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 충격에 빠트렸던, 패닉의 '문제작'

장준환 2023. 5. 28.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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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반, 다시 읽기] 패닉 2집 <밑> (1996)

최근 레트로 열풍에 발맞춰 1990년대 대중가요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습니다. 장르 및 시대를 아우르는 과거 명반을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오늘날 명반이 가지는 의의를 되짚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장준환 기자]

당대 라디오 전파를 지배한 공전의 히트곡 '달팽이'와 서정적인 어쿠스틱 발라드 '기다리다'에 위로받은 팬들은 그들의 후속작이 나왔다는 부푼 기대감에 황급히 이어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앨범을 재생한 순간, 오히려 사람들의 표정에는 사뭇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충격의 현장이었다.

꿈결처럼 감미로운 선율을 기대했던 예상과 달리 정작 펼쳐진 것은 지옥도에 준하는 악몽의 현장. 그 정체는 불길한 헐떡임과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먹는 소음, 음침하고도 의미심장한 읊조림이 불친절하게 뒤섞이는, 말 그대로 '패닉'의 청각화였기 때문이다.
 
 패닉 2집 <밑>의 음반 커버 이미지
ⓒ 케이앤씨뮤직
이적과 김진표로 구성된 2인조 그룹 패닉이 발표한 2집 <밑>은 오늘날까지도 대중음악사의 문제작으로 점쳐진다. 이우일 만화가를 초빙해 요청한 앨범 표지는 일반인에게 거부감이 들 만큼 기괴했을뿐더러, 대부분의 수록곡이 적나라한 가사와 표현을 이유로 끝내 방송금지곡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일순간 바뀐 분위기는 배신과 변절로 다가왔다. 많은 이들이 하루아침에 달라진 패닉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갔으며, 온라인 커뮤니티 PC통신에서는 이러한 행보에 비난의 의견을 내비치는 반발 세력이 등장할 정도였다.

단순 변심으로 벌인 기행은 아니었다. 이적이 과거 인터뷰에서 패닉 활동을 "이종교배이자, 이질적인 둘이 만나 생기는 긴장감"이라 회자하듯(2007년 6월 < IZM > '이적 인터뷰'), 다양한 장르 스펙트럼을 자랑하고 차별적인 시도를 결합한 야심 찬 출사표 < Panic >은 그 우수한 완성도에도 초기에는 크게 주목과 관심을 받지 못했다.

실질적인 분기점은 자신들조차 히트하리라 생각 못한 '달팽이'의 흥행이었다. 이후 소수의 입장을 담은 독특한 가사가 반향을 일으키며 차트 상단에 오른 '왼손잡이'와 몇몇 앨범 수록곡들이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중은 '달팽이'의 거대한 아우라에 이끌려 그들을 그저 신흥 '발라드 가수'로 기억할 뿐이었다.

무대에 올라 꽃다발을 들고 각종 매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음에도 기분이 심란했다. 심지어 김진표의 경우 데뷔 직전에 급하게 합류했기에 기여도라 할 부분도 현저히 적었다. 고심 끝에 이들은 사람들의 기대와 다르게 180도 태도를 바꿔 진짜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 즉 패닉의 진면목을 보여주겠다고 결심을 내리게 된다.

이것이 <밑>의 삐딱한 탄생 비화다. 그 세기와 방향은 조금 달랐어도, 작품의 등장 배경에는 < Panic >을 관통하는 정체성이기도 한 은은한 '광기'와 기성과 주류에 대한 '반발감'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내면의 불쾌감을 들추다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패닉 ‘달팽이’ 무대 영상
ⓒ MBC
 
문제작이라는 명명만큼이나 파격적인 트랙이 다분히 포진된다. 초두에 언급한 '냄새 (Intro)'와 혼합 박자 가운데 미끌거리는 베이스가 꿈틀대며 굽이치는 '혀'는 순수한 소리 구성만으로 내면의 불쾌감을 자아내고 들춰내는 트랙이다. 여러 악기와 보컬 효과음이 치밀하게 쌓이고 교합하며 천천히 옭아맨다. 동시에 "내 깊은 곳 핥아주기라도 할 듯 내 몸을 휘감다가 / 소리 없이 나를 때도 없이 나를 끝도 없이 쭉 빨아" 등, 기억에서 씻기지 않을 만큼 강렬함을 남기는 노랫말이 쉴 새 없이 파고 들어온다.

