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교사가 준비한 자유여행, 그 이상적 계획과 현실

권유정 2023. 4. 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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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청년들과 당일치기 강릉 기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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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증의 발달장애 청년들을 가르치며 겪는 일들을 쓰고 싶습니다. 미디어에 주로 비치는 중증장애인과는 또 다른, 자립을 꿈꾸며 열심히 삶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보며 장애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비슷한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이 되길 바라며 글을 씁니다. <기자말>

[권유정 기자]

MBTI를 그리 신뢰하지는 않지만 굳이 분류를 하자면, 평상시의 나는 J보다는 P에 가깝다. 학창 시절 과제는 주로 마감이 닥쳐야 했고 정리정돈은 잘 못한다. 계획이 틀어져도 그리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일을 할 때는 평상시보다 조금 더 체계적이고 꼼꼼하다. 직장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여행을 할 때는 누구랑 함께 하느냐,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차이가 크다. 동남아나 가까운 휴양지로 떠나는 친구들과 여행은 항공권과 숙소만 예약하고 간다. 일정은 대충 가고 싶은 곳 몇 군데 찾아놓고, 여행지에 가서 정한다. 날씨나 그때그때 마음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편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유럽에 갔을 땐 보다 상세하게 계획을 짰다. 언제, 어디를 가고, 얼마나 머물지, 어떻게 이동할지 대략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시간 단위로 촘촘하게 계획해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아침, 점심, 저녁 정도로는 나누어 계획하고 움직였다.

반면 발달장애 학생들과 프로젝트 수업으로 여행을 떠날 때 나는 파워 J가 된다. 최대한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시간 단위의 일정부터 식사, 간식, 교통까지 매우 꼼꼼하게 계획하고 준비한다.

일정은 촘촘히
 
 기차여행 첫 도전, 우여곡절 끝에 강문해변 도착
ⓒ 권유정
강릉으로 당일치기 기차여행을 떠났을 때, 우선 대략적으로 하고 싶은 활동을 나열하고, 집에서 출발하고 귀가하는 시간을 고려하여 기차 시간을 선택했다. 거주지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서울역과 상봉역 중 가까운 역으로 각자 다르게 예매를 한다.

카드나 스마트폰 결제가 가능한 학생들은 예매도 직접 한다. 복지할인을 받으려면 자신의 개인정보도 숙지해야 하고, 카드사, 카드번호, 유효기간, CVC번호 등의 정보도 배워야 한다.

열차 시간이 정해지면 각자 집에서 출발해야 하는 시간과 찾아오는 길을 확인한다. 요즘은 인터넷 검색이 워낙 편리하게 되어 있어 시간계산을 못해도 도착시간을 입력하면 출발시간이 나오고, 환승역, 방향 등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다음으로는 강릉에 도착한 이후의 일정을 세운다. 점심을 먹고, 바다에서 놀다가 카페도 가고, 저녁을 먹고 돌아오기로 했다. 바다에서는 다 함께, 식사와 카페는 조별로 하도록 했다. 강릉역이나 강문해변 근처에서 식당과 카페를 찾고, 가는 길을 찾았다. 

강릉은 대중교통이 용이하지 않아 거리에 따라 도보와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동시간과 소요시간을 계산하여 30분 단위로 일정을 정했다. 식사와 카페는 미리 메뉴도 정하고 비용도 계산했다. 택시는 총 예상금액과 1/n로 나눈 금액을 계산하고, 어떻게 낼 지까지 상세하게 정했다. 사후평가와 정산을 위해 영수증도 꼭 챙겨 오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가져와야 할 총 용돈과 필요한 준비물들을 숙지한다.

이렇게 하면 여행을 준비하는 데에도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다. 프로젝트 수업은 주 1회이니 교사들의 사전준비는 여행보다 몇 주는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학생들과 함께 하려면 단순히 행사를 계획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고가 들어간다.

여행준비는 머리 아픈 학습의 과정이지만 기대감으로 가득 찬 아이들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한다. 단순히 수학 문제로 계산하게 했으면 진작 흐린 눈으로 포기했을 것을, 계산기를 열고 머리를 쥐어짜며 최선을 다한다. 2인분을 시킬지 3인분을 시킬지 세상 심각하게 토론을 하기도 한다. 분명한 동기를 갖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 학습효과는 배가 된다.

시작부터 위기의 연속... 하지만 문제 없다!

파워 J도 울고 갈 철저한 준비를 하고 출발한 강릉여행은, 시작부터 위기의 연속이었다. 우선, 두 명의 친구가 지각을 해서 기차를 놓쳤다. 맙소사.

