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그 후… 천상의 빛이 사람을 비추다

최기영 2023. 7. 1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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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미술관장 심상용 도슨트와 함께
영국 내셔널갤러리 특별전 속으로
라파엘로 산치오의 ‘성모자와 세례 요한’, 요아힘 베케라르의 4원소 연작 중 ‘물’, 렘브란트 반 레인의 ‘63세의 자화상’(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래픽=신민식


시대상(時代相). 어떤 시대의 되어가는 모든 형편, 또는 한 시대의 사회상을 일컫는 말이다. 시대상을 읽는다는 건 그 시대가 주목하거나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화적 흐름에 시선을 둔다는 것을 뜻한다. 예술계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시대상을 더듬어보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유적 발굴만큼이나 역사 탐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다.

최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유례없이 뜨거운 이유가 그 연장선에 있다. 르누아르 라파엘로 카라바조 렘브란트 마네 모네 고갱 고흐 등 일반인의 귀에도 익숙한 서양 미술사 거장들의 작품 52점이 상륙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영국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영국 내셔널갤러리와 함께 마련한 특별전의 제목은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이다.

캔버스의 주인공이 ‘종교와 신’에서 ‘사람과 일상’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장의 시선을 따라 조명하는 이번 전시회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국민일보는 심상용 서울대 미술관장을 일일 도슨트로 초청해 전시회에 동행했다.

지난 6일 찾은 전시실 입구엔 입장을 기다리는 인파로 기다란 대기열이 만들어졌다. 개막 한 달여 만에 관람객 10만명을 돌파할 예정이라는 관계자의 설명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심 관장이 설명을 덧댔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프랑스대혁명 산업혁명 등 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시대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한자리에서 볼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 회화는 국내에서 감상하기 쉽지 않죠. 초기 작품들은 프레스코화 등 벽에 그려진 것도 많고 오래된 작품일수록 먼 거리를 이동하기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니까요.”

이것만 알아도 감상이 풍성해진다

라파엘로 산치오의 ‘성모자와 세례 요한’.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예술 작품을 마주하는 관객에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는 숙명과도 같다. 그저 스쳐 지나가듯 작품을 대할 때와 작품 너머의 메시지를 되뇌며 바라볼 때의 만족감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림 속엔 화가의 의도가 들어 있다. 심 관장은 르네상스 시대 라파엘로의 작품 ‘성모자와 세례 요한’ 앞에서 중세 시대의 성모자상과 비교해 볼 것을 주문했다.

“중세 시대엔 세상과 사물을 바라볼 때 내가 아니라 신(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사실적이기보단 신비로워 보이게 그려집니다. 반면 르네상스 시대엔 성모와 아기 예수가 입체적인 현실 세계로 표현됩니다. 해부학으로부터 얻은 지식으로 이상적인 인체 비례를 묘사하고 빛과 그림자에 따라 원근을 표현하는 그림이 등장하죠. 성모상 그림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자연과 건물이 창밖 풍경으로 그려지는 것도 시대적 특성을 반영한 겁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의 ‘63세의 자화상’.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렘브란트가 죽기 몇 달 전 자신의 모습을 그린 ‘63세의 자화상’에선 블랙박스(검은 상자) 효과가 어떻게 작품에 녹아들었는지에 주목했다. 렘브란트는 1640년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최고의 인기 화가였다. 하지만 재산을 탕진하고 아내와 자녀를 병으로 잃은 중년 남성의 얼굴은 얼룩덜룩한 피부와 숱이 적어 희미한 눈썹, 미소 없이 다문 입술로 점철된다.

심 관장은 “검붉은 빛깔의 낡은 외투마저 흐릿하게 묘사한 채 남성의 표정에 주목하게 해주는 장치가 바로 어두운 상자의 왼쪽 상단에서 들어오는 채광”이라고 했다. 이어 “미술적으로는 명과 암이 드라마틱하게 교차하는 감각적인 기법이지만 신앙적으로는 젊은 날의 유명세를 뒤로하고 초라한 노년을 맞은 작가가 하나님 은총의 빛을 느끼며 평안을 누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개신교 신자였던 렘브란트는 종교화에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유화 수채화 동판화 데생 등을 포함해 2000여 점을 남겼으며 성경을 비롯해 신화 역사 풍경 풍속 위인 등 각 방면에서 광범위하게 소재를 구했다. ‘돌아온 탕자’ ‘갈릴리 바다의 폭풍’ ‘세 개의 십자가’ 등이 유명하다.

요아힘 베케라르의 4원소 연작 중 ‘물’.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요아힘 베케라르의 4원소 연작 중 ‘물’에는 마치 노량진수산시장을 옮겨 놓은 듯 생동감 넘치는 어시장과 상인, 서민들의 일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에선 숨은그림찾기처럼 작게 표현된 디테일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심 관장은 말했다.

“그림의 중앙 뒤편에 문틈으로 보이는 장면에 시선을 두면 바다 위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게 하고 많은 물고기를 잡게 했던(요 21:6) 성경 속 장면을 삽입해 둔 겁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로마나 이탈리아 쪽에서 그림을 봤다면 ‘저런 천박한 일상을 그림의 주제로 삼다니’라며 의아해 했을 겁니다. 서양 미술사에선 그 시대가 일반적으로 금기시하거나 불편하게 여기는 것들을 그리고 싶을 때 작가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종의 알리바이를 표현해두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선 가장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풍경을 그리면서도 성경적 메시지를 빼놓지 않았음을 해명하듯 묘사해두고 방어막을 마련한 것이죠.”

사람으로 향한 시선, 크리스천들에겐 시대적 고찰로

전시관 곳곳 작품 설명 옆에 보조로 달린 ‘서브 패널’엔 작품에 관한 뒷얘기, 작가가 남긴 언어의 기록을 담았다.

반 고흐가 그의 영혼의 동반자였던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 글귀도 그중 하나다.

‘나는 대성당보다 사람들의 눈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한단다. 사람의 눈에는 장엄한 대성당에는 없는 뭔가가 존재하거든. 진정 내 관심을 끄는 것, 거지나 거리의 여자일지라도, 인간의 영혼이란다.’(1885년 11월)

심상용 서울대 미술관장이 지난 6일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전시회 관람 후 국민일보 스튜디오에서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심 관장은 “고흐는 화가로 전업하기 전 목회자의 길을 걸으려 했었고 화가가 된 후에도 하늘의 소명을 따라 살았던 영성의 화가였다”며 “‘광기 어린 천재’의 이미지가 아니라 신앙의 관점으로 보면 사이프러스 나무, 올리브 동산, 밤하늘의 빛나는 별 등은 고흐의 작품에서 항상 기독교적 상징으로 사용된 소재였다”고 설명했다.

전시관 안으로 첫걸음을 내디디면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빨아들이고 있는 문장에 시선이 꽂힌다. ‘예술 작품은 신의 완벽함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오직 신만이 창조하시며 나머지는 그저 모방일 뿐이다.’(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이번 전시회의 제목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를 대하는 크리스천 관람객에게 전하는 심 관장의 당부가 미켈란젤로의 문장과 맞닿아 있었다.

“서구의 역사 가운데 교회는 줄고 미술관이 늘어나는 교차 곡선에 대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과거 사람들은 정신적 결핍을 예배로 채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신적 빈자리를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으로 대체한다는 겁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정신적 공백을 일상의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지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5~6세기에 걸쳐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무대 저편으로 사라지고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그 자리를 꿰찼는지도 작품 세계 골목골목에서 확인해본다면 보다 풍성한 감상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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