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과 순정 사이, 대제국 역사 바꾼 '환승연애'

이준목 2023. 1. 2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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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백거이의 '장한가'에는 "사랑하는 우리 둘이 만난다면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했지, 천장지구 영원하여도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겠지만, 우리의 한은 영원하여 끝날 날이 없으리"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세기의 사랑으로 꼽히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애틋한 로맨스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양귀비(楊貴妃)는 중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중 한 명이자 미인의 대명사로도 꼽힌다. 비극적인 로맨스의 히로인에서 거대한 제국을 망친 요부에 이르기까지, 누구보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야했던 양귀비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극과 극을 달린다. 과연 그녀는 희대의 악녀인가, 아니면 시대의 희생양이었을까.

지난 24일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 83회에서는 '양귀비, 당제국을 몰락시킨 금단의 사랑' 편을 통해 양귀비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중국사 전문가인 이성원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양귀비의 이야기는 한 나라의 황금기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당(唐, 618~ 907) 제국은 중국 역사상 몽골-청나라와 함께 가장 강력했던 대제국이다. 거대한 영토와 강력한 문화를 꽃피우며 전성기에는 동아시아 문화를 확산하고 개방적이면서 국제적인 세계제국으로 번영했다.

이러한 당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 6대 황제 현종(玄宗, 재위 712-756) 이융기(李隆基) 였다. 현종은 즉위 초기 균전제, 부병제 등 개혁적인 국가정책으로 당나라의 태평성세를 이끌었다. 군주로서의 자의식과 애민정신이 강했던 초기의 현종은 "짐이 힘들어 살이 빠지더라도 그로 인하여 천하가 살찌울 수 있다면 좋지 않겠소?(신당서 한휴열전)"라고 이야기한 기록이 있을 만큼 근면하고 책임감 있는 명군이었다. 44년에 이르는 현종 치세의 전반기는 개원지치(開元之治)라고 부를 만큼, 당 제국의 최고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현종 즉위 7년인 719년, 중국 쓰촨성의 한 마을에서 양귀비가 태어난다. 그녀는 날 때부터 팔에 옥고리 모양의 문양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로 인해 아명이 양옥환(楊玉環)으로 불렸다고 한다. 양귀비의 정확한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귀비(貴妃)는 이름이 아닌 후궁 시절의 서열을 의미하는 직함이다.

당나라 시절 산문집인 '전당문'에 따르면 양귀비는 어머니의 몸속에서 12개월 만에 태어났고, 그녀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방에 향기가 감돌았으며 탯줄은 연꽃과도 같았다고 한다. '피부는 백옥과 같고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용모였다'는 묘사를 통해 탄생설화부터 그녀의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양귀비의 어린 시절은 평탄하지 않았다. 10세의 나이에 부모를 일찍 여의고 먼 친척이자 낙양의 하급관리이던 양현교의 수양딸로 들어가게 된다. 양귀비는 16세이던 735년, 현종의 제18황자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눈에 띄어 비(妃)로 발탁되었다. 현종에게는 며느리가 된 셈이었다.

일개 하급관리의 수양딸로 신분차이가 커던 양귀비는 어떻게 왕족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을까. 일설에 따르면 양귀비는 어린 시절부터 미모로 유명했고, 수왕의 누이였던 공주와의 친분이 생겨 결혼식에 참석했던 양귀비에게 한 살 연하의 수왕이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황실가에서 인정했을 만큼 양귀비가 당대 기준으로 고귀한 미모를 지녔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대에 여러 문헌에서 양귀비의 미모를 극찬하는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양귀비를 가리켜 수화(羞花)라 했는데, 부끄러울 수(羞)자를 써서 아름다운 꽃도 그녀의 미모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는 뜻이다. 또한 백거이의 시 '장한가'에서는 '눈웃음 한 번에 온갖 교태가 나와 단장한 궁궐의 미녀들이 낯빛을 잃었다'는 문구가 나온다.

