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건빵은 살고 전도지는 죽었다[개척자비긴즈]

최기영,이영은 2023. 5. 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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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척자 Y’다. 험난한 교회 개척 여정 가운데 늘 기도하며 하나님께 ‘왜(Why)’를 묻고 응답을 구하고 있다. 개척은 그 자체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자 지향점이다. 출발선(A)에 선 개척자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Z)를 바라보며 묵묵히 걸음을 내디딜 때 당도할 수 있는 마지막 계단이 알파벳 ‘Y’이기도 하다. 그 여정의 열세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결혼 예비학교에 다니는 청년이 또래 친구들의 결혼식을 찾는 마음이 이러할까? 주변에 알고 지내던 목사님들이 하나둘 교회 개척 소식을 전해올 때마다 마음에 오묘한 떨림이 찾아왔다.

서울 경기 춘천 원주 강릉 등 개척 지역도 다양하다. 개척자 동지로서 자연스레 어떤 사역 환경에서, 어떤 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지에 시선이 간다. 대부분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위해 개척을 하고 있었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의 기도와 고민, 연구가 바탕되었을 그 여정을 응원하게 된다. 하지만 간절한 응원이 빠른 시간 안에 풍성한 열매로 이어지진 않는다. 희망을 가득 품고 개척을 준비하고, 사명을 갖고 개척을 했으나 사람들은 쉽게 개척자의 공동체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어느 개척교회는 젊은 감각으로 인테리어를 하고 지리적 접근성도 괜찮았다. 그런데 설립예배를 드릴 때 성도들로 가득했던 성전에서 지금은 개척자 가족만 예배를 드린다. 종종 새로운 성도가 한두 명씩 오고 가지만 정착하지 못한다. 월세를 내야 하는 날은 어찌 그리도 눈 깜빡하는 사이 다가오는지. 대출 이자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암살자처럼 가슴을 조여온다.

한 명의 성도를 잘 양육해서 성장시켰는데 다른 교회로 떠나는 일도 허다하다. 한 개척 목사님의 가슴 치는 고백이 마음을 울린다. “저희 공동체에서 신앙생활하며 어느 정도 영적인 교제가 깊어져 가던 한 성도가 있었어요. 하나님이 예비해 둔 연단이라 생각하며 이전에 출석하던 교회에서 생긴 상처를 치유해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조금씩 상처를 치유해가더니 언젠가부턴 두 교회를 섬기게 됐어요. 항상 마음이 불편했는데 결국 회복될 때쯤 다니던 교회로 마음을 정하곤 연락이 끊기더군요.”

현실이다. 불편한 현실과 마주한 뒤 고분분투하며 애써 웃음 짓던 동료 개척자의 눈빛에 외로움이 보인다. 개척의 무게 같다.

어느 정도 정착기를 맞기도 전에 이런저런 이유로 성전 이전 예배를 드린 교회는 그나마 울타리에 있던 성도를 떠나보내기도 한다. 전도를 하려고 거리에 나가도 열 중 아홉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외면한다. 외면이 누적되는 동안 점점 눈앞은 어두워진다. 동시에 마음은 어둠으로 침전한다. 앞길은 쉬이 보이지 않고, 어둑어둑한 새벽이면 울면서 기도한다.

코로나 이후 가나안 성도들은 더 많아졌다. ‘플로팅 성도’들의 등장과 노모포비아(휴대전화 금단현상)까지 더해져 예배 환경은 정해진 시간과 장소가 아닌 내가 선택한 시간과 장소로 바뀌게 되었다. 편한 것을 찾는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교회의 편향적인 외침으로 성도들은 교회에 등을 돌렸다. 그럴수록 교회는 더 거칠어졌다. 그 모습에 성도들은 또 교회를 떠났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는데 교회는 생각보다 잠잠했다. 이유가 궁금했다. 들여다보니 몇 가지가 엿보였다. 그중 하나는 헌금이 줄지 않았다는 거였다. 성도들이 교회를 떠날 만했다.

‘결국 교회가 아끼고 섬기며 필요한 성도는 헌금하는 성도였던 걸까.’ 그 속내를 알게 된 사람들은 더이상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다. 해답이 필요했고 무게는 더욱 무거워졌다.

목회자들도 기존의 방법으로는 탈출구가 없음을 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으나 찾을 수 없어 기존의 방법을 찾아간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돼’라는 생각에 여전히 잠식돼 있다. 안될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회 밖으로 전도하러 나간다. 여전히 관심을 얻는 건 어렵기만 하다. 또 다른 한 개척자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버려지는 전단지를 볼 때 얼마나 마음이 찢기는 지 아시죠? 상처가 깊게 남아요. 한 번은 거리에서 교회 이름과 장소, 예배 시간이 인쇄된 물티슈를 전했어요. 몇 시간 뒤 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전도용 물티슈가 휴지통에 버려져 있더군요.”

건빵과 함께 나눠주는 주보는 길바닥에 나뒹군다. 주보를 유심히 보는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다. 간혹 다가와 말을 건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은 또다른 찔림이다. “건빵 하나만 더 주시면 안돼요?” 아무도 연락이 없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 교회보다 건빵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개척의 무게는 건빵 값을 마련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한 번은 동기가 원주에 개척한 뒤 성전 이전 감사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찾아갔다. 두 명의 사역자 가정이 만나 함께 예배를 드리다가 개척을 한 케이스였다. 한 가정은 영상과 사진 촬영을 병행하는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한 가정은 바디 랩을 운영하는 헬스 트레이너다.

처음 두 가정의 조합과 개척 얘기를 들었을 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사역을 넓혀갔고 결국 방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교회로 올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세상으로 가지고 나갔다. 달란트를 활용해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오게 하는 기존 교회의 방법도 생각해 봤을 텐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승부를 보려는 대부분의 개척자들과는 다른 결을 선택했고 반응은 오기 시작했다. 가나안 성도가 교회로, 스튜디오 직원이 교회로, 운동하시는 분들이 교회로, 손님이 교회로 발걸음을 옮긴다.

노모포비아 시대를 사는 MZ세대들을 위해 요즘 유행하는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을 변형해 ‘오말완’으로 말씀을 읽는다. 교회 이름을 로고로 만들어 굿즈를 제작하고 유쾌하고 재미난 멘트를 날린다.

“좋아하는 색으로 만드는 키링! 각자의 개성과 시선은 존중하되, 절대적인 것은 타협하지 않는 자유함 속에 절제된 교회.” 참신하고 멋지다. 헌금 봉투에도 그들만의 멋스러움이 있었다. 힙한 카페에 가면 있을 법한 잘 디자인된 스티커도 교회 곳곳에 마련돼 있었다. 성도들은 자신의 노트북, 메모장에 교회에서 만든 스티커를 붙였다. 함께 가족됨을 보여주는 스튜디오 특유의 감성 터지는 공동체 사진이 교회 전면에 붙어 있다. 수요예배는 책 한 권을 가지고 함께 보며 주님 앞에 바로 서기를 실천하고 있다.

동료 개척자들의 교회를 보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동시에 개척은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포기는 핑곗거리를 찾게 만들고 도전은 방법을 찾는다는 말이 있다. 개척에서의 포기는 기존 패러다임을 좇는 것이다. 도전하며 찾게 되는 방법으로 오늘도 세워 갈 교회를 꿈꿔 본다.(Y will be back!)




최기영 기자 일러스트=이영은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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