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딸들 반란' 18년 지나도…"女는 안돼" 신숙주家 자격 차별

윤지원 2023. 7. 3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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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진영

고령 신(申)씨 가문의 여성인 A씨(57)는 어릴 적 집안 어른들로부터 숙주나물을 녹두나물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배웠다. 숙주나물의 어원에는 집안의 유명인사인 조선 전기 명인 신숙주의 변절을 폄훼하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A씨네 집은 아버지가 종중 간부였던데다, 매년 종중 묘지에서 지내는 시제에 참석할 정도로 문중에 충실했다.

그런 A씨에게 지난해 친오빠들이 예기치 않은 소식을 들려줬다. A씨가 속한 고령 신씨 B공파 종중이 여성 종원을 배제한 임시총회를 열고, 남성 종원들에게만 토지 수용금을 1000만원씩 지급하기로 결의했다는 얘기였다. A씨는 B공파 종중에 부당함을 피력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여성은 우리 구성원이 아니다”였다. 딸만 둘을 둔 A씨는 종중의 여성 차별에 맞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길로 종중을 상대로 “임시총회 결의는 무효”라며 종원 지위 확인소송을 냈다. 법원은 A씨 손을 들어줬다.

수원지법 평택지원 민사1부(부장 박병찬)는 지난 20일 “원고 A씨는 신석용을 시조로 하는 고령 신씨 28세손인 여성으로, 문춘공 망 신숙주(8세손), 봉례공 망 신주(9세손), 만춘공 망 신억(19세 손) 등의 후손”이라며 “그런데도 해당 종중이 A씨를 비롯해 여성 종원에게 소집통지를 하지 않은 채 임시총회를 개최했고, 당시 결의는 성년 여성 종원의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이어서 무효”라고 판결했다.

중국 화공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신숙주 초상. 보물 613호.

재판의 쟁점은 피고 B공파 종중이 ‘고유한 의미의 종중’이 아니라 ‘종중 유사단체’에 불과한지였다. B공파 종중이 “우리의 전신은 1985년 조직된 ‘재경 평택 화성지구 고령 신씨 친목회’로 우리는 진짜 종중이 아닌 종중 유사단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다.

고유한 의미의 종중은 자연 발생적인 종족 집단체로 인위적인 조직행위가 필요하지 않고, 공동선조의 후손은 그 의사와 관계없이 성년이 되면 당연히 그 종원이 된다.

반면 종중 유사단체는 비록 그 기능은 종중과 별다를 차이가 없어도 공동선조의 후손 중 일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구성된 사단(社團)을 의미한다. 이들은 사적 자치 원칙에 따라 구성원 자격과 가입조건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대법원도 2011년 “종중 유사단체 회칙에서 남성만으로 구성원을 한정하더라도 이를 양성평등 원칙 위반이라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B공파 종중은 “우리는 종중 유사단체로서 회원자격을 만 19세 이상의 성년 남성으로 제한하는 정관을 갖추고 있다”며 “정관에 따라 자격을 갖춘 회원들에게만 적법한 소집 통지를 거쳐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결의한 것은 적법·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만약 B공파가 종중 유사단체라면 정관에서 회원 자격의 취득·상실·승계 등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여 두는 게 일반적인데, B공파 정관에는 그에 관한 아무 규정이 없다”며 “B공파가 공동선조와 성과 본을 같이 하는 후손은 성별 구분 없이 성년이 되면 당연히 그 구성원이 되는 고유 종중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족보박물관


종원의 지위는 확인됐지만 A씨가 토지수용금을 받기까진 갈 길이 멀다. 임시 총회 결의가 무효가 된다고 A씨에게 종중에 재산을 청구할 권리가 확보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적법한 소집절차를 거쳐 열리는 새로운 종중 총회에서 여성 종원들에게도 분배해주는 새로운 결의가 이뤄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A씨를 대리한 최지현 변호사(법무법인 사유)는 “만약 B공파 종중회가 여성 종원을 대상으로 차별적인 입장을 꺾지 않을 경우, 업무상 배임 혐의로 형사 고소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종원 지위 확인 소송→총회 재소집→총회 재의결로 이어지는 긴 절차 때문에 권리를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여성 종원들이 적잖다”고 말했다.


‘딸들의 반란’ 이후 18년 지났지만


`여성종중원 인정판결 환영모임`이 2005년 8월 9일 오후 3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렸다. 이 모임은 지난달 21일 대법원이 내린 `출가한 딸도 종중원으로 인정한다`는 판결을 축하하기 위해 열렸다. 이날 모임에는 용인 이씨 및 청송 심씨, 성주 이씨 등 소송을 냈던 종중의 딸들 100여 명이 참가해 자축했다. 왼쪽부터 이원재 용인이씨사맹공파출가여성회 회장, 김주수 경희대 명예교수,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장, 장하진 여성가족부 장관, 조영황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심정숙 청송심씨혜령공파여성회 대표, 이계순 성주이씨여성회 대표.
성년 이상 남성만 종원으로 인정하는 관습은 뿌리가 깊다. 이 관습에 균열을 낸 것은 2005년 2월 헌법재판소가 내린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이었다. 같은 해 7월 대법원도 관습법에 기반했던 기존 판례를 깨고 “여성도 종원이 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딸들의 반란’이라 불렸던 이 판결을 대법원은 2008년 ‘한국을 바꾼 시대적 판결 12건’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18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 종원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다. 이번 사건처럼 ‘종중 유사단체’를 표방하며 여성 종원을 원천 배제해버리는 경우가 늘어서다. 최 변호사는 “대놓고 종중이라고 하면 여성 종원의 지위를 인정해야 하니까 종중 유사단체라고 일단 주장하고 보는 것”이라며 “같은 쟁점의 소송에서 여성 종원이 패소한 경우도 꽤 많다”고 말했다.

여성 종원을 따돌리고 재산을 ‘꼼수 분배’하는 경우도 끊이지 않고 있다. 2015년 강릉의 한 종중은 토지보상금을 종중 행사 참여도에 따라 차등 분배하기로 총회에서 결의했다. 그 결과 대다수 여성 종원은 남성 종원과 달리 소액을 분배받았다. 해당 종중에서 여성은 2016년 7월이 돼서야 종원으로 인정받았는데, 그 이전 시기까지 포함해 총회 출석률을 따졌기 때문이다.

2016년 의정부지법 민사합의11부(부장 정원)는 “종중 행사 참여도를 판단하기로 한 기간에 여성들이 종중 행사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며 해당 결의가 무효라고 판결했다.


엄마 성씨로 개명해도 모친 종친회 종원 자격 인정


대법원 대법정 중앙포토
판결의 추세는 2005년 판례의 취지를 잇고 있다. 지난해 6월엔 성인이 된 후 어머니 성과 본관으로 바꿨다면 어머니가 속한 종친회 소속으로 인정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모계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종원이 될 수 없다는 관습은 법률로서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취지다.

2021년 6월엔 종중의 재산을 아들·딸·며느리에게만 나눠주고 사위를 제외한 것은 무효라는 법원(수원지법 민사12부)의 판단도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는 재산을 주면서 딸의 배우자인 사위 몫이 없는 것은 남녀 차별”이라는 딸들의 주장을 법원이 받아들인 것이다.

윤지원 기자 yoon.jiw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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