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이 배째랍니다"…최악의 역전세 오나, 이런 아파트 58%
“집주인이 보증금 상환의 책임을 져야지, ‘배째라’ 식으로 버티는 게 말이 됩니까.”
경기도 용인시에 사는 직장인 한모(38)씨는 지난달 전셋집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일을 떠올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달 중순 한씨는 2년여간 살던 84㎡(이하 전용면적) 아파트의 전세계약이 끝났지만, 집주인으로부터 6억3000만원의 보증금을 제때 받지 못했다. 집주인이 전셋값을 4억5000만원까지 낮춰 후속 세입자를 구했지만 1억8000만원 모자랐다. 한씨는 “돈을 받아야 이사 갈 집 잔금을 치른다”며 전세금 반환 내용증명을 보냈고,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집주인은 계약 만기가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신용대출(2000만원)과 회사 대출(1억원), 친척 도움(6000만원)을 받아 원금을 돌려줬다.
역(逆)전세난 공포가 대한민국을 덮쳤다. 수도권과 지방, 집주인과 세입자를 가리지 않고 몸살을 앓는다. 전셋값이 2년 전보다 떨어진 사례가 속출하면서 올 하반기 만기가 돌아오는 아파트 10채 중 6채가 역전세 위험에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역전세난은 전셋값이 떨어져 집주인이 신규 세입자에게 받는 전세금으로 기존 세입자의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20일 중앙일보가 전국 아파트의 2021년 하반기 전세 거래 34만352건 가운데 올 들어 지난 13일까지 동일단지·면적·층에서 거래가 발생한 13만1435건을 분석한 결과, 전체의 58.3%인 7만6666건의 보증금이 계약 당시보다 하락했다. 하반기 전셋값이 상반기와 같을 경우를 가정한 수치다. 이 기간 전셋값 하락분은 총 6조2928억원이고,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할 금액은 평균 8208만원이다. 서울로 범위를 좁히면 역전세 비율은 58%, 집주인 한 명당 전국 최고인 1억3177만원을 세입자에게 내줘야 한다. 17개 시·도 중 역전세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대구(90.9%)였고 울산(78.4%), 인천(77.5%), 세종(74.3%)이 뒤를 이었다.
빌라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부동산R114 조사 결과, 하반기 전세 계약 만기인 서울 연립·다세대 주택의 62%가 역전세 위험에 노출됐다. 2021년 하반기에 전세 계약된 빌라 4만6045건 중 올 상반기에 같은 단지·면적·층에서 거래된 2908건을 분석한 결과다.
올해 상반기 아파트 역전세 비율을 계산해 보니 전국 53.7%, 서울 53.3%였다. 전세 종료 시 집주인이 반환한 평균 금액은 각각 6477만원, 1억152만원이었다. 강남권 등 일부에선 집주인이 수억원씩 토해낸 ‘감액 계약’이 쏟아졌다. 최근 서울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자이’ 84㎡는 2년 전 보증금(20억원)보다 7억5000만원 낮은 12억5000만원에 계약을 갱신했다.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범어역우방유쉘’ 120㎡ 전세도 2년 전 8억3000만원에서 최근 3억8000만원 낮춘 4억5000만원에 계약됐다.
대구 역전세 비율 91%…집주인 ‘전세금용 대출’ 상반기 4.6조
세입자는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해 아우성이다. 지난 1~5월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집주인을 대신해 돌려준 보증금은 1조565억원, 떼인 보증금을 되찾기 위해 법원에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한 건수는 1만5009건에 달했다. 둘 다 역대 최대다. 집주인은 돌려줄 전세금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이다. 개포동의 전영준 새방공인 대표는 “5억, 6억원씩 메우느라 집주인의 등골이 휜다”고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은행 대출창구를 두드렸다. 지난 1~5월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과 주택금융공사에서 신규로 취급한 전세금 반환 대출은 4조6934억원으로 1년 전보다 34.2% 늘었다.
집주인과 세입자 간 갈등이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경기도 시흥시 아파트에 전세로 살던 A씨는 지난해 9월 계약이 끝난 뒤에도 보증금 3억8000만원을 돌려받지 못해 애먹었다. “집이 안 나가서 보증금을 내주기 어렵다”는 게 집주인의 답이었다. 참다못한 A씨는 올해 초 전세금 반환 소송을 냈다. 그제야 집주인은 본인 소유의 다른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받아 보증금을 돌려줬다. 하지만 감정이 상한 A씨는 전세금 반환 지연에 따른 이자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다.
역전세는 2020년 8월 ‘임대차 2법’ 시행 후유증과 고금리가 겹친 탓이다. 전셋집에 최장 4년간 눌러살게 하고(계약갱신청구권), 보증금 인상률을 2년에 5%로 묶자(전·월세 상한제) 집주인들은 4년치 인상분을 한꺼번에 받았다. 그 여파에 비정상적으로 뛰었던 전셋값은 금리 인상에 따른 수요 감소로 급락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020년 8월 94.5 수준이던 서울 아파트 전세가격지수는 2021년 12월 103.5로 정점을 찍었다. 이때 계약된 전세 물건 만기가 순차적으로 돌아온다. 올 하반기 최악의 역전세난이 나타날 것이란 경고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원갑 KB국민은행 수석전문위원은 “아파트 역전세난은 올 4분기(10~12월)에 정점을 찍고, 내년 상반기까지 여진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금융시스템 개선을 제안했다. KB경영연구소는 “집주인이 전세금 반환 용도로 대출을 받을 때에 한해 한시적으로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을 70%까지 허용하고, 대출 신청 금액이 1억5000만원 이하인 경우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적용도 배제해 세입자의 안정적인 퇴거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 박진백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갱신 계약을 체결하는 세입자에게 한시적으로 보증금에 대한 연말정산 세액공제 같은 세제 혜택을 주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고 했다.
다만 역전세난이 막연한 공포라는 의견도 있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최근 기준금리 동결로 매매가격과 전셋값 하락세가 주춤해졌다”며 “연말로 갈수록 역전세난이 진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반기 전셋값이 지금보다 5% 오른다고 가정하면 전국 아파트 역전세 비중은 48.6%로 완화할 전망이다. 김규정 한국투자증권 자산승계연구소장은 “역전세에 처한 집이 늘겠지만, 보증금 미반환 사고나 시장 변동성 확대 같은 부작용이 얼마나 커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황의영·김원 기자 apex@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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