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뻗어가는 K-농업] 식물 병해충 저항성 품종 개발·보급 통해 ‘우리 쌀’의 브랜드 가치 업그레이드

2023. 5. 12.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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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 바꾼 식물 병해충 예방에 앞장서는 농촌진흥청

수요자 참여형 품종 개발 연구 통해

이천시 외래 벼, 국산화로 완전 대체

올해 6개 지자체에 새 품종 보급
국산 벼 품종 독립의 교두보 마련

아이랜드 대기근을 주제로 더블린 리피강 근처에 세워진 조각상.

영화 ‘튤립 피버’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열풍을 다룬 작품이다. ‘영원한 황제’라는 뜻의 ‘선페이 아우구스투스’처럼 흰색 바탕의 진홍색 줄무늬를 가진 희귀한 튤립 알뿌리의 가격은 3000 길드. 당시 노동자의 평균 연봉이 200~400 길드 수준이었으니, 그 광풍을 짐작할 수 있다. 1736년 거품 경제는 절정에 다다랐고, 이는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네덜란드 경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됐다. 그런데 1892년 러시아 과학자 이바노프스키가 ‘바이러스가 식물에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혀낸 뒤 희귀한 튤립 색의 원인이 바이러스였다는 게 알려졌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작은 생명체 중 하나인 바이러스가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전해준다. 이처럼 세계 인류의 역사를 바꾼 식물 병해충은 상당히 많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산물인 ‘벼’ 역시 마찬가지. 과거 다양한 벼 병해충의 아픔을 겪은 우리나라는 농촌진흥청을 중심으로 벼 병해충 저항성 품종을 개발·보급하며 병해충 피해 예방에 앞장서고 있다.


로마에서 벌어진 ‘죽음의 댄스 사건’


1845년 아일랜드에서는 10월경부터 저장해 놓은 감자가 썩기 시작하더니 이듬해 여름에는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서풍이 불어오면서 아일랜드 전역에서 감자가 썩어 나갔다. 무서운 속도로 퍼진 괴질은 1846년 8월 초 전국의 감자밭을 황폐하게 했다. 그해 아일랜드의 감자 수확량은 평년의 4분의 1 수준으로, 심한 곳은 90% 이상 수확량이 감소했다. 오늘날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알려진 역사상 최악의 참극이었다. 대기근은 아일랜드의 산업 기반 자체를 무너뜨렸다. 800년에 걸친 영국의 가혹한 식민 통치로 빈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훗날 ‘감자역병’으로 알려진 괴질은 아일랜드 국민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1518년 로마에서 발생한 일명 ‘죽음의 댄스 사건’도 있다. 마을 전체 1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다 죽음에 이른 미스테리한 사건이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전역과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세일럼 지방에서까지 벌어졌으며, 이 일로 무고한 많은 여성이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 증상은 귀리나 호밀에 생긴 곰팡이 ‘맥각’을 먹고 신경독성 물질인 LSD에 중독된 결과로 알려졌다. 또한 시대를 넘어 1970년 가뭄과 식량난으로 에티오피아의 서민들이 맥각에 감염된 호밀을 먹고 피해를 본 사례도 있다.


영국의 차 문화를 바꾼 커피 녹병


식물의 병해충이 한 나라의 문화를 바꾼 사례도 있다. 1874년 실론(현 스리랑카) 지방에 발생한 커피 녹병으로 실론의 커피 농장은 망했다. 사실 당시 영국의 상류층 남성들은 커피를 즐겼다. 차는 여성을 중심으로 서민들이 즐기던 하류 문화였지만 커피 녹병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커피를 모두 베어낸 실론에는 차밭이 조성됐고, 그 결과 가격이 비싸진 커피 대신 홍차가 영국 차 문화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진딧물의 일종인 ‘필록세라’는 유럽의 술 문화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60년대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포도나무로 인해 유럽의 포도밭은 쑥대밭이 됐다. 미국에서 자라는 포도나무는 필록세라에 적응해서 저항성이 있었지만, 유럽의 포도나무는 그러지 못해 20년이 넘게 포도 재배에 실패했다. 결국 유럽의 와인이 바닥을 드러냈고, 와인업자들이 남미나 호주, 남아프리카 등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처럼 와인산업이 다양화됐다. 더불어 유럽에서 맥주나 위스키가 도약하게 된 시발점이 됐다.


한 나라·지역경제 구조 바꾸는 식물 병해충


미국 앨라배마 주 엔터프라이 즈에 목화 해충 바구미를 기리는 여인상
식물의 병해충이 한 나라와 지역 경제의 구조를 바꾸기도 한다. 미국 앨라배마 주의 소도시 엔터프라이즈에는 해충인 ‘목화바구미’를 양손에 들고 감사를 표하는 여인상이 있다.

1915년 앨라배마에 유입된 목화바구미 때문에 주요 생계수단인 목화를 생산하지 못하자, 엔터프라이즈 주민들은 대체 작물로 땅콩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후 엔터프라이즈는 세계 최대의 땅콩 생산지가 됐으며, 미국에서 목화 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게 됐다.

1904년 뉴욕에서 처음 발생한 밤나무 동고병은 1911년부터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궤멸 수준의 피해를 줬다. 당시 밤나무는 미국 목재산업의 4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주요 수종이었으나, 밤나무의 궤멸로 관련 산업이 타격을 입으며 소나무 등이 대체 수종으로 부상하게 됐다.

