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저게 인생이지' 씁쓸한 웃음 짓게 한 장면

안정인 2023. 5. 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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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누수공사>

[안정인 기자]

 
▲ 누수공사 연극 <누수공사> 포스터.
ⓒ 안정인
 
포스터 속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 하늘색 배경 위로 보이는 검은색 줄들은 비 혹은 흘러내리는 물처럼 보인다. 가부좌를 튼 포즈는 도를 닦는 것 같기도 하고 부처의 형상을 흉내 내는 것도 같다. 한글 제목 아래 조그맣게 적힌 한자는 불안한 듯 녹는 듯 흔들거린다. 이 연극 <누수공사>를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무대는 좌식 책상과 꽤 많은 옷이 걸린 행어, 1인용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원룸 형식의 집이다. 무대 왼쪽으로 화장실로 연결되는 출입구가 있고 현관문은 주인공처럼 당당하게 관객석을 향한다. 극장에 들어서면 무대 위에서 열일 중인 로봇 청소기가 보인다. 이 방의 주인이 청결하고 소중하게 자신의 거처를 관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암전과 명전이 반복되는 동안 무대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작업을 하다 괴로운 듯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남자는 아마 밤새 컴퓨터 앞에 붙들린 모양새다. 의자에 앉아 짧은 잠에 빠지자마자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시작된다.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에는 경련하듯 신경을 긁어 고요한 휴식을 방해하겠다는 결기마저 담긴 것 같다. 원고를 독촉하는 전화는 그렇게 남자의 달콤한 휴식을 방해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작가에게 원고 독촉이 당연한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흔한 일일 것이다. 남자 역시 익숙한 듯 전화기를 든 채 고개를 숙인다. 금방 끝낼 수 있다며 상대를 안심시키고 겨우 전화를 끊는다. 다시 일에 집중하려는 순간 곧바로 파가니니가 연주를 재개한다. 남자는 무시한다. 파가니니는 물러서지 않는다. 맹렬한 기세로 핸드폰 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진다.

집 주인은 자신의 "잘 지은 집"에 물이 샌다고 말한다. 남자의 눈에 누수는커녕 물 한 방울 보이지 않지만 알게 뭐람. 남자는 공사를 연기시키려고 애쓴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마감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불행이 어디 눈에 보이게 예고하고 나타나던가. 이렇게 마감 때문에 한시가 급한 정환에게 집 주인이, 누수 수리 기술자와 그의 조수가, 아랫집 남자와 옛 애인이 들이 닥친다. 인생의 불행은 한꺼번에 오는 법이니까.

이 연극의 소재는 '누수'즉 물이다. 물이 새는 아랫집에 산다는 사람은 우비를 입은 채 공사 장소인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어찌나 많은 물이 새는지 그릇에 물을 받는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만 많은 것은 아니다. 물과 함께 말이 쏟아진다. 말이 범람한다. 집중해야 겨우 마감을 지킬 수 있는 남자 정환을 말의 풍랑 속에 몰아넣는다.

"우리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집주인은 당당하게 선포한다. 자신의 집을 점령당한 정환이 들으란 듯이. 수리 기사도 같은 말을 내뱉는다. 아랫집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일 뿐 타인을 위한, 혹은 모두를 위한 최선일 리 없다. 사회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이보다 적확하게 표현하기는 힘들다. 선의가 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말만 문제일까?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면서요…….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 거예요?"

집주인도, 정환도, 기술자도 묻는다. 그들 모두 묻지만 아무도 답을 주지 못한다. 이 연극의 인물들은 같은 대사를 다른 맥락 속에서 사용한다. 말은 흐르고 차오르다 흘러 넘친다. 물에 휩쓸린 집은 정환에게 휴식과 작업의 장소가 아닌 참을 수 없고 벗어나고 싶은 난장판으로 변한다. 이렇게 정환의 일상은 물에 잠긴다. 누수된 채 엉망이 된다.

'공간을 지키려는 한 사람과 훼방꾼 다수'라는 포맷은 낯설지 않다. '말도 안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주인공'은 코미디의 흔한 문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극은 블랙 코미디나 상황극으로 불러도 좋을 듯하다. 연극이 진행되는 90분 동안 극장 안에는 낄낄거리고 풉풉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취향을 탄다는 단점이 있지만 코드만 맞는다면 이 연극을 상당히 재미있다고 느낄 것이다.

대답 없는 말의 무질서한 난립은 부조리 극과도 닿아 있다. 모든 사람들의 질문은 대답을 듣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돈다. 말이 가득하지만 그것은 '소통'이라는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 말은 균열이 생겨 누수되는 물처럼 어디론가 사라진다. 나타나지 말아야 할 곳에 존재하며 소음으로 남는다.

연극을 현실에 붙들어 놓은 배우들의 연기
 
▲ TODAY's CAST 연극 <누수공사> CAST.
ⓒ 안정인
 
자칫 가벼워 보일 수 있는 연극을 현실에 붙들어 놓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집주인 역의 이지혜 배우는 깜짝 놀랄 만큼 리얼해서 20년 전 옥탑방에 살던 시절 집주인을 보는 것 같았다. 임대인인 내가 없을 때 마스터키를 이용해 불쑥불쑥 방에 들어와 집수리가 자신의 의무라며 아무 곳에나 연장을 버려 두고 갔던 집주인.

어디에 생긴 것인지도 모르는 누수 때문에 일상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정환 역의 박용우 배우에게 수고했다는 위로를 건네고 싶다. 엉망이 된 집 안에서 그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마음에 남는다.

이 연극에서 가장 비범한 인물은 '방문자'이다. 극의 초반에 잠시 모습을 보였다 사라진 후 후반에 정체를 드러낸다. 반전의 키이며 웃음의 포인트였어야 하는데 한방이 부족했다. 초반과 후반 모습의 극적인 전환이 없어서 심심한 느낌이다. 아쉽다.

이 연극의 미덕은 선명함이다. 연극의 주제는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술술 흘러나온다. 아래층 남자는 '세상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며 울분을 터뜨리고 '누수'라는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상황 때문에 누군가의 일상은 회복할 수 없이 망가진다. '저 장면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지?', '왜 저런 대사를 하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눈 앞에 펼쳐진 난장판을 바라보며 '그래, 저게 인생이지'라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을 수 있다면 성공이다.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평온하던 공간이 잘못된 장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당신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그렇다. 그런 당신의 삶에 행운이 있기를. 이 연극은 5월 14일까지 드림아트센터 3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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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안의 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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