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피로 얼룩진 60년 골육상쟁, 끝내 사죄 안 하다

2023. 3. 3.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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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로 전락한 송익필 가족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사노(私奴) 송익필 형제를 체포하라!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숨은 죄인을 당장 잡아들이라는 왕의 전교는 나라가 내린 판결을 뭉개고 있는 송씨 형제에 대한 최후통첩이었다.

때는 1589년(선조 22) 12월, 3년 전에 송씨 가족 모두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천(還賤)한다는 판결이 있었다. 60년이 넘도록 양반으로 살아온 송가(宋家), 갑자기 사노비의 신분으로 떨어졌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모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죽자사자 도망쳐 숨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독이 오른 안가(安家)는 추노를 고용하여 그들의 뒤를 쫓고 있다. 원고와 피고로 갈라진 두 집안은 표면적으로는 노비 소유권 문제지만 실제는 3대에 걸친 안씨 가문의 복수극이다.

「 ‘서인의 대부’ 당대 지식사회 리더
외척 안씨 집안과 3대에 걸친 송사

부친이 안씨 일가에 ‘역모죄’ 씌워
안가의 대반격 “우리집 노비 출신”

‘선대의 악업’ 부인하며 변명 일관
시대의 제갈량인가, 모사꾼인가

“노비 소생 아닌가, 양인 절차 밟았나”

동양화가 신영훈이 그린 송익필 수묵화. 단행본 『조선의 2인자들: 그들은 어떻게 권력자가 되었는가』에 실렸다. [사진 책비]

다툼의 사안은 노비 감정(甘丁)이 양인(良人)이 되는 절차를 밟았는가 아닌가에 있었다. 감정(1467~1537)은 안가의 증조 안돈후(1421~1483)와 여종 중금(重今)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녀는 안씨 집안의 주선으로 양인 송린과 혼인하여 송사련(1496~1575)을 낳았다. 종모법에 따르면 감정은 안가 소유의 노비가 되는데, 그 소생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아버지가 벼슬아치인 경우 일정한 절차를 거치면 양인이 될 수도 있다. ‘공·사 노비를 아내나 첩으로 삼아 낳은 자녀는 그 아버지가 장예원(掌隷院)에 신고하면 사실을 확인하여 기록하고’(『경국대전』) 병조(兵曹) 관할의 보충대에 입속시켜 일정한 기간을 채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고 안가(安家)의 입장은 감정은 이 절차를 거친 적이 없기에 그 소생은 자신들의 노비로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의 독자 송사련은 송익필 등 5남 1녀를 낳아 소송 당시 감정의 자손은 7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피고 송가(宋家)는 할머니 감정이 105년 전에 이미 양인이 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1481년 장예원 입안’ 문서를 제시한다. 원고 안가는 ‘감정이 비(婢)지만 재산을 나눌 때 노비 한두 구(口)를 주어 물긷는 노고를 면케 하라’는 증조 안돈후의 유서를 내놓는다.

원고와 피고로 만난 ‘6촌지간 원수’

충남 당진시 원당리에 있는 송익필 묘역과 그의 위패를 모신 입한재(立限齋). [중앙포토]

원고와 피고는 적서로 처지는 다르지만 촌수로는 6촌이다. 원고는 안돈후의 자손 28명이고, 피고는 감정의 모든 자손 68명이 대상이었다. 참고로 감정은 50년 전에, 그 아들 송사련은 11년 전에 죽었다. 양측은 문서의 진정성과 소멸시효, 골육상잔법(骨肉相殘法) 등을 따지며 정교한 법적 논증을 펼쳐갔다.

송익필이 이이·성혼과 35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삼현수간(三賢手簡)』. 오른쪽이 송익필 글씨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여기서 주목해야 할 한 인물이 있는데, 당대에 이미 명성을 떨친 송익필(1534~1599)이다. 구봉(龜峯) 선생으로 불리는 그는 고양 구봉산(현재 심학산) 아래에 터를 잡고 학숙을 열어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타난 13세의 김장생을 비롯하여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포진해 있다. 한 살 아래의 우계 성혼과 두 살 아래의 율곡 이이와는 너나들이하며 학문을 논하고 인생을 논했는데,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 모음 『삼현수간(三賢手簡)』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말하자면 송익필은 서인(西人)의 대부이자 학술계의 리더이며 정계의 멘토였다. 게다가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지난 30여년 모두가 우러러보던 북극성과 같은 존재였던 그가 예순 가까이에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선대(先代)의 악업(惡業)이라고 했다.

