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접기 시작 전에 목욕까지 하는 이유가 있다
아무도 부러워 하지 않지만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는 '어른의 종이접기'. <기자말>
[최새롬 기자]
▲ 오르는 거북이 |
ⓒ 최새롬 |
귤을 5개씩 판다면 살 때마다 서운하고 라면을 한 박스씩 사야 한다면, 아무리 라면을 좋아해도 크게 기쁘지 않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마음도 살핀 값이 묶음의 정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접기용 종이는 왜 500장일까(20~30매의 미술 공작용 종이는 과감하게 제외하자). 최소 100장 단위 묶음으로 선보이는 종이의 세계. 종이를 사는 일이 거의 없는 세상, 어쩌다 종이를 사게 된다면 한 번에 왕창 가져가도록 하는 전략인가. 손을 놀게 두면 큰일이 나는 세상에서 손을 놀게 하는 일을 근근이 이어가 보려는 기획자의 마음일까.
지금까지 수백 장을 접었지만(?) 아직도 수백 장(!)이 기세등등하게 남아 있다. 아마 종이가 50매들이였다면 종이접기는 일찍 끝나버렸을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저 많이 접힌 채로 말이다. 이 거대한 숫자의 의미는 접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종이 한 장 드는 일의 어려움
처음 종이접기를 시작했을 때는 도장을 깨듯 매일 접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단 '종이를 접어야지'라는 마음을 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냥 접으면 되는 거 아니야?' 나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세상사에 문제 될 일은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종이를 접기도 전에 만나게 된 어려움은 내가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데 있었다. 그건 차원의 문처럼 가끔만 열렸다. 만족스러운 오늘과 걱정되지 않는 내일이 예상될 때, 그 사이에만 말이다. 그러지 않고 만지는 종이는 정말로 무거웠다. 전혀 상관없는 절차도 필요했다.
이를테면 목욕 같은 것. 종이를 만지려면 몸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목욕까지 끝마칠 정도로 주변의 모든 일과를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1. 할 일은 다 하고 접는 건가, 2. 왜 접는가, 3. 접어서 뭐 할 건가. 어떤 쓸모도 증명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목욕까지 하게 된다.
▲ 공룡과 거북이 |
ⓒ 최새롬 |
그러나 일단 잡기만 하면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게 접기의 매력이다. 정사각형 종이로 처음에 접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두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1)직사각형으로 접거나 2)직각삼각형으로 접기.
1시간이 넘게 걸리는 전갈을 접거나, 5분도 채 안 걸리는 종이배를 접어도 시작이 같다는 사실은 인생을 은유한다. 쉬운 접기나 어려운 접기도 출발선상이 같다는 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어려운 접기도 한 걸음부터라거나, 누구나 굉장한 것을 접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거나. 이 평범하고 쉬운 시작은 모든 초심자에게 용기를 준다.
▲ 누워있는 말 |
ⓒ 최새롬 |
▲ 마침내 완성한 말 |
ⓒ 최새롬 |
영상을 몇 번 돌려보아도 못 접는 사태가 일어난다. 접기는 사실 많은 실패를 가져온다. 다양한 예가 있지만,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패는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접어들 때 생긴다.
어째서 평면에 깊이가 생기고 마침내 일어서게 되는지, 이제껏 예쁘게 잘 접어오다가 석연치 않게 종이를 뒤집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2차원을 3차원으로 만들 때, 머리는 믿지 못하고 눈은 놀라며 손은 용기 내지 못한다. 종이접기를 개발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에게 닥친 이 진정한 변화는, 믿음의 영역이다. 미심쩍어하는 눈과 머리를 물리치고 끝내 손이 수행해야 한다는 점도 모두 의미심장하다.
종이가 500매나 되는 것은 앞으로 있을 실패를 넉넉히 잡아 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얇고 쉽게 구겨지고 찢어지는 종이를 끝까지 쌩쌩하게 다루면서 면을 주는 일은 쉽지 않다. 날렵하게 각을 세우고, 지금까지 접은 걸 다시 다 펼치고, 뒤집고 하는 동안에 종이접기는 실패한다.
수백 장쯤 접으니 실패가 하도 많아서 다 기억할 수 없는데, 이상한 것은 잘 완성해낸 접기도 많아서 그 많은 낙오를 다 잊게 된다는 것이다. 아득한 횟수의 시작이어야 수없이 실패하고 하나쯤은 잘 접어낼 수도 있다는 얘기일까? 500개, 이 '하나'를 위한 엄청나게 많고 고마운 시작의 수.
이 숫자와 비슷하게 매년 도착하는 것을 이제야 떠올린다. 2023년과 함께 날아들어 온 365개의 날씨. 이렇게나 많은 숫자로 1년을 셈하는 것은 걱정하지 말고 매일을 시작하라는 경험의 숫자가 아닐까.
해가 지는 걸 기다리고, 조금은 막막하게 다음 해를 기다렸을 옛날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늘, 종이 한 장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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