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에게 가까이 가고 싶었던, 네 번 결혼한 여인이 만든 저택 [진혜윤 교수의 미술, 도시 그리고 여성]

진혜윤 2023. 7. 2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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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시대 상류층 여성의 권력을 시각화한 베스의 하드윅 홀

진혜윤(한남대 회화과 교수)

 하드윅홀 전경
ⓒ Wikipedia
 
영국 런던에서 북쪽으로 약 세 시간 가량 떨어져 있는 더비셔주 작은 마을 체스터필드에는 튜더 왕조 시대 건축의 백미인 '하드윅 홀(Hardwick Hall)'이 자리한다. 밝은 베이지 색의 사암으로 지어진 3층 높이의 이 건물은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1590년에서 1597년 사이에 지어진 컨트리하우스다. 컨트리하우스란 단순히 시골에 지어진 집이 아니라 봉건귀족들이 자신의 영지에 세운 대저택을 말한다.

토지를 기반으로 한 신분제 사회에서 저택은 권력의 다른 이름이었다. 귀족들은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영지를 경영하며 땅이 없는 자들을 지배했고, 호화로운 저택 건설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입지와 영향력을 과시했다. 때문에 컨트리하우스는 귀족들의 일상생활 공간 그 이상을 의미한다.

하드윅 홀은 드물게 여성의 권력을 시각화한 컨트리하우스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에서 군주 다음으로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던 여인, 주로 '하드윅의 베스'로 불리는, 제6대 슈루즈버리 백작부인 엘리자베스 탈봇(Elizabeth Talbot, Countess of Shrewsbury, 베스)이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완성한 컨트리하우스다.
 
 하드윅의 베스 초상화(Rowland Lockey, 1592)
ⓒ Rowland Lockey
 
베스는 1527년 평범한 시골 지주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5세의 나이에 결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죽었다. 이후 그녀는 세 차례 더 결혼과 사별을 반복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 나갔다. 그녀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시녀로서 권력의 중심에 다가서던 때, 왕실 재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캐번디시와 두 번째 결혼을 해 8명의 자녀를 낳았고 '채스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라는 걸출한 컨트리하우스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이 차가 스무 살이 넘었던 캐번디시가 먼저 사망하면서 그녀는 여왕의 근위대장이었던 윌리엄 세인트 로이 경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그런데 그 또한 일찍 사망하게 되면서, 이들로부터 연이어 상속받은 유산을 바탕으로 영국에서 여왕 다음으로 가장 재산이 많고 권력이 높은 과부가 되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은 1567년 제 6대 슈루즈버리 백작인 조지 탈봇과 하였으나 그와의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결국, 남편 곁을 떠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온 베스가 건설한 저택이 바로 하드윅 홀이었다.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베스는 결혼을 일종의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한 속물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녀가 전 남편들의 사망을 계획했다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결혼은 남녀 간의 사랑의 결실이 아니었다.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가문과 가문이 토지와 재산을 늘리고 특권을 강화하기 위해 맺는 법적 계약 관계였다. 정서적 유대보다 가족 집단의 이익을 중심으로 강력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남성에 종속된 삶을 살았던 여성에게 결혼은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는 결실이 되지 못하면 실패로 간주되었다.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1세가 '처녀 왕'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사회에서 결혼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활동이었다. 따라서 베스가 연이은 결혼을 통해 이룬 신분 상승은 개인의 세속적 야망이 아니라 오히려 영리한 교섭의 성과로 이해해야 한다. 왕족과 혈연관계도 없는 여성이 권력의 정점에 다가서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권력을 형상화한 하드윅 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권력의 표현 수단으로서의 건축은 남성의 모습을 했다. 하지만 하드윅 홀은 여성 권력을 구체화한 건물이기에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베스는 하드윅 홀의 디자인을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ythson)에게 맡겼다.

스미드슨은 16세기 중후반 영국의 컨트리하우스 디자인에 유럽 대륙에서 유행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적용한 인물이다. 그는 하드윅 홀 디자인에서도 고전주의 양식을 도입해 대칭을 강조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여기에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유리 창문을 더해 영국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컨트리하우스로 완성했다.

하드윅 홀은 기본적으로 직사각형 건물 양쪽 끝에서 여섯 개의 타워가 뻗어 나가는 듯한 형태의 외향적 구조로 지어졌다. 이러한 평면 구성은 엘리자베스 1세가 사용하던 햄프턴 궁전을 모방한 것이었다. 당시 햄프턴 궁전은 파사드의 터렛 장식이 특징인 중세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드윅 홀의 첫인상은 철 지난 튜더 양식을 떠올리게 하지만 궁정 양식을 귀족의 컨트리하우스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저택 디자인의 지향점을 찾아야 한다. 스미드슨은 궁정에 버금가는 위엄 있는 디자인에 엄청난 양과 크기의 유리 창문으로 베스의 권세를 시각화했다.

16세기 말 영국에서 창문은 사치품이었다. 창문에 쓰이는 유리가 워낙 고가였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기계 생산이 가능해진 19세기까지 '창문세'를 걷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드윅 홀에는 창문이 아낌없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하드윅 홀은 '벽보다 창문이 더 많은 저택'이라는 별칭을 갖는다.
 
