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좋았던 시절이 끝났음을 인정하자 [난 네게 반했어]

이슬하 2023. 8. 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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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게 반했어 챌린지] 브로콜리너마저의 <좋았었던 날은>

콘텐츠가 넘쳐 나는 시대, 당신에게 딱 맞는 책이나 영화, 노래를 배달해 드립니다. 좋은 콘텐츠를 소개하면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난 네게 반했어 챌린지'는 다음 필자를 지목하는 릴레이 연재입니다. 글의 마지막 부분을 주목해 주세요. <편집자말>

[이슬하 기자]

▲ 브로콜리너마저 밴드 브로콜리너마저, 왼쪽에서부터 류지, 덕원, 향기, 잔디. 향기는 2020년에 탈퇴했다.
ⓒ 스튜디오 브로콜리
 
벌써 지난해의 일이다. 브로콜리너마저의 연말공연에 갔다. 여유 있게 도착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티켓을 받고 자리에 앉아 가방 속 카메라를 꺼냈다. 악기만 놓인 텅 빈 무대를 이리저리 당겨가며 찍었다.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휴대폰을 꺼내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상했다. 잡히는 게 없었다. 바닥에 내려놨던 롱패딩 주머니를 샅샅이 뒤지고, 의자 밑을 살펴보고, 가방 안도 확인해 봤지만, 휴대폰은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공연이 곧 시작될 것 같았다. 한동안 허둥대던 나는 끝나고 찾자는 생각으로 수색을 멈췄다. 불이 꺼지고, 찝찝한 마음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사라진 휴대폰, 그리고 시작된 공연
 
 <좋았었던 날은>이 들어 있는 앨범 <어떻게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표지
ⓒ 비스킷 사운드
 
멤버들이 한 명씩 무대로 들어서고, 덕원님이 어쿠스틱 기타를 잡았다. 무대에서 나의 통화연결음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은 잃어버린 휴대폰 때문에 시끄러웠다. 나를 안심시키려 거는 최면과 속절없이 피어나는 걱정이 싸우고 있었다. '내가 정신없는 사이 옆 사람이 훔쳐 간 건 아닐까?' 생사람까지 잡아보는 사이, 공연은 어느덧 중반부로 접어들었다.

멤버들이 옷을 갈아입고 무대 앞쪽 소파에 앉았다. 초창기 음악부터 메들리로 들려주던 멤버들은 한 명씩 연주를 멈추고 소파에서 일어나 무대 밖으로 사라졌다. 분명 아직 안 부른 노래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이것으로 끝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문득 이게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이 공연의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의 끝.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고, 이제 브로콜리너마저는 해체한다"라고 발표할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이들이 끝을 준비하는 것 같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날이 내 앞에 성큼 다가온 기분이었다.

다행히 덕원님이 아무 말 없이 노래를 이어갔고, 곧이어 조명이 류지님에게로 넘어갔다. 노래를 부르는데, 처음 듣는 노래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뭐지, 이 노래는?' 자세히 들어보니 원래는 덕원님이 부르는 <좋았었던 날은>이었다. 마스크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도록 펑펑 울어버렸다. 2년 전 여름, 공연에서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날처럼.

우리 좋았었던 날도 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좋았던 날을 모두 두고서야 돌아설 수 있었네/ 휘청이며 마음만은 앞선 채로 모두 잡아두려 했던 건 나의 욕심이었을까/ 나를 비껴 세울 수도 없는데 무슨 사랑을 말해 위로를 말해/ 우리 좋았었던 날은 모두 두고서야 돌아설 수 있었네 

그때 이 노래는 아직 음원으로 나오기 전이었다. 그래서 가사도 모르고 듣는데, 한 소절 한 소절이 또박또박 박혔다. 그 여름 나는 너무 완벽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했고, 내가 좋아하리라 생각한 일이 생각보다 더 좋았다. 이 완벽한 날들이 언젠가 깨져버릴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애를 써도 끝은 기어코 찾아왔다.

건강 계단의 역설
 
 시민들이 서울시가 설치한 '기부하는 가야금 건강계단'을 이용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가끔 지하철역 같은 데에 보면, 건강 계단이라는 게 있다. 계단 면에 한 칸을 오를 때마다 수명이 몇 초씩 늘어나는지 적혀있다.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택할 때가 있다. 커지는 숫자들을 밟고 올라가다 보면, 왠지 뿌듯하면서도 어딘가 찜찜하다. 여기 적혀있는 게 진짜일까? 그럼 내가 계속 이렇게 계단을 오르면, 나는 수명이 자꾸만 늘어나 영원히 살 수 있는 건가?

그러나 계단을 아무리 올라도 삶은 언젠가 끝나는 법이다. 삶에 끝이 있는데 시절에 끝이 없을 순 없다. 꿈만 같은 삶의 한 계단 한 계단에도 끝은 온다.

눈물범벅이었던 공연이 끝나고, 옆 사람과 같이 다시 휴대폰을 찾았다. 정말 어디에도 없는 것 같더니, 이내 민망하게도 내 가방 깊숙한 곳에서 네모난 물체가 잡혔다. 나도 모르게 거기 넣어둔 모양이었다.

잃어버린 휴대폰처럼 난데없이 나타나는 추억이 나를 괴롭히는 날이면, 좋았던 시간을 너무 자주 꺼내 본 탓에 힘들었던 시간까지 줄줄이 달려 나오는 날이면, 나는 <좋았었던 날은>을 듣는다. 한 시절로부터 돌아서기 위해서는 때로는 좋았었던 날을 모두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함을 곱씹으면서.

* 다음 필자는 김은비(은물) 작가입니다. 나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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