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자랑 한국 청년, 밭에서 뭐하는 거예요?" [소설가 신이현의 양조장에서 만난 사람]
신이현(작가)
▲ 빨간 장화 총각 혹은 호밀 청년 김기홍 |
ⓒ 신이현 |
어느 날 한 청년이 양조장에 왔다. "레돔 양조장에서 일을 하고 싶어요. 월급은 안 주셔도 됩니다. 와인을 만들고 포도나무를 심어 키우는 것을 배우고 싶어 왔습니다." 양 귀 옆을 말끔하게 밀고 꽁지머리를 묶은 호리호리하고 상냥한 인상의 도시 청년 김기홍. 와인을 좋아한다고 무작정 낯선 곳에 와서 일하겠다는 청년이라니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급여도 받지 않고 얼마나 일할 수 있을지, 그는 와인을 배우러 왔는데 나는 공짜 일꾼이라고 생각하고 막 부려먹다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끝날지도 모른다는 이런저런 걱정이 따라왔다.
▲ 빨간 장화를 신고 포도밭 일을 하는 기홍. 와인을 만드는 일은 생각하는 것만큼 우아하지 않다. |
ⓒ 신이현 |
"그래요. 일단 한번 시작해 보도록 해요. 장화가 이것밖에 없는데 괜찮을까요?" 버릴까 하다가 놔 둔 낡은 빨간 장화였다. 적당히 잘 맞았다. 장화는 오랫동안 그를 기다려 이제야 주인을 만난 것 같았다. 우리가 함께 한 첫 번째 일은 비탈진 땅에 호밀을 뿌리는 것이었다. "포도밭에 왜 호밀을 뿌리죠?" 그가 묻고 나의 남편 도미니크가 대답했다. "밭을 일굴 때 가장 먼저 호밀을 뿌려주면 좋아. 겨울 동안 파랗게 난 싹이 땅을 덮어줘서 추위와 비바람을 막아주지. 그리고 봄이 되면 뿌리가 길게 내려서 거기에 온갖 미생물이 붙어살기 때문에 땅이 건강해져. 밭에 호밀을 뿌리면 좋은 일이 정말 많이 생겨."
▲ 호밀밭과 물아일체의 경지를 보여주는 두 남자 |
ⓒ 신이현 |
"빨간 장화 총각 어떻게 지내? 잘 지내? 요즘도 와?" 사람들은 가끔 그의 안부를 묻는다. 1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일하러 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사실 나도 신기하다. 와인을 배우러 왔는데 늘 밭으로 데리고 갔다. 양조장에서 와인을 담는 일은 30퍼센트이고 그 나머지 70퍼센트는 농사짓는 일이다. 양조장 안에서 하는 일도 육체노동이긴 마찬가지다. 무거운 과일궤짝을 들어 올리고 엄동설한에 사과를 씻고 폭우에 포도를 따고 발효탱크 안에 들어가서 탱크를 닦아야 한다. 익어가는 와인을 테이스팅 하고 음미하는 종류의 시간은 참으로 짧다.
▲ 친구와 함께 사과를 씻고 있는 기홍. |
ⓒ 신이현 |
세 번째 호밀을 뿌렸을 때 빨간 장화 총각이 와인을 들고 왔다. 양조장에서 일한 지 2년이 지났을 때였다. "올 여름 청수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에요. 제가 만들었어요." 첫출발의 기대와 두려움이 담긴 듯한 작은 새가 그려진 라벨이 붙어있다. "오아, 인생 첫 번째 와인이네!" 또르르 와인이 잔에 떨어지는 소리에 모두들 집중한다. 잔을 들고 색을 보고 향을 맡은 뒤 한 모금 마셨다. 한 소년의 꿈이 작은 꽃으로 피어난 첫 번째 와인 맛을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았다. 미소년의 풋풋한 웃음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이 한 병은 10년 뒤에나 열어보자." 나머지 한 병은 양조장 서늘한 어둠 속에 보관하기로 했다. "유학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가 처음 왔을 때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물었다. "이제 와인을 만들 수 있게 되었는걸요. 안 가도 돼요." "그래도 유럽의 와인 문화를 직접 경험해보면 도움이 될 텐데." 도미니크가 아쉬워한다.
"이제 나만의 양조장을 만들 수 있겠다!" 첫 번째 와인을 만든 뒤 그는 작은 와인 제조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 첫 번째 양조장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함께 동업했던 동료와 마음이 맞지 않아 깨졌다. 다니던 와인 수입사도 그만 두고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기홍아. 그렇게 벙글벙글 웃고 다니면 사람들이 가마떼기로 본다. 제조장 그만 두면서 손해 본 건 없지? 네 노동의 가치만큼은 다 분배받은 거 맞지? 그렇게 사람 좋게 웃으면 안 된다!" 그 웃음은 가끔 사람 애를 태우지만 또 그 웃음 때문에 그가 좋다.
한 알의 과일이 발효되어서 인간에게 행복한 시간을 주는 술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설레는 일이다. 자연을 따라 가면서 만드는 내추럴와인은 그 맛의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그러나 와인을 제조해서 먹고 살려고 할 때는 여러 악조건들이 기다리고 있다. "저 와인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요." 오늘 기홍이 와서 이런 말을 한다면 내 대답은 이것이다. "그럼 그냥 취미로 만들어서 마시면 가장 좋아요." 양조장을 하겠다는 것은 법적인 것과 과일 농사, 장비들, 서류들 등등 첩첩산중 산 너머 산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멋있어 보이지만 일이 고되고 언제 돈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첫 번째 제조장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 애가 터졌다.
▲ 기홍과 그의 아내. |
ⓒ 신이현 |
네 번째 호밀을 뿌릴 때쯤 한 아가씨와 함께 왔다. 남매처럼 닮았는데 성격은 다르다. 아가씨는 활달하고 강단 있다. 둘은 결혼을 했고, 가끔 둘이서 함께 온다. 함께 사과 씻고 함께 포도밭을 걷고 함께 포도밭 유인줄을 묶는다. 포도밭에 뻐꾸기 소리 대신 명랑한 청춘 남녀의 호호깔깔 웃음이 울려 퍼진다. 네 번의 호밀이 올라오고 쓰러져 퇴비가 되는 사이 산비탈 돌투성이였던 땅도 지렁이가 헤엄치는 촉촉한 포도밭이 되었다.
▲ 호밀밭에 선 한국 총각과 프랑스 남자 |
ⓒ 신이현 |
▲ 기홍과 함께 한 도미니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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