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트렌드]'노인을 위한 나라' 일본 출장길에서 배운 것

2023. 4. 27.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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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일본 도쿄로 출장을 다녀왔다. 코로나19 전까지 일본 지역 담당으로 일하느라 자주 다녔는데, 오랜만이었다. 필자는 시니어의 생활 관련 참고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일본 서적을 먼저 찾아본다. 우리보다 고령화를 먼저, 그리고 오래도록 경험하고 있는 일본에는 살펴볼만한 사례도 많고, 각 사안들에 대한 논의가 길었던 만큼 철학도 깊이 있고, 트렌드도 다채롭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동아시아 문화권이다보니 서구권 사례보다 적용도 쉽다. 이번 방문을 통해, 이미 시니어와 관련해해 갖춰놓은 제도나 시설에 대한 부러움도 있었고, 우리가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들도 있었다.

여정의 시작은 공항에서 전철을 타고 중심가로 이동하는 것부터였다. 바로 노약자 배려 구성이 돋보였다. 전차에 오르기 전부터 노약자나 여성 보호 구역을 나누는 분홍과 파란색이 선명한 바닥 페인트 칠과 큰 글자 안내가 눈에 띄었다. 내부에도 ‘노인, 장애인, 내부장애인, 영유아동반자, 임산부’가 앉는 곳이라고 픽토그램을 사용해서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외국인 등)도 이해할 수 있도록 표시해뒀뒀다. 휠체어로 이동 중인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이건 특정 노선에서만 가능할 것 같았다. 중심가를 벗어나면, 무인으로 운영되는 곳도 많고, 시설이 낡고 오래된 탓에 계단만 있는 역들도 있어서다. 다만, 전철에서 엘리베이터가 없고 에스컬레이터만 있는 곳이고 휠체어 탄 사람이 이동해야 한다면, 상행선과 하행선 중 아예 한 곳의 라인을 전용으로 멈추고 역무원이 동행하여 이동시켜주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5~8분을을 차분히 기다린다. 자주 있는 일인 듯, 단기 방문객인 필자에게만도 매일 한차례 이상씩 보였다.

도쿄로 출퇴근하는 베드타운 지역의 동네 중형 마트도 인상적이었다. 치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연화식(軟化食: 저작 기능 저하를 보완하기 위한 음식), 1인 가구를 위한 간편식 제품이 다양했다. 소화력이 떨어질 때 먹을 수 있는 천연 약 종류도 워낙 유명한데, 한국 시니어들의 일본 쇼핑 필수품이다. 쇼핑용 카트도 두 종류 이상이었는데, 1~2인 가구에 맞춰서 아담하고 기대어 끌기가 편리한 종류가 있었다. 재밌던 부분은 계산대였다. 종류가 10종이 넘는 일본 동전을 한꺼번에 집어 넣으면, 알아서 분리해서 계산해 돌려준다. 실눈을 뜨고 일일이 세지 않아도 된다. 또 계산대에 숫자와 품목을 알리는 글자 크기도 엄청난 사이즈인데, 동시에 소리로 얼마인지 알려준다. 시각장애인은 물론 귀가 잘 안 들리는 사람을 동시에 배려한 음성서비스가 제공됐됐다. 점자가 있는 곳도 많다는데 아쉽게도 접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운 좋게 지인을 통해 일본 UR임대 주택에 묵을 수 있었다. 한국 LH공사에서 보급형으로 운영하는 것과 유사한 곳이다. 사례금, 중개수수료, 갱신료, 보증인과 보증료가 없는 곳으로 서민 주택이다. 입구부터 문턱이 없는 설계와 단지 내부 복도마다 안전바(손잡이 봉)가 있어 언제든 의지할 수 있고, 지나다니다가 잠깐씩 쉬어갈 수 있는 의자형 설치물이 있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도움이 되었다. 집안도 배려가 가득했다. 화장실과 욕조 옆에는 응급벨이 설치되어 있고, 욕조나 변기 등에는 꼭 가로형과 세로형 봉이 설치되어 있어서 갑자기 일어서거나 온도차이 등으로 어지럼증을 느낄 때 잡을 수 있는 안전바 역할을 했다. 세면대 역시 어린이와 노인을 고려하여 낮게 자리했고, 세탁기 수도꼭지 위치는 뒷쪽이 아니라 앞쪽으로 뽑아내, 따로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방마다 문턱을 없애서 걸림을 방지하고 휠체어나 보행기가 쉽게 다닐 수 있는 구조였다. 엘리베이터는 기본적으로 노약자를 위해 천천히 문이 닫혔다.

