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전쟁터에서 보낸 거야"... 101세 노인의 사연

오문수 2023. 8. 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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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징집돼 필리핀 민다나오 전투 중 종전... "미치도록 고향에 가고 싶어 귀국"

[오문수 기자]

 올해 101세인 오경섭 옹은 한국현대사의 비극인 태평양전쟁, 여순사건, 6.25전쟁을 온몸으로 겪으며 청춘을 보냈다. 6.25전쟁 중 중공군이 쏜 총탄에 다리를 부상당하기도 한 그의 일생에 경의를 표했다
ⓒ 오문수
   
지난 13일 오후, 고향 역사에 대해 녹취할 일이 있어 전남 곡성에 방문했다가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인터뷰 대상인 앞집 깨복쟁이 친구 어머니 말씀 때문이다.

"동네 일이라면 101살이나 되신 오경섭씨가 알지도 모르니 한번 찾아가 물어보세요. 일본군에 징집되기도 했고 6.25 때 부상당한 국가유공자이기도 하니까요. 100세가 넘었지만 기억력은 좋아요."

고향 집에서 10미터쯤 떨어진 곳에 사는 오경섭 옹(101)은 초등학교 동창생의 아버지다. 어릴적 동네 어르신을 길에서 만나면 항상 공손히 인사드리는 게 동네 전통이라 당연히 인사드리고 살았지만 그런 사연이 숨어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오경섭 옹 집 대문에 걸린 국가유공자 팻말
ⓒ 오문수
   
마트에 들러 음료수 한 박스를 사들고 대문을 열려고 하니 대문간에 '국가유공자 오경섭'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안마당에 들어가 유리창을 통해 방안을 보니 의자에 앉아 TV를 보고 계셨는데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하는 수 없어 현관문을 열고 인사를 드렸지만 알아보지 못해서 아버지 성함을 말하자 그제야 반갑게 손을 내밀며 방안으로 들어오란다. 자초지종을 말하고 일본군에 징집당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보청기를 꼽으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들어

일본군에 징집된 그는 맨 처음에 일본 해군 군속으로 수원지를 만들어 일본 군함에 물을 공급하는 일을 했다. 나가사키현 사세보시 인근에 배치됐던 그는 전황이 급박해지자 일본 군함을 타고 대만을 거쳐 필리핀 민다나오섬에 있는 수송부에 배속됐다.

산 밑에 배를 대고 군수물자를 나르던 일본군은 미군이 상륙하자 모든 군수물자를 가지고 산으로 대피했다. 산속에 숨었지만 미군의 함포사격 때문에 피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거머리 때문에 맨땅에 앉아 쉴 수도 없었다.

며칠이 지나 먹을 게 떨어지자 밭에 가서 고구마를 훔쳐먹던 중 헌병으로부터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모든 무기를 버리고 하산해 항복하라는 소리를 듣고 내려오니 미군들이 전투식량(C레이션)을 내놓고 마음껏 먹으라고 해서 배부르게 먹었다.

종전 후 미치도록 고향집에 돌아가고 싶어 귀국행 배에 몸 실어

그는 미군 차량에 올라타 미군 부대에 집합했다가 미군 상륙정에 올라타 시키는 대로 했다. 일본 해군 본부인 요코스카 항에 도착했다. 이때 일본인 분대장이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한국으로 가고 일본에 남을 사람은 일본에 남으라'는 말을 듣고 귀국선을 탔지. 집에 가고 싶어 못 살겠더라고. 일본 사람들이 차별해. 일본 군인들은 밥그릇 가득히 밥을 주는 데 한국인들에게는 적게 줬.지"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진압군으로 투입 

듣고 보니 그분의 청춘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해방이 돼 한국에 돌아와 마산에 있는 국군 15연대에 근무하던 중 1948년 10월 19일에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여순사건 진압군으로 여수에 투입돼 작전 중 6.25가 발발해 인민군이 남원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산까지 후퇴했다.

마산 인근에서 인민군과 전투하던 그의 부대는 다시 부산진국민학교로 가서 날마다 훈련을 받았다. "전쟁터에 보내주지 않고 왜 날마다 훈련만 시키느냐?"고 물었더니 "조금 있으면 안다"고 말한 장교는 부대원을 완전무장시켜 낙동강 전투 현장에 있는 미군부대에 배속시켰다. 한 부대에 2~3명씩 배속된 한국인들은 미군들이 사용하는 단어 몇 가지를 배웠다.

"낙동강 전투는 겁났어. 미군들은 적군을 '에네미(enemy)'로 부르고 아군은 '지아이(GI)'로 불렀어. 인민군은 미군 전투기가 무서워 낮에는 꼼짝도 못 하다가 날씨가 안 좋은 날이나 밤이면 낙동강변 나락논 사이로 개미떼 처럼 몰려왔지. 미군들은 참호 앞에 수류탄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던질 준비를 하고 뒤에서는 포를 엄청나게 쏴서 인민군들을 몰살시켰어. 다음날 아침 나락논을 보니 인민군 시체가 엄청났어. 바람이 불면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지."

맥아더가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맥을 못 추던 인민군은 북으로 계속 후퇴했고 그도 UN군과 함께 북진했다. 그분의 오른쪽 다리에는 움푹 패인 총상 자국이 나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부상당했느냐?"는 물음에 그분이 답했다.

한국전쟁 참전했지만 다리 부상 당해
       
 6.25 전쟁 중 중공군이 쏜 총탄에 관통당한 오경섭 옹의 다리 모습.
ⓒ 오문수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UN군이 서울까지 후퇴했어. 서울 근교에서 수색작전 중 숨어있던 중공군이 쏜 총알이 다리를 관통했지. 누군가 작대기로 내 다리를 때린 것 같았어. 일어서려는 데 일어날 수가 없었어. 다리가 퉁퉁 부어올라 후송돼 대전 제1육군 병원과 부산 3육군병원으로 후송됐어. 그러다가 광주에서 재수술해서 이렇게 걸어 다녀. 돌이켜보면 내 청춘을 전쟁터에서 보낸 거야."

"혹시 일본군에 징집된 당시의 군대 사진이나 6.25전쟁 중 찍었던 사진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있었는데 모두 어디로 가버렸다"고 아쉬워 한 오경섭 옹.

바쁜 일이 있어 급히 여수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다음에 또 뵐 것을 약속하고 집을 나오며 "건강하셔야 또 뵐 수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100세가 넘었는데 뭘!"이라고 손을 흔들며 "조심히 가시라"는 그분의 답례를 받고 돌아가는 길에 생각해 봤다.

나도 저 나이까지 살 수 있을까? 내가 만약 100살까지 살면 저런 기억력을 간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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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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