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서 온 카톡도 조심하라"…내일 시행 '中간첩색출법' 어떻길래 [중국 新방첩법 시대]
지난 21일 오후 찾았던 상하이 시내 지하철 한중루역 인근 캐피털 빌딩. 미국 뉴욕에서 창업해 뉴욕과 상하이 등에 본사를 둔 글로벌 컨설팅 회사 캡비전(Capvision, 중국명 카이성룽잉·凱盛融英)이 입주한 건물이다. 기자가 건물 19층의 캡비전 사무실을 방문하겠다고 알리자 로비 직원은 “다른 층과 달리 19층은 직원이 마중 나와야 한다"고 막아섰다. 이에 캡비전에 수차례 전화로 연락해도, 회사 홈페이지와 메일을 통해 문의해도 답은 전혀 없었다.
캡비전은 지난달 초 중국 국가안전부로부터 압수수색을 당했다. 수사 내용은 같은 달 8일 관영 중국중앙방송(CC-TV)의 대대적인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CC-TV는 “중국 대형 국영기업 고급 연구원 한 모 씨가 절취·정탐·불법 국가기밀 및 정보 제공죄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고 전했다. 한 씨는 캡비전이 시장조사를 위해 자문을 받았던 전문가 집단 중 한 명이다. CC-TV는 수사 내용을 보도하며 “최근 일련의 서방 국가가 중국 견제 및 압박 전략을 위해 중국의 군사·군수·경제·금융에 대한 정보 활동이 나날이 창궐하고 있다”고 지목했다.
보도 이틀 뒤 캡비전은 중국 방첩법 준수를 다짐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백기투항했다. 하지만 30만명의 전문가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홍콩증시 상장을 노렸던 캡비전은 여전히 공개 활동을 재개하지 못한 상태다. 현지 기업 사이에선 "캡비전은 사실상 ‘위기 경영’에 들어갔다"는 말이 돈다. 올해 중국 당국의 압수수색을 당한 외국계 기업은 이곳만이 아니다. 미국계 컨설팅 업체 딜로이트, 베인앤드컴퍼니, 민츠 등이 각종 혐의로 이미 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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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많이 쓰는 학자·학생도 적용 대상
앞서 지난 4월 26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통과한 신방첩법은 간첩 행위 정의와 법 적용 범위를 넓히고 국가안전기관의 조사 권한을 확대한 게 핵심이다.
개정 전 간첩 행위는 국가 기밀정보를 절취·정탐·매수·불법 제공하는 것에 한정됐지만, 앞으론 ‘국가 안전 이익에 관한 문건’이 포함된다. 기밀 자료가 아닌 공개 자료에 접근하는 것도 범죄 혐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국가 안전 이익’이 무엇인지 구체적이지 않아 당국이 자의적으로 간첩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지난 26일 주중 한국대사관은 "중국 국가안보 및 이익과 관련된 자료·지도·사진·통계자료 등을 인터넷에서 검색하거나 스마트폰·노트북 등에 저장하는 행위"는 법 위반 사항이 될 수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나아가 중국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간첩에 몰릴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외교부도 한국 언론이 북한을 취재하기 위해 중국 학계 인사를 면담하거나 접경 지역에서 취재하는 경우도 신방첩법에 저촉될 수 있다고 안내했다.
니컬러스 번스 주중 미국 대사는 지난 7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신방첩법이 시행되면 합작을 위한 실사 데이터 수집을 비롯해 거의 모든 비즈니스가 간첩 행위 정의에 해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번스 대사는 특히 대량의 데이터를 사용하는 학자·학생·과학자 등도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독일의 메르카토르 중국연구소도 신방첩법을 두고 “간첩 행위와 위반 시 처리 방법을 둘러싼 ‘회색지대’를 확장했다”며 “중국에 비우호적인 거의 모든 조직을 ‘간첩조직’으로 간주했다”고 평가했다.
중국 내 외국계 기업엔 비상등이 켜졌다. 일상적인 시장조사와 컨설팅도 간첩행위로 몰릴 수 있어서다. 미국계 로펌인 모건 루이스는 지난 5월 ‘중국의 신방첩법과 다국적 기업’ 보고서를 통해 중국 정보기관의 갑작스러운 ‘새벽 압수수색(Dawn Raids)’에 대비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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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민·기업, 시범 케이스 주의해야”
지금까지 중국의 방첩 수사는 주로 미국·일본계 기업에 집중됐다. 하지만 최근 경직된 한·중 관계를 고려하면 앞으로 수사의 칼날이 한국 기업이나 교민에게 향할 수 있다는 걱정이 이어진다. 신선영 한국무역협회 상하이지부장은 “기업 활동이 지나치게 위축될 필요까지는 없지만, 법의 적용대상이 광범위해진 만큼 불필요하고 민감한 언행을 삼가는 등 주재국 정책 방향에 맞춰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한국 기업, 한인 사회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상하이에서 만난 한 기업인은 “지리정보·사진·SNS 게시물·단체대화방 발언 등은 물론 단순 검색 기록까지 신방첩법이 정의한 간첩 행위에 포함될 여지가 있다”며 “한국 주요 기업도 현재 물밑에서 중국 신방첩법 시행에 따른 가상 시나리오별 대책 수립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기업들은 현지 직원을 상대로 중국 관련 정보를 카카오톡 등 메신저를 통해 옮기거나 열람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미 중국 측 인사들과의 접촉이 어려워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베이징의 한 기업인은 “신방첩법으로 중국 인사들이 한국 기업과 최소한의 소통을 피한다면 기업으로선 ‘깜깜이 경영’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신방첩법, 보복수단 악용 가능성”
신방첩법은 체류자 뿐 아니라 출장·여행 중인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신방첩법에 따르면 중국 안전기관 요원은 외국인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할 수 있고, 의심되는 상황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간첩 행위가 의심되면 휴대물품도 조사할 수 있어 ‘영장 없는 소지품 수사’가 가능해졌다는 말도 나온다. 방첩법을 위반해 국외로 추방당한 외국인은 10년간 중국 입국이 금지되는 등 제재도 강화됐다.
앞서 주베이징 한국 대사관은 이달 초 "법 규정의 모호성, 실제 집행 과정에서의 불투명성, 외교 및 교육활동 등에 미칠 영향에 대해 많은 우려가 있다"며 공개적으로 우려를 밝혔다. 하지만 중국이 방첩 활동 강화란 기조를 바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 간 충돌이 벌어졌을 경우 상대국 기업과 국민을 노리는 '인질 외교'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주재우 세계지역학회 회장(경희대 교수)은 “신방첩법은 집행 강도에 따라 한때 악명 높았던 ‘제로 코로나’에 버금가는 새로운 ‘쇄국 정책’으로 외국에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주 회장은 “경제 부진 등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중국 정부가 대내적으로는 자국민 통제를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샤프 파워’로 알려진 대외 보복의 법제화 수단으로 이 법을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에서 발생한 바그너 그룹 용병의 반란을 지켜본 중국이 신방첩법의 집행 수위를 높일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러시아 프리고진 사태로 신방첩법에 포함된 자국민 신고 의무 조항의 적용을 확대하면서 내부 통제를 강화할 수 있다”며 “필요에 따라 탄력적인 법 집행이 가능한만큼 '시범 케이스'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이징·상하이=신경진 특파원, 서유진 기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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