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경기'는 어떻게 스포츠를 제패했나? [수산봉수 제주살이]

이봉수 2022. 12. 2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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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봉수 제주살이] 축구에 끼어든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기자말>

[이봉수 기자]

월드컵축구 결승전이 벌어지기 전 날 한미리스쿨에서 키아오라리조트 투숙객들에게 '문장, 엠블럼, 아이콘으로 본 유럽사와 축구 이야기'를 강연했다. MBC저널리즘스쿨에서 3시간 강연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최종병기: 문장(紋章), 엠블럼, 아이콘의 기호학' 파워포인트(PPT)를 중학생에게 맞게 절반으로 줄여 축구 이야기에 집중한 것이다. 중학생으로서는 마지막 시험을 치른 제주시 모 중학교 3학년 남학생 9명이 투숙했는데, 공부의 중압감을 잠시 내려놓은 청소년을 위한 선물이었다.

미성년자는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숙박할 수 있는데 부모들이 숙박료 결제는 물론 키아오라리조트까지 차를 태워주었다. 학생들은 원래 함덕 해변에 텐트를 치고 놀 작정이어서 침낭과 핫팩까지 잔뜩 챙겨왔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드물게 추운 날씨에 눈까지 쌓여 긴급히 리조트를 찾아온 거였다.

'왕실 문장'을 알면 유럽여행이 즐겁다

왕실과 귀족 가문의 문장을 알고 유럽을 여행하면 박물관이나 미술관마다 걸려있는 그림과 직물로 짠 걸개그림인 태피스트리 등을 읽어내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스·로마의 신과 기독교 성인들의 아이콘을 알면, 고대의 조각, 성당의 파사드와 스테인드글라스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그것들은 고대와 중세 사회를 읽는 기호이고, 대중이 라틴어를 모르던 시절의 '그림책 성경'이며 '교회 사용설명서'이다.  

하나만 예를 들면, 아래 기록화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초기 크레시 전투의 양상을 보여준다. 왼쪽은 깃발에 프랑스 왕실을 상징하는 백합이 그려진 걸로 보아 프랑스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른쪽 영국군의 깃발에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사자 세 마리와 함께 프랑스 왕실의 백합이 그려진 이유가 뭘까?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이 동원한 제노바 용병들은 석궁을 제대로 쏴 보지도 못한 채 영국군의 화살을 맞고 달아나기에 바쁘다.
ⓒ 지식백과
원래 프랑스 북서쪽 노르망디를 지배하던 윌리엄1세는 영국을 점령하고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나중에 에드워드3세는 프랑스 국왕인 샤를 4세가 후손 없이 죽자 생질인 자기에게 왕위계승권이 있다며 고토 회복을 내세우고 프랑스로 쳐들어간다. 백년전쟁의 시작이었다.

포로의 손가락 두 개를 자른 이유

프랑스군의 석궁은 강력한 무기였으나, 사람 키만한 영국군의 큰 활을 대적할 수 없었다. 그 활은 발사속도가 빠르고 사정거리가 훨씬 길었기 때문이다. 기록화를 자세히 보면 영국왕 에드워드3세는 군대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반면 프랑스군 지휘부는 뒷전에 있다가 성으로 달아나고 있다. 승패의 원인과 결과가 뻔해 보인다.

'승리'(Victory)를 상징하는 손가락 표시 'V'도 활에서 비롯됐다는 일설이 있다. 우리 '동이족'처럼 큰 활을 쏘는 영국군을 포로로 잡으면 다시는 활을 못 쏘게 하려고 시위를 당기는 둘째·셋째 손가락을 잘랐다고 한다. 전쟁에서 돌아올 때 멀쩡한 두 손가락을 펴 보이면 승전했다는 뜻이 됐다는 거다. 스포츠 종목은 대개 싸움과 전쟁의 수단으로 발달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들이 2022년 12월 18일 키아오라리조트 카페에서 '문장, 엠블럼, 아이콘으로 본 유럽사와 축구 이야기' 강연을 듣고 있다.
ⓒ 이봉수
 
발의 투박함과 뜻밖의 승패

다시 축구 얘기로 돌아가서, 이 주제로 강연할 때 흔히 듣는 질문이 "축구가 어떻게 스포츠를 제패했느냐"는 것이다. 몇 년 전 K리그 초청으로 각 구단의 홍보관계자들에게 강연할 때도 같은 주제를 화두로 삼았다. K리그는 아직 그렇지 못하지만 유럽에서는 축구의 인기가 다른 종목을 압도한다. 월드컵 축구는 전종목이 겨루는 올림픽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린다.

사실 발은 투박함의 상징이다. 두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인류가 직립하면서 뒷다리는 체중을 감당해야 했기에 튼튼하고 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수습기자 시절 많이 들은 욕도 "넌 기사를 발로 썼냐"거나 "개발새발 썼다"는 거였다. 그 대신 '손'은 정교함의 상징이다. '수제화'는 잘 만든 고급 구두이고, '손칼국수'와 '수타짜장면' '손맛' '손수' 같은 말에도 손의 우월성이 내포돼 있다.

그러나 발의 투박함이 오히려 축구를 최고 인기 종목으로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교한 손을 쓰고 득점이 많은 다른 구기 종목들은 이변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축구는 우리가 독일과 포르투갈을 이기는 등 의외성이 강해 관전의 묘미가 크다.