불행 중 다행인 건 모두 의사소통과 대중교통이용이 꽤 원활한 아이들이었다는 점이다. 역무원에게 기차를 놓쳤다고 말하고 다음 편을 타고 오라고 했다. 강릉을 향해 가며 조마조마하게 연락을 기다렸고, 무사히 다음 기차를 탔다는 연락을 받았다. 놓친 티켓은 환불까지 받았단다. 지각은 혼이 날 일이었으나 이후에 문제해결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그렇게 둘을 빼고 무사히 강릉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 잠시 모여 조별로 마지막 점검을 했다. 용돈은 얼마씩 가져왔는지, 택시를 타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택시비는 어떻게 내기로 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고, 강문해변까지는 어떻게 올 것인지 등.

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조별로 흩어졌다. 자치활동이 가능한 세 조는 전화로 중간중간 확인만 하고, 어려운 네 조는 교사가 동행했다. 지각한 두 아이는 강릉역에서 함께 점심을 사 먹은 뒤 택시를 타고 강문해변에 오도록 했다. 자치조 아이들은 무얼 먹었고, 총 금액이 얼마가 나왔고, 얼마씩 나누어 냈는지 잘 보고하고, 바다까지 문제없이 찾아왔다. 두 지각쟁이도 바다에서 합류했다.

물놀이를 하기에는 아직 선선한 날씨였으나 바다를 본 아이들은 너도나도 물놀이를 시작했다. 분명 발만 담그자고 했었는데... 물론 그런 약속은 다 지킬 거라 믿지 않았고, 혹시 모르니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준비해오게 했다.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은 채 바다에 들어가는 바람에 고장이 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켜지지 않는 휴대폰을 보며 아련한 눈과 무거운 한숨으로 다음부터는 물놀이 전에 반드시 소지품을 가방에 잘 넣겠다고 다짐했으니 그 또한 나름의 배움일 터.

젖은 옷을 갈아입고, 조별로 카페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뒤 저녁식사를 위해 다시 모였다. 예상치 못한 문제는, 자치조 둘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나니 더 이상 주변에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습해 온 택시어플도 강릉에서는 되지 않았다.

재빨리 콜택시 번호를 찾아 택시 부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지척에서 도와줄 채비를 하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 아이는 또박또박 목적지와 현재 위치를 말하고 택시를 불렀다. 

기다림 끝에 마지막 조까지 택시를 탑승했고, 이어진 문제는 남은 시간이었다. 택시를 부르는 데 삼십여 분이 소요되는 바람에, 예상했던 일정이 삐걱거렸다. 아무래도 늦게 택시를 탄 나머지 한 조는 저녁을 먹고 기차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초조한 마음에 그 조의 아이들에게 계속 연락을 시도했다. 어디쯤인지 물을 때마다 아직 택시 안이라는 답변이 서너 번 돌아왔다. 도무지 시간 내로 식사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결국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말을 채 다 꺼내기도 전에, 아이들이 먼저 씩씩하게 말했다.

"저희 지금 강릉역이에요! 늦을 것 같아서 그냥 왔어요. 밥 여기서 먹으려고요."
"아이고, 잘했네."

짝짝짝, 박수.

오사카 졸업여행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저녁을 먹고 강릉역에 가니 자치조 학생들이 모두 먼저 도착해 있었다. 훌륭하게 저희들끼리 돌아다니고 제시간에 도착하다니, 기특하고 대견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성공적인 여행이었다. 게임처럼 경험치가 눈에 보인다면, 아마 모두들 게이지가 한 뼘은 성장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대다수가 부족한 점이 문제상황에서 스스로 대처방법을 찾고 실행할 수 있는 문제해결능력이다. 문제상황은 예측할 수 없고,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들은 잘못된 방법을 택하기도 하며, 때로는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주위에서 나서서 대신 해결해주기도 한다. 문제해결능력을 기르는 데에는 경험이 필요하다. 직접 맞닥뜨리고 헤쳐나가며 쌓인 경험치들이 아이들을 성장시킨다.

우리의 역할은 아이들의 능력을 잘 파악하여 적당한 난이도의 도전에 부딪히게 하는 것, 그때그때 상황에서 적절한 대안과 방법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어려운 상황 앞에 선 아이들이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응원과 격려하는 것, 그리하여 앞으로 맞닥드릴 수많은 문제 앞에서 나아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기차를 타고 먼 곳에서 따로 또 같이 즐긴 여행은 아이들의 기억 속에도 오래도록 남은 듯했다. 오사카 졸업여행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1학년 때 했던 여행들을 되짚어주자 몇몇 아이들이 뿌듯한 얼굴을 했다. 방학 때 강릉에, 저희들끼리 기차 타고 또 다녀왔다며. 

"오사카 여행도 열심히 준비해서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너희들이 취업하고 월급 모아 너희끼리 다시 여행 갈 수 있으면 정말 멋지겠다."

실현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꿈이 생긴 아이들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언젠가 너희들의 꿈이 꼭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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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연재 중인 ‘발달장애 대학생들과 해외 자유여행 도전기’와 연관 있는 내용이며, 곧 브런치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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