현재 양귀비의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의 유물과 문화를 통해 그의 미모를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당나라 시절의 미인을 묘사한 도기를 보면 통통한 얼굴과 풍만한 몸매, 새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 등이 두드러진다. 사가들이 추정하는 양귀비의 신체조건은 신장 155에서 165cm 사이, 체중은 68kg에서 80kg 내외라는 설이 유력하며 요즘과는 미적 기준이 많이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풍만한 몸은 부유한 귀족의 상징이었고, 황제와 황족들이 사랑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당대 미녀의 기준을 좌우하는 트렌드가 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양귀비가 황가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단순히 미모만이 아니었다. 양귀비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노래와 춤, 비파와 공후같은 악기 연주 등에 두루 능했고, 특히 당나라 시대에 유행하던 호선무(胡旋舞)는 그녀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양귀비는 수왕과 5년에 걸친 결혼생활을 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역사에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훗날 아들의 여자인 양귀비를 자신의 비로 맞아들인 현종이 부끄러운 불륜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기록을 삭제·은폐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736년, 수왕의 친모이자 양귀비의 시어머니인 무혜비가 세상을 떠난다. 총애하던 무혜비를 잃은 현종은 큰 상심에 빠졌다. 신하들은 무혜비의 빈 자리를 대신할 여인을 찾기 위해 분주했다. 화조사라는 관리들이 파견되어 신분의 귀천과 결혼 유무도 가리지 않고 여성을 찾아내 현종에게 바치는 막장 행태가 벌어지면서 민심은 흉흉해진다. 하지만 현종은 외모뿐만 아니라 교양과 예술적 조예가 높은 여성을 선호했기에 황제의 눈높이를 충족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현종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양귀비였다. 자신의 며느리, 그것도 가장 총애하던 후궁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아내를 탐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이던 용납될 수 없는 반인륜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이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제국의 황제에게 불가능한 일이란 없었다.

현종은 온천궁에서 연회를 열고 양귀비를 불러들이니 이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아들이 그러했듯이 현종 역시 양귀비에게 첫 눈에 반했다. 당시 현종의 나이 55세, 양귀비는 21세였다.

양귀비는 34살 차이가 나는 시아버지의 여인이 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신당서'에 따르면 양귀비는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나서 황제의 뜻을 잘 헤아렸다'고 우회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시어머니 무혜비의 죽음으로 후계서열에서 밀려나며 권력에서 소외된 남편 수왕보다는, 최고 권력자인 현종 옆에 있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데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졸지에 아내를 아버지에게 뺏긴 수왕의 대응 역시 걸작이었다. 수왕은 아내를 주는 조건으로 아버지 현종에게 태자 자리를 요구하는가 하면, 양귀비가 떠난 이후 위소훈의 딸을 아내로 받아들여 재혼까지 했다.

하지만 천하의 현종도 양귀비를 바로 맞아들이는 데는 세상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도교를 열렬히 숭배했던 현종은 양귀비를 궁밖의 도교 사원으로 보내 '태진'이라는 도교식 이름을 내리고 잠시 여자 도사로 귀의시키는 꼼수를 썼다. 도교의 신선사상에 따라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며느리였던 사실을 지우는 일종의 신분세탁이었다.

744년, 환갑을 앞둔 59세의 현종은 마침내 25세의 양귀비를 궁궐로 불러들인다. 이미 입궐 당시부터 황후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던 양귀비는 이듬해인 745년에는 후궁중 최고 품계인 귀비에 책봉된다. 당시 황후의 부재로 안주인이 없던 궁궐에서, 양귀비를 전체 121명에 이르는 모든 후궁들의 품계를 모조리 건너뛰고 단숨에 가장 높은 자리에 올린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야사에는 양귀비가 겨드랑이 냄새가 심해 옆에 있는 궁녀가 코를 막고 구역질을 할 정도였다는 말도 있다. 양귀비는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온천에서 매일 목욕을 즐겼다. 당 황실의 전용 휴양 온천인 화청지에는 양귀비만을 위한 전용 욕탕인 해당탕까지 있었다고. 그런데 정작 현종에게는 만성 축농증이라는 고질병이 있어서 양귀비의 냄새를 잘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현종과 양귀비의 불같은 사랑은 정작 당 제국에 있어서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현종은 양귀비에 흠쩍 빠져 애정행각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자연히 정무에는 점점 소홀해졌다.

현종과 양귀비는 서로 질투와 집착이 심했다. 매비라는 새로운 후궁이 총애를 받게되자 이를 두고 현종과 자주 다툼을 벌였다. 또한 음악에 관심이 많던 양귀비가 현종의 형제가 불던 옥피리를 받아 연주한 일을 계기로 현종의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다. 양귀비는 두 번이나 황궁에서 쫓겨나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자신을 향한 현종의 마음을 이용해 고비를 벗어났다.

