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대의 은퇴일기⑳] 겨울 출사 여행…함백산에서 눈 속에 핀 벚꽃을 보다

데스크 2023. 2. 28.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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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동호회 회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인다. 수업은 교실에서 하고 출사는 서울 시내 고궁이나 한옥마을로 가든지 이따금 사진 전시회를 관람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강원도 청령포와 함백산으로 떠났다.


2월 중순이지만 얼굴에 스치는 바람에 봄기운이 느껴진다. 영등포에서 출발한 리무진 버스는 서울역을 거처 잠실에서 마지막으로 손님을 태운다. 다른 일행도 몇 명 탔지만 대부분 우리 식구다.


사정이 있어 함께 가지 못하는 회원이 잠실 버스정류장까지 배웅 나와 맛있는 한라봉을 주고 갔다. 회장은 바나나를 챙겨와 회원들의 입을 즐겁게 한다. 이런 관심이 사진동호회가 10여 년 이상 끈끈한 정을 나누며 유지되는 비결일 것이다.


청령포 뒷산을 벌거벗은 체 서 있는 나무들ⓒ

버스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가이드는 따끈한 떡을 하나씩 나누어준다. 아침을 먹지 않아서인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꿀맛이다. 입가심으로 먹은 한라봉과 바나나는 따뜻한 마음씨가 녹아있어 더욱 맛있다. 일찍 나오느라 잠을 설친데다 떡과 후식까지 먹어 피곤이 몰려오는지 대부분은 차창 커튼을 내리고 의자에 푹 파묻혀 꿈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침 해는 우리를 따라온다. 창문으로 들여다보며 그만 자고 일어나라고 보챈다.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는 흰 눈이 소복하다. 사진에 담고 싶은데 함백산에도 눈이 쌓여 있을까? 카메라에 멋진 사진을 담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며 달려간다.


청령포 수림지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49호인 관음송ⓒ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에 닿았다. 20m 정도의 짧은 거리를 나룻배로 가야 한다. 동, 남, 북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서쪽은 육육봉이라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마치 섬 같은 곳이다. 어린 왕의 애달픔 때문인가 저 멀리 능선에 앙상한 가지만 걸친 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4면이 강과 절벽으로 둘러 쌓인 국가지정 명승 제50호인 청령포(홍덕희 제공)

소나무에 소복이 쌓인 눈이 바람에 흩날리는 풍경이 일품인데, 푸른 소나무밖에 볼 수 없어 아쉽다. 단종 어소에는 곤룡포만 외로이 걸려있다. 임금이 걸쳐 앉아 쉬었다는 관음송은 600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여러 개의 쇠말뚝에 의지한 채 비스듬히 서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슬픈 사연과 덧없는 세월을 사진에 담고자 애만 태우고 있다.


단종 어소에 걸려있는 곤룡포

어린 나이에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 와 사약을 받은 후 강가에 버려진 죽음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영월의 하급관리인 호장 엄홍도는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입는다면 달게 받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시신을 자신의 선산에 암장 후 가족과 함께 사라졌다. 얼마나 가슴 조이고 긴박한 상황이었을까. 목숨을 걸고 행한 의로운 일로 영조 때에는 정려각을 세워 충신으로, 순조 때에는 공조판서로, 고종 때에는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늦었지만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정자각과 그 뒤로 보이는 장릉


그의 충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장릉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능 앞의 소나무도 왕을 향해 경배하듯 줄지어 서 있다. 장릉에는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묘역 주위 장판옥에는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 바친 268명 충신의 합동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임금과 신하의 위패가 한 지역에 모셔진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피비린내를 흩뿌리며 산화했을 신하들의 억울한 모습이 그려진다. 고귀한 죽음 앞에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영월에서 민둥산역까지 타고간 무궁화 열차

영월에서 기차를 타고 민둥산역에서 내렸다. 멀지 않는 거리지만 오랜만에 무궁화호 열차를 타자 대학 시절 친구들과 열차에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르던 때가 생각난다.


백두대간 중심에 있는 함백산 만항재는 영월과 태백, 정선군이 만나는 곳으로 국내에서 가장 높은 해발 1330m 도로이다.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산길로 접어들자 고대하던 눈이 조금 흩날린다. 중간쯤 올라가자 눈이 소복이 쌓여 있고 귀가 먹먹해진다. 위로 가자 여성 회원들의 환호성이 커진다. 핸드폰으로 사진 촬영하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만항재에 오르니 상고대까지 활짝 피었다.


함백산 만항재에 눈덥인 풍경

아이젠을 끼고 눈 쌓인 산길로 다니며 카메라 셔터를 정신없이 눌렀다. 길이 아닌 곳에 들어갔더니 정강이까지 푹 빠진다. 온산이 눈과 상고대로 뒤덮여 있어 무엇을 촬영해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다. 상고대가 하얗게 핀 것을 보자 눈 속에 핀 벚꽃 같다. 아직 벚꽃이 피려면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할 텐데 산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벚꽃을 보다니 천운이 따랐나 보다.


함백산 만항재에서 벚꽃을 닮은 나무에 핀 상고대


가이드도 날짜를 잘 잡아서 왔다며 이런 날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기회라고 한다. 개별적으로 왔다면 먼 길을 운전하느라 힘이 들 텐데 버스를 이용했더니 가격도 저렴하고 편안하게 오갈 수 있어 좋다. 회원들도 가끔 버스를 이용하여 출사 다니자고 한다.


함백산 만항재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 동호회 일동ⓒ

동호회원들과 오랜만에 떠난 출사는 그동안 코로나로 갇혀 있던 가슴을 후련하게 뚫어주는 청량제가 되었다.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의 시신을 안장한 충성스러운 신하의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입는다면 달게 받겠다”라는 결연한 의지가 가슴 깊이 다가왔다. 함백산 만항재의 상고대와 눈 속에 핀 화사한 꽃을 사진에 담을 수 있어 횡재한 기분이다. 그 모습은 오랫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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