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덮자? 문건대로 이미 진행된 '무언가' 있다
[정욱식 기자]
'윤석열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까? 미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면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요구할까? 4월 26일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불법 행위를 외교적 지렛대로 삼아 실익을 얻으려고 할까?'
▲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최종 조율을 위해 1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윤석열 정부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넘쳐난다. 외교안보라인의 실세 중의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지난 11일 미국 방문길에 오르면서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위조됐다"며, 미국에 입장을 전달할 게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발언에 무게를 두고자 "오늘(11일) 아침에 양국 국방장관이 통화했고, 양국 견해가 일치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미의 판단이 일치한다고 보긴 어렵다. 백악관은 유출된 기밀 문건의 일부가 조작되었다고 하면서도, 조작된 문건을 제외한 문건이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 보좌관인 크리스 미거는 10일(현지시간) "유출된 기밀 문건이 고위급 인사들에게 보고할 때 사용되는 형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프랑스와 이스라엘도 '위조' 주장? 우리는 차원이 다르다
윤석열 정부는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사례를 들어 한국 관련 정보도 위조된 것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나라와는 차원이 다르다. 프랑스와 이스라엘 정부는 유출된 극비문서에 담긴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반면 윤석열 정부는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기밀 문서에 담긴 대화 내용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품고 있다. 프랑스와 이스라엘 정부는 부인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반면, 윤석열 정부는 부인하기에는 미국과의 밀실 협의가 이미 깊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밀 문건에 담긴 프랑스 관련 정보는 '프랑스군이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내용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스 국방부는 "우크라이나 작전에 연관된 프랑스군은 없다"면서 "인용된 문서는 프랑스군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출처가 불분명한 문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충분히 예견된 반응이다. 프랑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했다는 정보는 확전의 위험을 안고 있고, 이를 우려한 프랑스 정부가 서둘러 진화에 나선 것이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출된 기밀 문서에는 '모사드 고위 관료들이 사법개혁 반대 시위 등 이스라엘 정부 규탄 활동을 지지하고 있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에 대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실은 모사드가 사법개혁 반대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는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이 역시 예견된 반응이다. 대외 정보기관인 모사드는 국내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고 사법개혁 문제가 이스라엘 정국의 핵으로 부상하고 있는데, 이를 부인하는 것 말고 다른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자주포를 발사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자료사진) |
ⓒ AP=연합뉴스 |
핵심적인 내용은 이문희 당시 비서관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정책을 변경해 이를 공식 천명하는 방안을 거론하자, 김성한 당시 실장이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회담과 무기 지원을 거래했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는 것이다. 또 김 전 실장이 폴란드에 무기를 수출하고 폴란드가 이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우회 지원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미국 언론들은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가 3월 초에 이러한 대화 내용을 신호정보를 이용해 파악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비밀 문건에 담긴 윤석열 정부의 핵심적인 고민은 포탄을 제공해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 미국이 최종 사용자가 되지 않아 살상무기 지원 불가 원칙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결국 윤석열 정부는 '판매'가 아니라 '대여'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3월에 윤석열 정부 및 방산업체가 국산 155mm 포탄 50만 발을 대여 형식으로 미국에 제공하기로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대여한 포탄의 소유권은 한국이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한국이 빌려준 포탄을 지원하면 반납을 요청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 미국이 한국이 빌려준 포탄을 자신의 무기고에 쌓아두고 자국의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밀어내기'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러시아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 윤석열 대통령이 11일 오후 경기 화성시 기아 자동차 공장(오토랜드 화성)에서 열린 전기차 전용공장 기공식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 |
ⓒ 대통령실 제공 |
주목할 점은 또 있다. 미국은 한국을 상대로 도청을 했는지 아직까지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있는데, 용산 대통령실은 도청이 없었다고 못 박고 있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해 국내 기업으로부터 갹출해 '제3자 변제' 방식을 택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도청의 잠재적 피해자인 한국이 피의자에 해당하는 미국에 '외교적 면죄부'를 먼저 준 셈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이러한 상식 밖의 외교적 행태는 한미일 삼각동맹을 위해서라면 미국과 일본에 간도 쓸개도 다 내주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윤 정부의 "결단"에 적반하장식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한국을 향해 '미국의 이익에 복무하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한미일 삼각동맹이냐고. 한국을 신냉전의 한복판에 내던질 한미일 삼각동맹이 국격과 국민의 자존심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추구할 만큼이나 가치와 실익이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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