12분가량의 대곡이자 삐삐밴드의 보컬 이윤정이 협업한 '불면증'은 미쳐가는 과정을 가감 없이 담아낸 파격의 정점이다. 비교적 정돈된 파트 분배와 멜로디의 초반부를 지나 중반부에 이르러 급변하는 실험적인 양상이 그렇다. 모든 참여진이 자신의 역할을 망각한 채 남은 7분 동안 오로지 절규와 포효, 앳된 애드리브를 마구잡이로 교차한다. 격한 무질서가 자아내는 괴상한 질서, 문득 아방가르드의 교과서라 불리는 캡틴 비프하트(Captain Beefheart)의 < Trout Mask Replica >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반면 마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은 광대의 복수극이라는 섬뜩한 내용의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는 사운드적 연출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치밀한 서사만으로도 오싹함을 선사한다. 이적의 특출 난 스토리텔링 능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구간. '어릿광대 (insert)' 전주의 덤덤한 배경 설명, 뒤이어 우아한 클래식 화성과 날카로운 꽹과리가 등장하는 대비 구조가 기승전결에 몰입감을 더하며 한 편의 순도 높은 잔혹동화를 형성한다.

커리어에 있어 <밑>이 지닌 의의는 전작에서 미약할 수밖에 없던 김진표의 존재감이 처음으로 극대화된 시작점이라는 평가도 있다. 직접 작사, 작곡을 도맡은 데다 각각 교내 체벌 문화와 높은 교육열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펼친 우울한 랩 트랙, '벌레'와 'Ma Ma'는 실제로 그 자극적인 가사만큼이나 화제를 끌어 여러 화두에 올랐다.

"벌레, 당신이 우릴 잘 다루는 솜씨가 마치 / 세게 때려놓고 살짝 쪼개는 당신은 미친 걸레"(벌레),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다 해줬잖아 / 그래도 사랑하는 내 새끼? 닥쳐 내일 난 죽어버릴 거야"(Ma Ma) 지금 봐도 상당한 수위다. 실제로 이를 두고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빗발쳤지만, 결과적으로 그룹 내에서 김진표의 영역을 굳건히 구축하고, 훗날 솔로 데뷔작이자 한국 힙합의 기념비적인 랩 앨범 <열외>가 등장할 수 있던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UFO’ 무대 장면
ⓒ MBC
 
무엇보다 이적이 지닌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도, 더 나아가 그 토대를 마련하는 선율 감각이 곳곳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그로테스크한 피조물을 빚는 와중에도 번뜩임을 놓치지 않은 셈이다. 타이틀 곡 'UFO'가 대표적이다. 난해한 메시지 사이로 리드미컬한 드럼과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가슴 벅찬 멜로디가 등장한다. 어렵고 기분 나쁜 곡이라는 인상보다, 아름답고도 위험한 세계인 <기묘한 이야기>의 한복판으로 호출된 듯한 감상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다.

또 다른 대표곡 중 하나인 잔잔한 통기타 사운드의 '강(江)' 역시 정적인 연출 하나만으로 청자를 휘어잡고, 울적하고도 따뜻한 위안을 건넨다. 그 단출함에 정신없이 빠져든다. 위 두 곡이 오늘날 본격적으로 대중친화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3집 < Sea Within >과 4집 < Panic 04 >의 팝적 매력과도 거듭 비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회의 하수구 바닥에 고스란히 가라앉아, 모두가 외면하던 불쾌하고 끈적한 '밑'의 존재들을 속속 꺼내 들어 면전에 가져다 놓는 작업. 그럼에도 아름다움을 고수하는 것. 여러 관점에서 봤을 때 패닉의 <밑>은 그 완성도로나 시기적으로나 역사 이래 또다시 등장하기 힘들, 젊은 패기가 빚어낸 전무후무한 괴작과도 같았다.

우스꽝스럽고 비현실적인 공상 속에 현실을 냉철하게 관조하는 날카로움을 숨겨 놓았다.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엽기의 미학. 무려 2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뇌리 저편에는 그 충격적인 목소리 하나가 똬리를 튼 채 조용히 맴돌고 있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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