양귀비는 현종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머리카락을 함께 보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메시지와 함께 극단적 선택을 암시했고, 이에 놀라면서도 감동한 현종은 그녀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인다. 요즘으로 치면 양귀비가 연애고수이자 밀당의 귀재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종은 양귀비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고, 당 제국은 양귀비의 온갖 사치스러운 생활을 충족하기 위해 엄청난 국고와 인력을 소진해야했다. 양귀비는 현종의 총애를 유지하려 미모 관리에 공을 들이느라 많은 비용을 소모했다. 또한 양귀비가 유난히 좋아했다는 열대과일 리치를 남부인 광동에서 신선한 상태로 수송하느라 전시 상황처럼 말과 기수를 교체해가며 배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녀의 일가친척들도 부귀영화를 누렸다. 양귀비를 키워준 친척들은 높은 벼슬을 하사받았고, 양귀비의 세 자매는 황족과 혼인, 국부인이라는 애칭을 하사받으며 양귀비 못지않은 특혜와 사치를 누렸다. 양귀비의 6촌오빠 양조는 현종의 총애를 얻어 양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재상의 반열까지 올랐다. 이처럼 양귀비를 등에 업고 강력한 권력을 얻게된 양귀비 일가의 집앞에는 뇌물을 바치러온 사람들도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고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됐다.

흔들리던 당 제국에 치명타가 된 것은 안록산(703-757)의 등장이었다. 이란과 돌궐계 이민족 출신으로 붉은 머리와 파란 눈의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안록산은 지방의 군사를 통솔하는 직책인 절도사였다. 당 제국의 영역이 넓어지며 지방군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절도사의 영향력은 막대해졌고 황실도 통제하기 힘든 권력자로 부상한다. 안록산은 당시 당 제국 동북변경의 군사력을 모두 장악한 상태였다.

안록산은 무장이었지만 언변이 뛰어나고 아첨에 능했다. 현종과 양귀비는 안록산의 독특한 외모와 입담에 푹 빠져 그를 총애했다. 또한 춤에 능했던 안록산은 거구의 남자임에도 양귀비의 주특기였던 호선무를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안록산은 자신보다 16살이나 어린 양귀비앞에서 재주를 부리고 재롱을 떠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746년, 북쪽의 거란을 완파하는 공을 세우고 장안에 입성한 안록산은 조카뻘인 양귀비의 양아들이 된다. 심지어 양귀비는 양아들을 얻은 기념으로 중국 전통의식에 따라 중년의 거구인 안록산에게 아기들에게 하듯이 직접 목욕까지 시켜줬다고. 황궁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안록산이 양귀비의 처소에서 밤늦게까지 오랜 시간을 보내며 수상한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권신이 된 양국충과 안록산은 현종-양귀비의 총애를 얻기 위한 충성 경쟁을 펼쳤고 무리한 전쟁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며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간신들의 전횡, 참혹한 전쟁, 대기근까지 겹치며 당 제국은 현종 전반기의 성세를 잃고 차츰 황폐해져 갔다. 그리고 그 고통은 오롯이 힘없는 백성들의 몫이었다. 제국이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음에도 현종은 외척과 간신들에게 조정을 맡긴채 매일 양귀비와 향락을 즐기는데만 빠져있었다.

양국충과 안록산의 끝없는 권력투쟁은 결국 755년, '안록산의 반란'이라는 파국으로 이어진다. 양국충의 견제로 위기의식을 느낀 안록산은 나라를 망치는 간신들을 없애자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당시 당 제국 병력의 1/3을 장악한 안록산의 군대는 불과 한 달 만에 수도 장안까지 육박해왔다. 현종과 양귀비는 반란군을 피해 도성을 떠나 사천으로 고단한 피난길에 올라야했다.

양귀비 일가의 폭정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이미 하늘을 찔렀던 근왕군 병사들은, 피난길 도중에 반기를 드는 사태가 벌어진다. 양국충 부자를 비롯해 양귀비의 세 자매는 병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된다. 병사들은 이어 현종에게 몰려가 '나라를 망친 양귀비를 직접 처단하라'고 압박한다. 더이상 양귀비를 구할 힘이 없었던 현종은 대답 대신 눈물만 흘렸다. 환관 고력사가 현종 대신 양귀비를 인근 불당으로 데려갔고, 결국 현실을 받아들인 양귀비는 스소로 비단으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 756년, 당시 양귀비의 나이 37세였다.

충격을 받은 현종은 이후 아들 숙종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안록산의 난이 진압된 후에 장안으로 돌아온 현종이 양귀비의 무덤을 몰래 파냈다는 야사도 전한다. 의욕을 잃은 현종은 매일 양귀비를 그리워하며 눈물로서 여생을 보내다가 762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았을 지언정, 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사랑 만큼은 진심이었을까. 그리고 당 제국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점점 쇠퇴하게 된다.

양귀비는 흔히 당 제국 몰락의 방아쇠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한 사람만의 탓일 수 있을까. 양귀비는 당 제국의 정점에서 피어난 꽃이었고, 격동의 역사 속에서 희생양을 찾아야했던 이들에게 더 극적으로 과장하기 좋은 소재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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