1950년대 파나마에서 발생한 바나나 파나마병은 당시 재배 품종이던 ‘그로 미셸’에 치명적인 피해를 줬다. 파나마병 때문에 그로 미셸 품종은 자취를 감췄고, 대체 품종으로 오늘날 우리가 먹는 ‘캐번디시’ 품종이 주류로 자리잡았다. 파나마병은 새로운 변이종을 만들어 내며 최근 캐번디시 품종을 다시 위협하고 있다.


녹색혁명 기적 무너뜨린 도열병의 교훈


1970년대 초반 개발된 ‘통일벼’는 1977년 우리나라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주곡인 쌀 4000만 석을 수확하면서 녹색혁명을 달성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 전국에 도열병이 발생했고, 식량 자급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흉작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앞서 살펴본 인류의 역사를 바꾼 식물 병해충의 사례에서 공통점 하나를 찾을 수 있다. 바로 농작업을 편리하게 하면서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 넓은 면적에 단일 품종을 재배했다는 점이다. 감자 품종 ‘럼퍼’, 바나나 품종 ‘그로 미셸’, 벼 품종 ‘통일’이 대표적이다. 넓은 면적에 단일 품종을 재배하면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져 병해충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1978년 우리나라가 겪은 도열병의 아픔은 벼 육종의 전략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병원균의 단일 레이스에 저항성을 가지는 방향에서, 여러 레이스에 전체적으로 고른 저항성을 가지게 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2018년부터 외래 벼 재배면적 꾸준히 줄어


농진청이 개발한 벼 품종 ‘해들’. [사진 WIKIPEDIA]
이 같은 전략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벼 육종은 고품질과 기능성, 병해충 저항성 등 다양한 전략과 방향성을 가지고 진행된다. 통일벼를 육종하면서 구축한 1209번의 도전과 경험, 그리고 유전자원들은 소중한 자산이 돼 꽃을 피우고 있다.

외래 벼 품종을 우수한 우리 품종으로 대체하기 위한 ‘수요자 참여형 품종 개발 연구(SPP)’가 최근 경기도 이천시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2024년까지 외래 벼 재배를 국내 전체 벼 재배면적의 약 1.5% 수준인 1만 ha 이하로 줄인다는 목표로 지역, 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과 협력해 우수한 우리 벼 품종을 개발하고 보급·확대하는 데 힘쓰고 있다. 그 결과 외래 벼 재배면적은 2018년부터 매년 꾸준히 줄고 있다.

2022년에는 경기도 이천에서 생산되는 ‘임금님표 이천쌀’의 원료곡으로 쓰이는 ‘고시히카리’와 ‘추청(아끼바레)’을 각각 ‘해들’과 ‘알찬미’로 완전히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 농촌진흥청이 이천시와 공동으로 개발한 ‘해들’과 ‘알찬미’는 재배가 수월하고 밥맛과 품질이 우수한 최고품질 벼 품종이다.

‘해들’은 빨리 수확할 수 있는 조생종 벼로 쓰러짐에 강하고 쌀 겉모양(외관)이 우수하며, 밥맛은 최고 수준인 ‘극상’이다. 도열병과 흰잎마름병에 강하며 이삭싹나기(수발아) 저항성이 있다. 2021년에는 농식품부가 주관하는 ‘대한민국우수품종’으로 선정됐다.

‘알찬미’는 도열병, 흰잎마름병, 줄무늬잎마름병에 강한 복합내병성 품종으로 밥맛과 품질도 우수하다. 중생종으로 재배 안정성도 좋아 강한 태풍에도 쓰러짐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수요자 참여형 품종 개발 연구’는 순차적으로 지역과 품종 수를 늘려가면서 국산 벼 품종 독립의 교두보를 마련해 갈 예정이다. 2023년에는 6개 지자체의 7개 품종을 대상으로 품종 보급을 추진할 예정인데 아산 지역의 해맑은 품종은 2022년 352ha에서 2023년 1000ha로 재배면적을 늘리고 여주에서는 아끼바레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품종을 선발할 계획이다.

지난 2017년 12월 세네갈에서 등록된 ‘이스리(ISRIZ)-6’과 ‘이스리-7’ 품종은 수량성이 우수하고 밥맛이 좋아 현재 빠른 속도로 현지 농업인들에게 보급되고 있다. 이스리는 농촌진흥청 KAFACI와 함께 아프리카벼연구소(Africa Rice) 등 2개 기관이 2016년부터 2025년까지 10년간 협력해 추진하는 사업의 성과다.

이 두 품종은 우리나라 통일벼 계통인 ‘밀양23호’와 ‘태백’을 세네갈로 가져가 현지 적응시험을 거쳐 등록된 것이다. 수량성이 1ha당 7.2∼7.5t으로, 세네갈 대표 품종인 ‘사헬(Sahel)’보다 2배 정도 많아 아프리카에 제2의 녹색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022년에는 말리, 탄자니아 등 서아프리카 5개국을 중심으로 통일형 다수성 벼 12개 품종의 보급 기반을 확보했다.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서효원 원장은 “우리나라의 병해충 저항성 등 벼 육종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다”며 “지역별로 수요자가 원하는 품종개발로 우리 쌀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세계 식량난에 이바지할 수 있는 품종개발 지원으로 국제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박지원 중앙일보M&P 기자 park.jiwon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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