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의 추락, 라이벌 아닌 도전자 된 현실

이준목 2023. 3. 1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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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일본 구기종목의 성장, 철저한 계획과 꾸준한 투자의 산물

[이준목 기자]

한 번의 실패가 아니다. 야구만의 수모 역시 아니었다. 구기종목에서 일본 스포츠는 이제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목표로 점점 뻗어나가고 있는데, 한국은 오히려 국제대회마다 일본과의 벌어진 격차만 절감하는 초라한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이는 곧 한국 프로스포츠 전체가 함께 성찰해야 할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한국 야구대표팀은 최근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했다. 4강을 목표로 했던 한국은 1차전에서 반드시 잡아야 했던 호주(7-8)에 1점차 패배에 이어, 숙적 일본(4-13)에게는 콜드게임패 일보 직전까지 몰리는 졸전 끝에 9점차로 완패했다.

약체인 체코(7-3)와 중국(22-2)을 대파하며 마지막 체면은 세웠지만, 일본(4승), 호주(3승1패)에 밀려 최종 성적 2승2패로 조 2위까지 주어지는 2라운드(8강) 진출에 실패했다. 2006년 초대 대회 4강, 2009년 2회 대회에서는 준우승을 기록하며 선전했던 한국야구지만, 이후로는 2013년 3회 대회-2017년 4회 대회에 이어 '3회 연속 1라운드 탈락'이라는 굴욕적인 기록을 세웠다.

일본과의 격차

무엇보다 이번 대회에서 야구팬들을 가장 충격에 빠뜨린 장면은, 한국야구의 추락한 국제경쟁력과 비례하여 현저하게 벌어진 '일본과의 격차'를 분명히 확인했다는 사실이다.

한국과 일본 모두 야구가 '국민스포츠'라 불릴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리그 역사가 훨씬 오래된 일본이 전력이나 위상 면에서 한국보다 우위를 점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국제전에서만큼은 '한일전'의 특성상 쉽게 밀리지 않았다.

한국은 2000년 시드니-2008 베이징 올림픽, 2006-2009 WBC, 2015 프리미어12 등 정예멤버들이 맞붙은 국제전에서 전력상 열세라는 평가에도 일본과 여러 차례 대등한 명승부를 벌였다. 일본 역시 한국을 위협적인 상대로 평가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2010년대 중반 이후 균형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한국야구대표팀이 프로선수들이 출전한 국제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승리한 것은 2015년 프리미어12 준결승전이 마지막이다. 한국은 다시 오타니를 앞세운 일본에게 꽁꽁 묶여서 끌려다가 9회에만 4점을 뽑아내며 4-3의 극적인 대역전승을 거뒀다. 1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기적같은 승리였다.

하지만 이후 한국야구대표팀은 일본에 줄줄이 연패하며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2017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예선(7-8)과 결승(0-7), 2019 프리미어12 풀리그(8-10)와 결승(3-5), 2020 도쿄 올림픽 준결승(2-5), 그리고 이번 2023 WBC 패배까지 포함하면 무려 6연패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선 2연승을 거뒀지만, 일본대표팀은 한국과 달리 이 대회에는 프로 선수들을 보내지 않는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이후 양국의 프로선수들이 출전한 A팀 상대전적은 이제 19승 19패로 동률까지 따라잡혔다.

특히 이번 일본 야구대표팀은 현재 '역대 최고'를 거론할만큼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투타 겸업으로 세계 야구 역사를 새로 쓴 오타니는 말할 것도 없고, 56홈런을 때린 무라카미 무네타카를 비롯하여 다르빗수 유, 라스 눗바, 요시다 마사타카 등 MLB와 NPB에서 활약하는 슈퍼스타들이 즐비하다. 메이저리거도 한국은 2명뿐이지만 일본은 5명이나 됐다. 한국과 같은 아시아로 비슷한 신체조건을 가졌음에도 150KM대 강속구를 뿌리는 투수들이나 30홈런 이상을 때리는 거포 자원이 풍부하다는 것도 부러움을 자아낸다.

반면 한국은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수확했던 황금세대(80년대 초중반생)가 저물면서 그 뒤를 이을 '세대교체'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이징 세대의 막내였던 김광현-김현수를 비롯하여 양현종-박병호-최정 등 베테랑들은 사실상 마지막 태극마크였던 이번 대회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여기에 세대교체의 주역으로 기대했던 투타 영건들은 이정후-강백호-박세웅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억대 연봉과 스타대접을 받지만, 국제전에서는 볼질과 범타, 실책을 남발하는 프로 선수들의 모습은 야구팬들에게 '내수용'으로 전락한 한국프로야구 수준에 대한 실망감으로 이어졌다.

