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방 경연장’이 된 정당 현수막, 게재내용 제한해야 [이기선 칼럼]

데스크 2023. 5. 1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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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 게시되는 현수막 거리 미관 해쳐
상대 정당 측 공격하거나 헐뜯는 도구로 활용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입장’ 용어 모호하고 광범위
행정안전부가 정당 현수막 난립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정당 현수막 설치, 관리 가이드라인'을 시행하는 지난 8일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앞에 정당 현수막이 걸려 있다. ⓒ 뉴시스

지난 4일 행정안전부는 ‘정당 현수막 설치·관리 가이드 라인’을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8일부터 어린이·노인·장애인 보호구역에는 정당 현수막을 설치할 수 없다. 또한 가로등이나 가로수에 걸리는 현수막도 2개 이하로 제한되며, 보행자 통행과 운전자 시야를 방해하지 않도록 땅에서 2m 이상 높이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행정안전부가 옥외광고물법 규정에 저촉됨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침을 서둘러 만든 걸 보면 현수막과 관련된 문제들이 얼마나 심각한 지 짐작할 수 있다.


정당은 ‘자당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입장을 인쇄물·시설물·광고 등을 이용하여’ 홍보할 수 있다(정당법 제37조 2항). 다만 시설물을 설치할 때는 옥외광고물법에 따라 자치단체장의 허가를 받은 뒤 지정된 게시대에 설치해야 하는 등 일정한 제한이 있었다.


그런데 지난 12월에 옥외광고물법이 개정되면서 정당 현수막은 사전 신고·허가나 장소·수량에 제한 없이 15일간 게시할 수 있게 되었다. ‘정당활동의 자유’와 ‘정책홍보의 적시성’을 보장하자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이 법이 시행된 후 무차별적으로 게시되는 현수막은 거리 미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 상대 정당 측을 공격하거나 헐뜯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어느 한 정당에서 비방성 현수막을 내걸면 상대 정당에서는 그보다 더 원색적인 표현을 넣은 현수막을 붙이는 등 경쟁적으로 수위를 올렸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겨냥한 ‘범죄조직의 우두머리’란 표현에 맞서 윤 대통령을 ‘매국노’, ‘이완용’이란 표현으로 비판하는 식이다. 정책홍보는 커녕 국민을 갈라치고, 정치 혐오증만 부추기고 있다.


또한 보행자와 운전자의 시야를 가려 곳곳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법 시행 후 3개월간 현수막과 관련하여 제기된 민원이 무려 1만 4000여 건이었다고 한다. 이는 법 시행 전 3개월간 접수된 민원(6415건)의 두 배가 넘는 수준이다.


위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을 검토할 때 국회 전문위원과 정부 측에서 ‘정당 홍보물의 난립’, ‘주민 불편’ 등에 대한 우려 의견을 제기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개정안은 국민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자기들(정당)만의 편익을 내세워 압도적 다수로 의결되었다.


그런데 법이 시행되자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부작용이 심각하고 여론이 악화하자 정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앞서와 같은 지침을 만들었고, 정치권도 현수막 게시 위치나 개수를 다시 제한하는 쪽으로 법을 개정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이제라도 입법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참에 현수막에 게재할 수 있는 내용도 제한하기를 제안한다. 현수막에 자극적인 문구가 들어가도 어쩌지 못하는 이유는 정당법에서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입장’을 홍보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입장’이란 용어가 모호하고 광범위해서 사실상 어떤 내용이라도 게재할 수 있다. 따라서 현수막에는 자당의 정책이나 당원모집, 활동 상황 등 자당에 관한 홍보 사항만 게재하도록 제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법적 제한 없이 정당 스스로 자정한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 정당에게 그런 선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윤 대통령의 일본 방문 후에 민주당 중앙당에서는 ‘이완용의 부활’, ‘친일본색 매국정권’, ‘국민능멸 굴욕외교’ 등의 문구가 들어간 현수막 시안을 소속 의원 지역구에 시달했다고 한다. 자정을 주도해야 할 중앙당이 이처럼 앞장서서 부추기는데, 무슨 자정을 기대하겠는가. 그러니 법으로라도 제한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정당의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입장’은 구태여 현수막이 아니더라도 대변인 논평, 기자회견, 언론대담, 정당 기관지, 의정활동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얼마든지 알릴 수 있으니 ‘정당 활동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또한 모든 정당에 같은 잣대로 적용될 것이니 정당에 따라 유리하거나 불리할 것도 없다.


정당은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고,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다. 그런 역할을 하라고 국민의 혈세로 연간 약 480억원의 정당 보조금까지 준다.


‘정당활동의 자유’를 주장하기 전에 국민들이 정치권을 불신하는 데 대한 반성과 책임 있는 역할부터 해주기를 바란다.

글/ 이기선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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