서얼 신분에 당상관 된 부친의 영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산남리에 있는 송익필 유허비(遺墟碑). [사진 구봉문화학술원]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은 서얼 신분에 26세의 젊은 나이로 정3품 당상관이 되는데, 매우 이례적인 경우이다. 그의 출세는 외사촌 안처겸(1486~1521) 형제와 외숙 안당(1460~1521)을 역모죄로 고발하고 얻은 대가였다.(『중종실록』 16년) 안돈후의 아들인 좌의정 안당은 기묘사화(1519) 때 사림을 보호한 죄로 관직이 삭탈되었고, 현량과로 입격한 세 아들 또한 파직되는 등 가문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환갑에 든 노련한 정치가 안당과는 달리 젊은 아들들은 사화(士禍)를 주도한 남곤(南袞)·심정(沈貞)을 제거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며 떠들어댔다. 장남 안처겸이 무협지를 쓰듯 선을 넘는 말들을 하자 안당은 그 화를 잠재우고 일도 시킬 겸 아들을 음성의 농장으로 데리고 간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때 송사련은 한강나루까지 따라가 외숙 일행과 ‘울며 작별’하고는 곧바로 처남 정상(鄭瑺)을 대동하고 대궐로 들어가 안처겸을 고발한다. 적서를 크게 따지지 않은 안당 부자는 피를 나눈 얼조카 송사련을 ‘내 가족’으로 챙겼고, 일 처리에 밝은 송사련은 안가를 드나들며 집안일을 도맡아 왔기에 그의 고변은 설득력을 얻었다.

증거로 제시된 문건은 안처겸의 모친상 조객록과 장사 때 묘역 조성을 도운 광주의 양천(良賤) 역부 60명이 적힌 명부였다. 송사련의 고변이 있은 지 닷새 만에 안처겸 형제 등 10여 명은 능지처사되고 안당은 교사되었으며, 문건 속의 사람들 103명이 형벌을 받고 죽거나 유배되었다. 이른바 신사무옥(辛巳誣獄)이다. 묻거나 따지는 과정도 없이 조작과 음모의 냄새가 짙은 이 사건은 기묘사화처럼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의 불안한 심리가 큰 몫을 한 것이다. 고발자 송사련은 네 임금을 거치며 40년간 당상관을 지키다가 천수를 다하고 80세로 세상을 떴다.

“사주 대가로 얻은 관직과 재물”

KBS 사극 ‘징비록’에서 송익필로 나오는 배우 박지일. [사진 유튜브 캡처]

송사련에 대한 당시 언론은 “통탄스러운 일에 격분하여 한 말을 무고자가 재앙을 꾸며서 옥사를 얽은 것”이라고 한 신잠(申潛)을 비롯 “남곤과 심정이 송사련을 사주하여 꾸민 사건”이고 “그 대가로 송사련이 얻은 것은 관직과 재물”로 요약된다. 율곡은 송사련의 장사 때 신주를 써준 일로 우계의 질타를 받자, 상주들의 간절함에 어찌 못해 응한 것임을 고백한다.(『율곡전서』 32) 구봉의 친구라는 율곡과 우계마저도 송사련에 대해서는 거리를 둔 것이다.

아버지 송사련의 권세와 재물에 힘입은 송가의 여섯 남매는 소위 고급 교육을 받고 양반의 사위가 되고 종실의 며느리가 되었다. 멸문의 화를 당한 안씨 가족들은 고통과 울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던 안가와 송가는 할머니 감정을 사이에 두고 65년 만에 다시 만났다. 안가 사람들은 조부와 부친과 숙부에게 역모죄를 걸어 죽이고 멸문의 화를 입힌 원수를 응징하는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소를 제기할 당시 이미 고령이던 안당의 손자이자 안처겸의 아들인 안로는 재판 직전에 죽음을 맞이하고 그 아내 윤씨가 바통을 넘겨받아 승소를 끌어냈다. 안씨 자손들은 68명의 노비를 원한 것이기보다 선조의 억울함을 공식화하고 역사적 평가를 받고자 한 것이다.

소장이 접수되던 날 가족 대표로 법정에 선 송익필은 소멸시효 등의 국법을 거론하며 조목조목 변론을 한다. 8, 9세에 이미 천재로 소문나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지식을 꿰뚫고 있는 그가 행한 변론은 얼마나 화려했을까. 그런데도 재판관은 “순리를 거역한다(理順拒逆)”며 56세의 ‘대학자’에게 곤장을 매우 쳐서 내보낸다.(‘안가노안·安家奴案’)

“순리에 어긋난다” 곤장 맞은 대학자

조선시대 노예에서 해방됐음을 증명하는 속량문기.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재판관의 입에서 법리가 아닌 순리가 나온 것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피해자 가족에게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원수로 삼아 공격하는 송익필을 제대로 본 것이다. 곤장을 맞고 내쳐진 그는 6개월간의 법정에 몸을 드러내는 대신 막후에서 소송을 지휘한다. 서인 측에서 제갈량이라 부르는 그를 동인 측에서는 모사꾼이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환천(還賤) 명단이 나오자 도망가는 송가 사람들. “우리는 군부(君父)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다. 법을 잘못 적용한 사람에게서 도피하여 숨은 것이다. 원수를 피해 숨어서 보전하는 것은 천명에 부합하고, 잘못된 명령에 따르는 것은 천명에 부합하지 않는다.”(『구봉집』 3, 답인설·答人說)

천명(天命)이라는 당대 학술의 최고 개념을 자기변명의 수단으로 삼은 송익필, “그의 처신이나 행적을 보면 재주나 기예는 월등하지만 학문은 그저 고담준론을 늘어놓는 데 불과하다”(『택당별집』 15)는 당대의 평가에 수긍이 간다. 변명으로 일관할 게 아니라 부친의 악업에 엎드려 사죄하고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면 송익필과 그의 학문은 빛나는 업적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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