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하지 마시오'라고 수영복에 크게 써넣을까 [양민영의 한 솔로]
[양민영 기자]
▲ 나이듦 없던 게 생기고 소중한 건 쉽게 잃는다. |
ⓒ 게티이미지뱅크 |
그는 나이듦을 주제로 에세이를 쓰면서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쏠려서 두피의 맨살이 드러나는 현상을 뜻하는 단어가 필요했다. 그러나 마땅한 단어가 없어서 섬 이름인 아루바를 빌려 썼다.
갑자기 낯선 단어를 가져와 구구절절 설명할 때 눈치챘겠지만 나에게도 아루바가 생긴 것 같다. 예전부터 노라 에프런을 존경하고 모든 걸 닮고 싶지만, 아루바까지 닮고 싶은 건 아닌데 유감이다. 아루바는 탈모와 달리 가르마 방향을 정기적으로 바꾸고 머리 모양을 제대로 만져주면 사라진다.
하지만 이런 게 머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자꾸만 신경을 자극했다. 물론 나도 마냥 젊었을 때는 알지 못했다, 나이듦이란 '없던(더 자세히는 딱히 쓸모도 없고 성가시고 짜증스러운) 게 자꾸 생긴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걸.
반대로 소중한 건 너무 쉽고 허탈하게 잃는다. 내가 뭘 잃고 있는지, 일주일에 두 번꼴로 확인하는 장소가 바로 주짓수 도장이다. 그곳에만 가면 누적된 분노를 연소시키느라 나도 모르게 페이스가 오버되는데 신나게 운행 중인 가전제품의 전원을 우악스럽게 뽑았을 때처럼, 혹은 격투기 게임에서 체력을 표시하는 막대의 테두리만 긴박하게 깜박이듯 기력이 완전히 바닥나는 순간이 찾아온다. 동창 중에 지난달에 엄마가 된 친구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예전 같지 않은 체력이 절망스럽다.
그러면서도 내심, 나는 젊지 않을 뿐 늙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예의 그 MZ세대(내 출생 연도가 밀레니얼 세대의 선두에 위치하므로 나도 MZ세대에 속하지만 이런 사족이야말로 구차하다)가 보기에 나는 늙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늙은 건 만 65세쯤이라고 멋대로 믿어버린다.
예를 들면 주말 오전마다 수영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진정 늙은 게 아닐까? 그들이 마흔이 넘은 나를 아동 취급한다는 게 가장 확실한 근거다.
한 시간 헤엄칠 체력
'늦게 왔네', '먼저 가!', '살 빠졌지?'
직원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듣는다. 체육센터가 문을 열었을 때부터 수영장을 접수한 할머니들에게는 꼬리를 내린다 쳐도 왜 쉰 살이 조금 넘은 것 같은 이들에게까지 반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나중에는 '반말하지 마시오'라고 수영복에 크게 써넣을지 말지 고민했다.
친밀함(조금도 친밀하지 않은 게 문제다)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선해하려 해도 반말하는 습관은 솔직히 별로다. 그 기저에는 쉽고 무례한 방식으로 우위를 차지하려는 욕망이 깔려 있다. 누구에게나 반말해도 될 정도로 나이 들었으니까, 혹은 옛날 사람이라서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나이 들수록 경계해야 할 일이며 노년에 반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심리학자 피아제가 주장한 인지 발달 단계(인간의 인지 발달이 네 단계로 이뤄진다는 이론)의 최종 심급이다.
그래서 반말을 방어할 수 있는 쉬운 길을 찾았다. 되도록 그들과 마주치지 않는 거다. 강습을 받지 않고 이른바 '자유 수영'이라고 부르는 시간을 잘 이용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원래대로라면 자유 수영은 정각부터 시작한다. 처음에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움직이다가 나중에는 새로운 요령을 터득했다. 알고 보니 나에게 반말하는 이들은 30분 이상 헤엄치지 못했다. 시작한 지 20분을 넘기면 레인이 거짓말처럼 한산해지다가 30분 무렵에는 체력의 열세와 샤워실 자리 경쟁을 핑계로 모두 떠난다.
이 패턴을 파악한 뒤로는 자유 수영 시간을 2부제처럼 이용했다. 20분쯤 입장해 다음 수업이 시작되는 정각까지 머물렀더니 그렇게 쾌적할 수 없었다. 전세 내다시피 한, 텅 빈 레인은 특히 접영 연습에 그만이었다.
양팔을 동시에 휘두르는 동작 때문에 평소에는 눈치 봐가며 조심스럽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 거칠 것도,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이 편안함, 이 해방감! 말 그대로 자유 수영! 젊지 않으면 어떤가, 아직은 한 시간 내내 헤엄칠 수 있는 체력을 가진 나의 승리다.
▲ 세월은 유수 같고 가버린 물살은 다시 오지 않는다. |
ⓒ 게티이미지뱅크 |
목표량인 1킬로미터를 채우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옆 레인에 서 있던 할머니가 말했다. 10분 뒤에 샤워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던 나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을 맞던 중에 샤워실은 갑자기 진료실이 됐다. 내 몸에 아루바스러운 게 또 있다는 소식을 서너 명의 여성에게 전해 들었다. 아루바가 짜증스러운 건 뒤통수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가 컸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내가 절대 볼 수 없는 곳에 전에는 없던 게 생겼음을 역시나 반말로 지적받은 거다.
"등에 이게 뭐야?", "수술해, 칼로 찢어.", "수술하면 괜찮아."
곧장 3년째 단골인 피부과로 가서 등을 보였다. 의사는 표피 낭종이라는 정식 명칭을 알려줬다. 나는 똑같은 질문을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해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왜 없던 게 생겼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명확한 답을 듣지 못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살아 있어서?
잠들기 직전에 여유가 생긴 다음에야 다시 수영장 샤워실을 떠올렸다. 만약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경우라면 어쩌려고 함부로 수술 운운했던 걸까. 그냥 조용히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알려줄 수는 없는 걸까? 이왕이면 반말은 빼고 말이다.
그날 밤 내내 내가 싫어하는 게 단순한 노화인지, 아니면 나이듦인지, 앞으로 나이 든 이들에 동화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인지 헤아렸다. 나는 어쩌면 피아제 발달이론의 전조작기(직관적 사고와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이는 단계)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청년에 끼어들자니 민망하고 노년에 포함되자니 억울한 나이가, 마치 40분과 50분 사이의 텅 빈 수영장 레인 같다고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분명한 건 세월은 유수 같고 가버린 물살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 이 물살을 타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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