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자는 왜 ‘팜므앙팡’에 천착했나[유경희의 ‘그림으로 보는 유혹의 기술’]

2023. 3. 4.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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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앙팡’…아이 같은 여자 좋아하세요?

요즘 한창 인기를 누리는 짝짓기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느끼는 바가 있다. 언제나 가장 인기 있는 여성은 통상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들이라는 점이다. 귀엽다는 건 잘 웃고, 어려 보이고, 순수해 보인다는 것을 말한다.

문화사에 면면히 내려오는 남성 무의식 속 성녀 vs 창녀라는 이분법은 어쩌면 귀여운 여자 vs 섹시한 여자 혹은 어린 여자 vs 늙은 여자라는 이분법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각 세대별 남자들이 선호하는 여자는 무조건 20대 여자라는 말은 그저 농담은 아닌 듯하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널리 뿌리고자 하는 남성 입장에서 생물학적으로 수태 능력이 최고조에 달한 여성을 좋아한다는 것을 두고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로 인해 모든 여성들의 로망은 그저 어리고 젊은 여자가 되는 것일 뿐!

➊ 레오노라 캐링턴, 자화상, 1937~1938년경, 뉴욕메트로폴리탄미술관. 초현실주의 거장 막스 에른스트의 연인 중 한 명이었던 레오노라 캐링턴은 에른스트의 뮤즈에서 이후 예술가로 거듭났다.
미술사에서는 어떤 여인들을 선호했을까?

19세기 말이 되기 전에는 통상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 오이씨처럼 가녀리고 순수한 여성이 주로 그림의 소재가 됐다. 물론 19세기 전반에 걸쳐 프랑스에 신고전주의 미술이 유행할 때는 고전적인 미의 조건이 다시 등장해 우아한 여성이 그려졌다.

그리고 20세기 현대 미술에 오면 전통적인 여성을 소재로 한 작품은 주류 미술사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예컨대 피카소의 입체파, 마티스의 야수파 등 모더니즘 미술에서는 더 이상 아름다운 여성이 그려지지 않는다.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이라고 하면 미술을 위한 미술, 즉 색채, 형태, 질감 같은 형식적 요인이 강조되는 미술이기 때문에 더 이상 여자의 생김새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림에서 누구를 그렸는지를 알아보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림의 조형어법이 어떻게 이전 시대의 통념과 다르냐가 더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형어법이 새롭고 낯설어지던 시대에, 다시 전통적인 구상화법으로 그림을 그리되, 자신들만의 이상적인 모델 혹은 여성상을 구가하기 시작한 그룹이 있었으니 바로 초현실주의자다. 초현실주의 남성 예술가들이 영감의 소재로서 가장 사랑한 여자는 어떤 여자들이었을까?

통상 문화사에서는 세 종류의 여성을 가정한다.

‘팜므파탈(femme fatale)’은 치명적일 만큼 유혹적인 여성을 일컫는다. ‘팜므프라질(femme fragile)’은 부서질 듯 연약한 생명력 없는 여인, 마지막으로 ‘팜므앙팡(femme enfant)’은 말 그대로 ‘아이 같은 여인’으로 순수의 화신을 의미한다.

팜므파탈은 치명적인 성적 매력으로 남성을 유혹하고 파멸시키는 여성을 뜻하며 살로메, 유디트, 이브 등 수없이 문학과 미술에서 반복해 재현돼왔다. 반대로 팜므프라질은 가녀리고 연약한 육체의 소유자로서 성적인 매력이 배제된 여성이다. 예컨대 불임의 여성 혹은 사산하거나 출산 도중 자신이 죽는 여성이다.

팜므파탈과 팜므프라질은 특히 세기 전환기에 이르러 등장한 성과 문명의 대립 구도에서 특별한 의미를 획득하며, 이때 팜므파탈은 상대적으로 문명화가 덜 이뤄져 여전히 자연적 생명력을 간직한 인간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예컨대 고갱이 타히티의 어린 소녀들을 야생의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극찬, 문명화된 메마른 유럽 여성의 대안으로써의 새로운 팜므파탈로 치부해 그림 속에 수없이 등장시켰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고갱과 연인 관계에 있거나 매춘의 대상이었던 이 여성들은 대부분 10대 소녀였는데, 그는 문명, 질서, 제약, 권태를 표상하는 식민지 프랑스인과는 달리 이들을 자연, 야만, 혼돈, 풍요, 기쁨을 표상하는 마녀로 치부했다.

➋ 프리다 칼로와 자클린 랑바, 1938년 멕시코. 화가였던 두 여인은 연인처럼 몰입하고 사랑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팜므파탈 특히 팜므앙팡에 천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꿈과 같은 무의식에 천착하면서 비합리적인 세계를 지향했다. 그들은 무의식의 영역에 아주 용이하게 들어갈 수 있는 매혹적 존재를 원했고, 그래서 고안된 것이 ‘팜므앙팡’이라는 이미지였다.

여기서 팜므앙팡의 특질을 그저 어린아이 같은 여자라고 단순화시켜서는 안 된다. 팜므앙팡은 일단 외모가 동안이어야 하며, 어딘지 선머슴 같은 중성적인 느낌이 있어야 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아마도 ‘아이 같다’는 말 속에 함의된 ‘무의식적 혹은 무의지적 존재’라는 점일 것이다. 자아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존재, 그래서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존재, 자의식이 희박하지만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 아마도 그들을 매혹시켰을 것이다.

이처럼 초현실주의자들은 영감의 원천으로써 여성 즉 팜므파탈과 팜므앙팡에 기댔다. 창조성과 상상력의 스펙트럼이 너무나 다양해진 현대 미술 관점에서 보면 여성 없이는 창조적 영감을 받을 수 없다는 그들의 논리가 턱없이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현실주의자들은 가장 먼저 팜므앙팡의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는 천진함을 넘어서는 열정적인 욕망을 엿봤고, 때로 그것을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인정하거나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초현실주의자의 팜므앙팡은 남성과 동등하거나 때로는 뛰어넘는 작품을 해냈다. 물론 당대에는 그다지 평가받지 못했지만 오늘날 그 팜므앙팡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대표적인 팜므앙팡이었던 존재가 프리다 칼로다. 그녀는 멕시코의 거장인 남편 디에고 리베라보다 사후 더한 명성을 얻었다. 그 외에 초현실주의 거장인 막스 에른스트의 세 연인, 레오노라 캐링턴과 레오노르 피니와 도로시아 태닝, 그리고 앙드레 브르통의 두 번째 부인 자클린 랑바 등. 그 여성들은 팜므앙팡이라는 이름에 예속되지 않고, 뮤즈에서 예술가로 거듭난 존재다.

훗날 한 미술사가가 레오노라 캐링턴에게 초현실주의자들의 뮤즈라는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가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헛소리라고 생각해요. 내게는 다른 누군가의 뮤즈가 될 시간이 없었어요. 가족에게 반항하고 예술가가 되는 법을 배우느라 바빴거든요.”

그리고 초현실주의 팜므앙팡들은 서로 깊이 연대했다. 더 이상의 비밀이 없는 동성연애에 푹 빠진 존재들처럼.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98호 (2023.03.01~2023.03.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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