곳곳에 시니어 관련 각종 광고가 자주 보였다. 유명 주류회사가 술 광고 대신 화장품 광고를 하는데, 50대 시니어 남성 모델이 아내와 함께 등장해서 왜 나이가 들면 남성이 피부 관리를 받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제품을 추천한다. 시니어들에게 보유 중인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편리하게 받을 수 있다는 홍보 광고도 수차례 볼 수 있었다. 또 연차 높은 가수들의 디너쇼 광고나 온천 여행 광고에는 백발의 시니어 모델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했다. 반면, 신문사는 시니어 고객 위주다보니 젊은 층을 대상으로 독자를 넓히고 싶어해서 캐릭터 웹툰을 활용해 감각적인 광고를 내보내기도 했다.

시니어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취향 큐레이션으로 성공해 해외 진출까지 한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을 비롯, 동네 서점 여러 곳을 둘러보기도 했다. 90대인 초고령 할머니들의 에세이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연거푸 뜨면서 일본 출판계 금맥이 됐다는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책들을 ‘아라한(Around Hundred), 100세 전후’라고 부르는데, 독자들은 주로 60~80대 여성이라고 한다. 시니어들이 더 선배 세대의 이야기를 찾아서 삶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라는데, ‘의존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근사함’이 공통점이라고 한다. 할머니들의 인자한 사진이 담긴 책 표지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일본 서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자기계발서 코너는 예나 지금이나 인기였다. 일종의 실용서 스타일로, 10대에서 50대까지 10년 주기마다 ‘반드시 해야 할 일’, ‘놓쳐서는 안되는 것’ 등에 대한 책들이 나란히 세대별로 정리된 서가가 인상적이었다.

한편, 인구에 대한 생각을 내내 할 수 밖에 없었다. 인력이 부족해 은퇴자를 재모집하는 기술 분야의 시니어 베테랑 모집 광고나 정년 연장이 됐지만, 연금이 고갈돼 자력 생존해야 한다는 거주자들의 이야기는 남일 같지 않았다. 장인이 운영하는 100년이 넘은 전통 양갱집에서 “후계자가 없어서 문을 닫아야 할 것 같다”는 한숨 섞인 이야기도 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도쿄 중심가 편의점은 판매원들이 온통 외국 유학생이었다. 중국, 필리핀, 인도, 베트남 사람들이거나 종종 한국 사람도 있었다. 메뉴얼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일본 특유의 접객 문화와는 달랐다. 지역으로 가게 되면, 시니어들이 판매원 역할을 하고 있다는데, 이번 출장은 도쿄 한정이라 확인할 수 없었다. 1억명 인구 사수를 외치는 일본에서 빈집 ‘아키야’(空家)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TV 프로그램도 봤다. 인구가 붐비는 도쿄에서도 10%가 빈집이다. 총무성에 따르면 빈집은 2018년 기준 850만 채(전체 주택의 14%)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원인인데, 주택 노후화와 상속세 등의 문제로 방치된 집은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공짜집도 늘고 있지만, 양도세와 재산세에 수리비까지 더해져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인수자를 찾기도 어렵다고 한다.

시니어세대를 모든 기획부터 설계까지 고려하고 있는 사회는 배려가 가득했다. 하지만, 초고령화 사회의 내부를 직접 체험하니, 모든 문제가 연결돼 있고 복잡하다. 일본보다 빠르고 심각한 고령화 길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 시간이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직 우리에겐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실행력은 우리가 세계 최고 아닌가!

이보람 써드에이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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