성적지상주의에만 치우쳐 경기를 믿고 맡길 확실한 선발 에이스와 거포를 키우는데 소홀했던 한국야구의 부실한 육성시스템, 국내에서의 인기와 몸값에 도취된 프로선수들의 정신적 해이, 장기적인 비전과 방향성을 잃어버린 KBO 행정의 매너리즘 등이 문제로 거론된다. 

더 큰 문제는 일본에 뒤지고 있는 것이 야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야구는 전통적으로 일본에 원래 열세였다고 해도, 축구나 농구에서는 한국이 상대전적과 위상에서 우세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이제 일본을 상대로 이긴다고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최근 A팀을 비롯한 연령대별 각급 축구대표팀이 국가대항전에서 줄줄이 일본에게 참패했다. 파울루 벤투 전 감독이 이끌었던 A팀은 2021년 3월 25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한일 평가전, 2022년 7월 27일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EAFF E-1컵(이하 동아시안컵) 최종전에서 2연속 0-3 패배라는 수모를 당했다. 또한 2022년에는 황선홍 감독이 이끌던 U23 대표팀과, U-16대표팀도 각각 0-3으로 일본에 연전연패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축구는 지난해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 아시아팀으로 나란히 동반 16강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최종순위는 일본이 9위, 한국은 16강 진출국 중 가장 낮은 16위로 격차가 컸다. 일본은 조별리그에서 '죽음의 조'에 속했음에도 우승후보로 꼽히는 독일과 스페인에 잇달아 역전승을 거두는 돌풍을 일으켰다. 16강전에서도 전 대회 준우승팀 크로아티아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카타르월드컵 당시 일본은 최종엔트리 26명 중 유럽파가 무려 19명에 이르렀고, 이들이 유럽 강호들을 격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은 일본의 절반도 안 되는 8명에 불과했다. 월드컵과 같은 큰 무대에서 수준 높은 환경을 경험한 유럽파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국제 경쟁력으로 직결된다. 피파랭킹에서도 일본은 20위에 올라 25위의 한국을 다섯 계단 앞서고 있다.

농구 역시 일본에 추월당했다. FIBA(국제농구연맹) 랭킹에서 한국은 남자가 38위, 여자가 12위다. 반면 일본은 남자가 36위, 여자가 9위로 모두 한국보다 앞섰다. 한국농구는 2014년 홈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동반 우승 이후 국제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남자농구대표팀은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예선 1라운드에 불참하면서 실격 처리를 당했다. FIBA 랭킹을 올리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뜻이다. 여자대표팀은 지난해 열린 농구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으나 1승 4패에 그치며 부진했다.

일본여자농구 대표팀은 2020 도쿄올림픽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남자농구는 하치무라 루이(LA레이커스), 와타나베 유타(브루클린 네츠) 등 한국에는 하승진 이후 단 한명도 없는 현역 NBA(미프로농구) 선수들을 잇달아 배출해 내기도 했다. 인종적 특성상 아시아 농구가 세계 수준을 따라잡기 어렵다는 편견을 보란듯이 극복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 구기종목의 성장은 우연이 아니다. 철저한 계획과 꾸준한 투자의 산물이다. 일본야구는 2000년대 급성장한 한국야구에 잠시 고전한 것을 계기로 자성하며, 선수육성과 대표팀 운영구조를 대대적으로 혁신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축구와 농구 역시 이른바 '저팬스 웨이(Japan's way)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월드컵 우승-올림픽 메달권 진입, 해당 종목 스포츠 인구 1000만 명 증가라는 비전을 가지고 국가대표팀 강화와 청소년 육성, 지도자 양성을 장기적으로 추진해왔다.

구기종목들은 대부분 높은 인기와 거대한 시장과 직결된 프로스포츠들이다. 그런데 일본이 야구를 비롯하여 축구, 농구 등에서 세계화에 눈높이를 맞추며 발전해 가는 동안, 한국 프로스포츠를 대표하는 구기종목의 경쟁력괴 위상은 정체 및 퇴행의 기로에 놓였다. 

이제 구기종목에서 한국은 일본과 대등한 라이벌이라 하기에도 부끄럽다. '도전자'에 가까워진 게 냉정한 현실이다. 이제라도 변화하고 개혁하지 않으면, 이 격차는 앞으로 더욱 벌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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