 하드윅 홀 지붕에 달린 베스의 이니셜 'ES(Elizabeth of Shrewsbury)'을 새긴 석재장식. 건축 장식에 가문의 문장을 주로 사용하던 당시에 건축주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이같은 장식은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 진혜윤
 
저택의 층고가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높아짐에 따라 꼭대기 층인 3층에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창문이 설치되었다. 그 화려함에 정점을 찍듯 지붕 선에는 베스의 이니셜 'ES(Elizabeth of Shrewsbury)'를 새긴 석재장식이 마치 왕관처럼 더해졌다. 건축주의 이름을 이용한 건축 장식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유럽 귀족은 가문의 문장(coat of arms)을 활용해 자신들의 권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이와 다르게 베스의 현시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이니셜 장식은 그가 누렸을 특권의 크기를 가늠케 한다.
하드윅 홀은 1층에 부엌과 하녀 방, 그리고 가족 예배당을, 2층에는 베스의 사실(私室)을, 3층에는 오늘날의 응접실 개념인 '롱 갤러리'를 두었다. 아직 사적 공간이 공적 공간과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기본적으로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신분과 친분에 따라 진입 여부를 여과함으로써 위계를 형성했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롱 갤러리는 오직 초대받은 손님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드윅 홀의 롱 갤러리를 그린 데이비스 콕스의 작품(1811). 궁전을 연상케하는 위용에 당시 베스와 하드윅홀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상상케 한다.
ⓒ David Cox the Elder
 
'롱 갤러리'는 하드윅 홀에서 가장 특징적 공간이다. 엘리자베스시대 컨트리하우스의 특징이기도 한 이 공간은 이름처럼 긴 통로와 같은 모양새지만 복도와 같은 이동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은 손님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고, 궂은 날씨를 피해 실내 산책을 하거나 반대로 맑은 날에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으로 일광욕을 하며 사교활동을 하는 다목적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보통 한쪽 벽에는 저택 소유주의 가족관계와 사회적 인맥을 드러내는 초상화와 같은 그림이 걸렸고, 반대쪽 벽에는 창문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 정원이 펼쳐졌다.

하드윅 홀의 롱 갤러리는 길이가 50m, 높이가 약 8m에 달했다. 이는 거의 두 개의 층을 하나로 합친 것과 같은 규모였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공간의 크기에 압도되고, 벽을 빼곡히 채운 그림들과 함께 광활한 정원을 감상하며 베스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베스에게 초대받은 손님들은 이곳에서 서로의 특권을 확인하며 결속을 다졌다. 즉, 롱 갤러리는 베스의 권력이 표현되고 행사되는 주 무대였던 것이다.

게다가 하드윅 홀의 실내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태피스트리로 가득 채워졌다. 특히 롱 갤러리는 온통 태피스트리로 꾸며졌다. 한땀 한땀 손바느질로 엮어 만드는 태피스트리는 제작 기간이 길지만, 이미 완성된 작품을 구매할 경우 즉각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활용되던 목조 장식 패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이 비싼 실내 장식 소재였다. 베스는 레이스, 금사, 은사 등 당시로서는 구하기 어려운 특수 부자재를 사용해 직접 태피스트리를 제작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드윅 홀의 롱 갤러리 실제 전경.
ⓒ Ann Longmore-Etheridge
  
여왕을 기다린 더비셔의 권력자

이렇게 꾸민 저택에서 베스가 가장 고대했을 손님은 누구보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었다. 영국에서 군주가 직접 방문한 컨트리하우스는 특별히 '프로디지 하우스(prodigy house)'라고 불린다. 경이로운 저택이라는 뜻이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치세기간 내내 거의 매년 지방으로 행차를 떠났다. 이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일종의 지방 순시였다. 여왕은 자신 소유의 궁전뿐만 아니라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컨트리하우스를 방문하면서 충성을 약속받는 연회를 즐겼다. 반대로 지방 귀족들에게 군주의 방문은 가문의 영광이자 막강한 정치력을 보장받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런데 하드윅 홀이 완공될 당시 여왕은 고령이었고, 이동이 어려웠다. 게다가 베스와 여왕의 관계가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베스의 마지막 남편이 여왕의 정적을 지지하기도 하였고, 베스가 자신의 손녀를 여왕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결국, 베스는 여왕의 초상화를 롱 갤러리에 거는 것으로 대신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초상화를 여왕과 매우 흡사한 모습으로 제작해 자신의 권능과 여왕과의 연대를 강조했다. 초상화 속에서 마치 한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쌍둥이처럼 닮은 두 인물의 모습은 베스가 좇은 권력의 지향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하드윅 홀에 걸려있는 니콜라스 힐리어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초상화. 앞서 나온 베스의 초상화 속 모습과 매우 흡사한 얼굴을 하고 있다.
ⓒ Nicholas_Hilliard
 
하드윅 홀은 남성 중심의 봉건제 사회에서 어떻게 상류층 여성이 자신의 권력을 시각적으로 증명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드문 사례다. 그런데 양차 세계대전을 지나며 베스의 노력은 헛수고가 될 뻔했다. 특히 1950년대 중반 영국의 수많은 컨트리하우스는 운영자금난에 허덕이다가 또는 현대적 건축 양식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철거를 선택했다. 하드윅 홀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 내셔널트러스트가 추진한 컨트리하우스 보존 캠페인 덕분에 1956년 국가문화유산으로 거듭나게 된다. 오늘날 영국의 르네상스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하드윅 홀의 모습은 영국 국민의 노력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베스의 하드윅 홀은 그녀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고 있다.    
 
 하드윅 홀 전경.
ⓒ DavidR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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