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우리 사회가 아테네 제전 통해 배워야 할 것

2023. 3. 6.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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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성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매년 3월 이맘때 대규모 축제를 벌인 국가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다.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인들이 매년 즐겼다는 디오니소스제전은 스토리텔링 기술이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음을 보여준다. ‘오이디푸스왕’ ‘안티고네’를 쓴 극작가 소포클레스, ‘메디아’로 유명한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킬로스 모두 일등상을 여러 번 거머쥔 인기 극작가였다. 포도주, 풍요, 향응, 부활과 쾌락을 상징했던 그들 신화 속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시민들의 축제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가장 좋은 튜닉을 입고 간단한 먹거리를 챙겨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 극장으로 향한다.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정된 작품들이 하루에 서너 편씩 무려 5일간이나 상연됐다. 오늘날로 말하면 빈지워칭(binge watching), 즉 몰아보기다. 잠만 줄이지 않는다면 몰아보는 건 몰입을 극대화하는 정서적 경험이다. 넷플릭스 같은 21세기 OTT의 스트리밍 서비스 때부터 몰아보기가 유행한 것 같지만 비극에 탐닉했던 고대 그리스인들도 잠시 일상의 노동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의 삶에 관한 극적인 이야기에 빠져보는 경험을 즐겼던 것이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만큼 지략과 용기가 뛰어난 영웅 오이디푸스의 몰락을 보며 신이 정한 예정된 삶을 피할 수 없다는 교훈일까, 자신감이 지나쳐 오만함이 된 영웅의 비극적 결함 때문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하는 친구를 숨겨주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와 같은 질문으로 두 배우가 논쟁을 벌일 때 아테네 시민들은 집중했다. 정치에 별 관심없는 시민들도 공연을 통해 도덕적 딜레마에 처한 인물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경험을 누리며 무관심이 정답은 아니라는, 규범적 갈등에도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들은 같은 극에 감동하고 몰두하며 인간의 삶과 도덕, 신이 내린 교훈에 대해 생각했고 비슷한 가치와 감성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거듭났다.

그리스는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있는 곳으로 3월은 봄이 시작되는 때다. 지중해 영향으로 한반도만큼 춥진 않지만 12월과 1, 2월은 서리도 내리고 물도 어는 계절이었다. 봄이 되면 12㎞ 거리의 피레우스항구를 통해 배들이 들어오고 이웃 도시국가 이방인들의 유입도 잦아졌다. 아테네는 이 시기를 축제 기간으로 정한 것이다. 도시국가 구성원들이 질서를 유지하며 무탈하게 행사를 마칠 수 있도록 전야제로 제의를 올렸다. 공연 전에는 군대에 자원할 젊은이들을 모으는 모병광고를 하며 군인들이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고,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의 아이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산기슭 경사를 이용해 만들어진 계단식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언덕 아래 펼쳐진 장엄한 풍광도 즐길 수 있었다. 야외극장 무대와 부채꼴 모양의 객석이 만들어낸 소리의 증폭 효과는 배우의 작은 독백도 들릴 만큼 고도로 계산된 건축술의 결과였다. 시민들로 구성된 코러스와 배우들이 공연을 준비할 수 있도록 집과 음식을 내어준 시민 리더들, 코레고스(Choregos)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효시가 됐다.

그렇다고 아테네가 완벽한 이상향만은 아니었다. 여성, 노예, 이방인에게는 참정권이 제한됐고 여성은 무대에 서지 못했기에 안티고네도 메디아도 모두 가면을 쓴 남성이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 기간엔 누구나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아테네의 문화적 파워는 국가를 통합하는 섬세한 기술과 균형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도시국가를 지켜낼 군사력을 유지하려 애쓰면서도 시민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민주주의를 실행했다. 아테네는 결국 강성한 이웃인 스파르타, 테베 등을 규합해 페르시아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고대 그리스문명의 주도권을 쥔 국가로 발전했다.

이들이 남긴 문화유산은 실로 막대하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글은 인문, 철학의 근간이 됐고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유클리드의 기하학, 아르키메데스의 물리학은 이 고대문명이 모든 과학의 기본인 숫자의 원리를 꿰뚫었던 시대였음을 실감케 한다. 도시국가들의 스포츠 경쟁은 올림픽의 기원이 됐고, 히포크라테스선서는 의사가 가져야 할 희생, 봉사, 장인정신을 상기시켜주는 가장 오래된 윤리선언문이다. 이들이 남긴 문화유산 가치가 재발견된 시대가 르네상스였으며 그 콘텐츠들은 지금까지도 살아남았다. 균형과 경청을 아는 개인과 사회가 오래 살아남는다.

우미성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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