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서 김장, 남극 얼음 팥빙수...'남·북극 셰프' 된 국숫집 주인

김선미 2023. 1. 2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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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극 연구팀과 동행해 요리를 해온 정만(57)씨가 18일 오후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정씨는 극지에서 실제로 착용하는 팀 '아틱'의 옷과 앞치마를 입고 포즈를 취했다. 김경록 기자


2010년 개봉한 일본 영화 ‘남극의 쉐프’(감독 오키타 슈이치)에서 요리사 니시무라(배우 사카이 마사토)는 강추위와 외로움을 견디며 일하는 남극 연구대원들을 요리로 위로한다. 극한의 땅에 장기간 고립된 그들에게 일과를 마친 후 따뜻한 저녁 식사는 거의 유일한 낙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니시무라처럼 우리나라 극지연구팀을 위해 식탁을 차려온 이가 있다. 2011년부터 총 9차례 극지연구소 남·북극 연구대와 동행한 정만(57) 씨다. 최근 10년동안 셰프 역할로는 최다 출정한 인물이다. 오는 7월 말에도 북극행을 앞둔 그를 지난 18일 만났다.

지난 2015년 남극을 찾은 정씨의 모습. 그는 남극과 북극에 총 9차례 다녀왔다. 사진 정만


국숫집을 운영하는 정씨는 극지로 출발하기 일주일 전부터 음식을 준비한다. 남극에선 식자재 수급이 불가능한 데다 조리 도구도 부족해 전체 식량의 80% 정도를 미리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정씨는 밤에 가게를 닫고 음식을 조리한 뒤 냉동고에서 급랭시킨다. 무게가 150~200㎏에 이르는 이 음식들은 60㎏의 아이스박스에 나눠 담긴 뒤 밀봉돼 비행기로 극지까지 간다. 비행 고도가 높아 운반 중에도 잘 녹지 않는다고 한다. 정씨는 “갈비찜·닭볶음탕·김치찌개 등 들어가는 재료가 다양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주로 미리 얼려간다”고 말했다.

식사부터 간식까지 그가 현지에서 만드는 음식 가짓수도 50여 개에 달한다. 그중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음식은 김치다. 평균 기온이 섭씨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남극에선 불가능하지만, 평균 영하 5도로 비교적 덜 추운 북극에선 김장도 가능하다. 경유지인 아이슬란드나 노르웨이에서 배·무 등 식자재를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씨는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소금에 절이는 작업을 해 그린란드 등 북극권까지 가서 김장을 하는 식”이라며“아이슬란드 배추 한국보다 작지만 고소한 맛이 있다”고 말했다.


정씨가 처음 연구대에 합류한 건 지난 2011년, 극지연구소 남극대륙 탐사대와 함께하면서다. 이후 남극에 두 차례, 북극에 7차례 다녀왔다. 짧게는 3주, 길게는 두 달 동안 최대 15명의 삼시 세끼를 챙겼다. 정씨는 “제약이 많은 공간에 머물기 때문에 관계가 단단한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며 “음식으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하고 모두 힘을 내도록 돕는 게 제 역할”이라고 말했다. 2011년 남극 기지 앞에서 퍼온 얼음과 삶은 팥으로 만들어 먹은 팥빙수는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음식의 힘은 실로 컸다. 정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2018년 북극에서의 날을 떠올렸다. 연구 일정이 끝나고 철수 준비까지 마쳤는데 기상이 악화해 비행기가 뜰 수 없었다. 이틀간 고립되면서 모두 조금씩 지쳐갔다고 한다.

지난해 북극 연구팀과 동행했을 때 정씨가 키조개 무국, 삼치 조림 등으로 차린 밥상. 사진 정만


“남은 식재료가 다양하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그때 레몬차 티백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걸로 탕수육 소스를 만들 수 있겠단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돼지고기 조금 남은 것과 밀가루를 가지고 뚝딱 만들었죠. 한 박사님이 ‘기대도 못 했던 음식을 먹으니 스트레스가 다 풀린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뿌듯한 기억이에요.”
극지에서 정씨의 철칙 중 하나는 ‘웬만하면 라면을 먹이지 않는 것’이다. 비상식량으로 라면을 챙겨가긴 하지만, 되도록 손수 만든 음식을 먹인다고 한다. 직접 면을 반죽하고 뽑아 짜장면·초계국수·칼국수 등을 만든다. 간식도 최대한 직접 만드는데, 덴마크 등 해외 연구원과 일할 땐 핫도그·샌드위치 등 서양식으로 준비한다.

제한된 인원으로 꾸려야 하는 극지연구팀의 특성 때문에 정씨는 요리사뿐 아니라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한다. 기계가 고장 나면 엔지니어로, 암벽 등반을 해야 할 땐 안전요원 역할을 한다. 정씨는 히말라야를 3차례 등반했을 정도로 산을 잘 타는 데다, 기계 손질도 곧잘 한다. 그가 연구팀과 동행하는 데 적격인 이유다.

지난 2020년 정만씨가 꾸린 팀 '아틱'이 충북 괴산의 폭포에서 빙벽 등반을 하며 훈련하는 모습. 사진 정만


그는 4년 전 응급처치 전문 강사, 프리 다이빙 마스터 등의 자격을 갖춘 전문 산악인들과 팀 ‘아틱(Arctic)’을 꾸렸다. 2019·2021·2022년 세 차례 극지연구소와 용역을 맺고 북극연구팀에 동행했다. 오는 7월 말에도 북극에 가는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크레바스에 빠지거나 암벽 등반 중 떨어지는 등 위험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시뮬레이션식 훈련을 하고 있다. 정씨는 “북극에선 늑대나 사향소 같은 야생동물을 만날 때를 대비해 총을 지니고 다녀야 한다”며 “이 때문에 최근엔 사격 연습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기적으로 극지를 찾는 그는 기후 변화를 체감한다고 한다. 처음엔 북극에서 보지 못했던 모기가 언제부턴가 기승을 부리고, 얼어있던 동토층이 녹아 조금씩 드러난다는 것이다.

“제가 전문적으로 연구를 하는 게 아닌데도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예요. 우리 아이들이 살 세상을 위해 극지 연구를 돕는 제 역할을 다하려고 합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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