혈육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도 딸이 고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홍련은 홀로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비통에 잠긴 홍련은 장화가 죽은 연못을 찾아갔다가 자신을 부르는 언니의 환청을 들었다. 집에서는 딸을 죽인 아버지와 자신을 괴롭히는 계모가 있었고 평생을 의지하던 언니는 세상에 없었다.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었던 홍련은 언니의 목소리를 따라 연못에 몸에 던졌고 그렇게 역시 꽃다운 청춘을 마감한다.

딸 죽게 하고도 목숨 건진 아버지, 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장화홍련자매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시간이 흘러, 평안북도 철산 일대에는 5년에 걸쳐 부임한 부사(府使, 지방관리) 들이 모두 첫 날을 넘기지 못하고, 의문의 사망을 당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마을은 흉흉한 소문에 휩싸였고, 관리들도 아무도 철산으로 부임하려는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누구도 오고 싶어하지 않았던 철산에 정동호라는 인물이 신임 철산 부사로 부임한다. 본래 정동호는 직급이 낮아 부사가 될 수 없었던 인물이었지만, 철산의 의문스러운 사건을 하루빨리 해결하고 싶었던 조선 조정에서 인재를 찾다가 정동호를 특별히 승진시킨 것이었다.

정동호는 전임 부사들의 의문사를 밝히기 위하여 첫날밤, 일부러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기로 결정했다. 한밤중 서늘한 냉기가 불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정동호의 눈앞에서 나타난 것은, 붉은 치마를 입고 창백한 모습을 한 여인의 형상이었다. 담대한 성격의 정동호는 상대가 처녀 귀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말해보거라"라고 소리친다.

귀신은 정동호의 꾸짖음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절을 한 뒤 "저는 배무용의 딸 홍련입니다"라고 정체를 밝힌다. 홍련은 지난 5년간 철산에 신임부사가 부임할 때마다 억울함을 풀려고 매번 찾아왔던 것. 하지만 만나는 부사마다 귀신이 된 홍련을 보고 공포에 떨다가 사망했기에 미처 그녀의 하소연을 전할 틈이 없었다. 홍련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동호에게 밤새 자매의 억울한 사연을 소상히 전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소설 <장화홍련전>을 읽으면서 중요하지만 놓치기 쉬운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극중에서 귀신이 된 장화·홍련은 그저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부사들을 두렵게 만들고 사망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정작 홍련은 자매를 죽인 계모와 친부에게 직접 나타나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관리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멀리 돌아가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피해자가 '사적 제재(복수)'가 아니라, '공론화를 통한 명예회복'을 원했음을 의미한다.

다음 날 무사히 관청에 나타난 정동호는 가장 먼저 배무용이라는 인물이 있는지부터 확인한 뒤, 홍련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음을 알게된다. 정동호는 배무용과 허씨 부부를 불러서 장화·홍련 사건의 진실을 추궁했다. 그러나 허씨는 장화가 부정한 행실을 저질러 연못에 빠져죽었고, 홍련은 가출한 지 일 년이 넘어 행적을 모른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장화가 낙태한 아이라며 핏덩이를 제시한다.

잠시 난감해진 정동호는 문득 "증거를 가까이서 조사하면 진실을 알게될 것이옵니다"라던 홍련의 말을 떠올린다. 정동호는 당장 증거물로 제시받은 핏덩이의 배를 가를 것을 지시한다. 그러자 그 속에서는 가득 튀어나온 것은 놀랍게도 쥐의 배설물들이었다. 핏덩이는 태아가 아니라 쥐의 가죽을 벗겨서 계모가 만든 가짜였던 것. <신주무원록> 등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도 과학적으로 시신을 검안하고 그 기록을 분석하고 남겨서 최대한 공정하고 정확한 수사를 추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배무용은 계모의 계략에 말려들어 낙태물의 정체를 제대로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가장 사랑했던 두 딸의 죽음이 자신이 속은 탓이라고 뒤늦게 한탄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장화·홍련사건의 세 주범 중 아들 장쇠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허씨는 수도 한양으로 압송되어 왕이 직접 능지처참을 지시했으며 찢어진 사지를 조선 팔도에 나누어보내 백성들의 경계로 삼게 했다.

하지만 정작 딸을 죽이라고 사주한 배무용은 놀랍게도 목숨을 건졌고 훈방조치에 그쳤다. 그 이유는 귀신이 된 장화와 홍련이 아버지만큼은 사면해달라고 정동호에게 간청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애초에 모든 비극의 중심에는 가정불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바이한 '무능한 가장' 배무용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현대적인 기준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결말이다.

가부장제의 문제점 회피하면서 수정돼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여기서 소설 <장화홍련전>의 변천사를 보면 초기에는 그나마 배무용이 유배를 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후대에 이르면 아예 구제를 받는 것으로 내용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유교적 가부장제가 견고해지면서 '딸들의 고발로 아버지가 처벌을 받는 설정'이 부도덕하게 인식되면서, 오히려 장화-홍련은 온전한 피해자로 남지 못하고 '불효자'로 주객이 전도되어버리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그래서 장화와 홍련이 아버지를 구명하고 용서해주는 설정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배무용이 딸들에게 죄를 사면받게 된다면, 가정 불화의 모든 책임은 오롯이 '계모'인 허씨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시대가 흐를수록 계모 허씨는 성격에서 외모까지 타고난 철저한 악인으로 묘사된다. 사람들은 한창 단순해진 권선징악적 구성 속에 '계모라는 절대악'을 만들고 철저히 응징하는 데서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처럼 소설 <장화홍련전>의 이면에는, 가정비극의 책임을 사악한 계모(나쁜여성)과 전처의 자식(착한 여성)의 대립구도로 돌려서, 남성의 책임과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회피하려는 조선 시대의 보수적 유교 관념이 반영되어있는 것이다.

한편 정동호는 이후 장화와 홍련이 사망한 연못을 찾아가 두 사람의 시신을 수습했다. 자매의 시신은 5년이 흘렀음에도 마치 잠든 사람처럼 온전했으며, 서로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동호는 장화와 홍련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추모의 비석까지 세워줬다. 장화와 홍련은 마침내 모든 원한을 풀고 홀가분하게 이승을 떠날 수 있었다.

또한 후일담에는 배무용이 세 번째 결혼을 하여 쌍둥이 딸을 얻었는데 그들이 장화와 홍련의 환생이었고, 이번에는 전생과 달리 사랑받으며 결혼까지 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처럼 픽션과 현실을 넘나드는 <장화홍련전>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1865년 <가재사실록>에 따르면 정동호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이는 전동흘(全東屹)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전동흘은 18세기 조선 현종 시대에 실제로 철산 부사를 지낸 실존 인물이었고, 가재는 그의 호였다.

'장화홍련 살인 사건' 역시 그가 철산부사에 재직하던 1658년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과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계모의 음해나 귀신의 등장은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후대에 각색되어 추가된 이야기로 추정된다. 다만 소설속 정동호처럼 전동흘이 이 사건을 해결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이후 고위직까지 승진하여 이름을 날린 행적도 모두 동일하다.

훗날 정동흘의 후손이 조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가재사실록>을 편찬했고, 여기에 정동흘의 실화를 소재로 하여 구전으로 전해지던 <장화홍련전>이 포함되면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져내려온 것이다. .

<장화홍련전>은 지금까지 각색된 이야기만 약 79종에 이르며 2003년에는 현대적으로 각색된 영화(장화, 홍련)으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그만큼 <장화홍련전>이 재미있는 대중 소설이라는 구성속에 한편으로 당대의 현실과 애환, 문제인식 등이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