스페인 선수들은 왜 국가를 부르지 않을까

축구를 인기 종목으로 만든 핵심 동력은 민족주의라고 생각한다. 이번 월드컵 8강전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맞붙은 것을 언론이 '백년전쟁'이라 표현하고, 한일전과 스페인의 엘클라시코가 전쟁처럼 치열한 것도 실제 전쟁을 치른 '민족의 앙숙'이기 때문이다. '적 만들기'(Enemy-making)는 정치권력이 실권 위기를 돌파하고 경제권력이 자본을 부풀리는 수단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민족 갈등은 심각하다. 특히 FC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 지방은 레알마드리드가 있는 카스티야 지방과 역사·언어는 물론 즐기는 음식과 노래까지 상당히 다르다. 카스티야 지방의 전통 식빵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카스테라'라는 일본식 이름이 붙었다.

피해의식이 강한 카탈루냐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 중에는 '남을 업신여기는 카스티야인을 몰아내자, 낫으로 그들을 쳐라, 쳐라' 같은 살벌한 대목도 있다. 스페인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은 국가의 멜로디가 연주돼도 따라 부르지 않고 입을 다문다. 민족·지역간 갈등이 워낙 심해 가사에 합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도 경계한 적대적 민족주의를 부추긴 것은 스포츠인 축구에 끼어든 정치와 자본이었다. 세계 각국은 민족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유의 신화나 상징 동물, 왕실 문장 등을 소재로 월드컵축구팀 엠블럼을 만들었다.
 
 각국의 월드컵팀 엠블럼은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는 게 많다. (가운데 줄 왼쪽부터) 독일 폴란드 러시아 3국은 저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독수리 문장을 채택해 자신이 정통 후예임을 과시한다. 아르헨티나는 이번에 세 번째 우승을 해 별 하나를 더 달게 됐다.
ⓒ 각 국가 축구협회
월드컵 축구팀 엠블럼에서 별은 우승 횟수를 말하는데 잉글랜드는 한 번 우승했으면서도 별 하나를 달지 않아 특이해 보인다. 축구 종주국 치고는 우승 회수가 너무 적기 때문일까? 영국축구협회에는 영국이란 말이 들어있지 않고 그냥 축구협회(The FA)다. 처음에는 영국에서만 축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페인의 아틀레틱 클럽 빌바오는 왜 스페인어 '아틀레티코'(Atletico) 대신 영어 '아틀레틱'(Athletic)을 쓰고 있을까? 이는 바로 영국의 광산노동자들이 광산지대인 빌바오에 가서 처음 축구를 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제노바에 있는 축구클럽이 영어식으로 제노아(Genoa)라 명명하고 'Cricket and Football Club'라고 명시한 것도 영국 선원과 조선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클럽을 처음 조직했기 때문이다. AC Milan도 이탈리아어 '밀라노' 대신 '밀란' 이라는 영어 명칭을 쓴다. 축구팀의 명칭을 보면 축구가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전파됐는지 그 경로를 알 수 있다.
 
 엠블럼으로 본 축구의 전파 경로
ⓒ 유벤투스 등 각 협회 및 구단
유럽 프로축구단 명칭을 보면 주로 어떤 사람들이 축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처럼 구단 이름에 'United'란 단어가 많이 들어간 이유도 처음에는 노동조합들이 축구팀을 결성했기 때문이다. 축구 관전은 누구가 좋아하지만 실제 축구를 하는 계층은 노동자들이었다. 영국의 중류충은 축구 대신 테니스나 크리켓,상류층은 승마나 폴로, 여우사냥을 즐겼다.
우리 제품을 안 사줘서 고맙다고?
 
 ‘Just do it’이란 광고문구를 내걸고 스포츠용품 시장의 최강자가 된 나이키가 영국 축구선수 웨인 루니를 모델로 광고를 만들었다. 이 광고는 십자가를 그려 넣어 기독교 단체들한테 신성모독을 했다는 비난을 샀는데 광고주로서는 노이즈 마케팅에 성공한 셈이다.
ⓒ 나이키 광고
스포츠와 자본을 연결해주는 고리는 광고다. 카타르 국적항공사인 '카타르 에어웨이'(Qatar Airways)는 바르셀로나를 후원하다가 카타르 월드컵을 후원함으로써 엄청난 광고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플라이 에미리트'(Fly Emirates) 역시 막대한 '오일머니'로 아스날 같은 명문팀을 후원해 항공사 인지도를 획기적으로 높였다.

스포츠용품 업계의 광고전은 대단히 치열하다.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대결은 명 광고문구를 만들어냈다. 아디다스는 이번 월드컵에서도 'Impossible is nothing'을 관중석 펜스 자막광고로 계속 흘려보냈는데, 어린 시절 신체 결함까지 극복한 메시 신화와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 문구는 사실 나이키의 'Just do it'에 견주면 소비자의 눈길을 끌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문구가 등장한 뒤 나이키는 스포츠용품 시장 점유율을 1988년 18%에서 10년 만에 48%로 끌어올렸다.

명품 광고문구를 모아온 내가 보기에 가장 기발했던 것은 듀렉스(Durex) 광고였다. 축구 강국도 아닌 그리스가 '유로2004'에서 우승하자 축구 대표팀 부모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Thanks you… for not buying our products!(우리 제품을 사지 않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월드컵 결승전을 앞두고 어느 팀이 우승할 것 같냐는 질문에 "프랑스가 최강팀이지만 승부는 해봐야 안다"고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그렇게 보는 이유 중 하나는 프랑스팀이 선수단 구성에서 가장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축구 우승의 역사는 인종주의 철폐의 역사

'축구 우승의 역사는 인종주의 철폐의 역사'라고 나는 주장한다. 한때 브라질이 세계 최강일 때 펠레는 "브라질 축구 성공은 인종차별을 철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일이 최강일 때 클린스만 감독은 게르만의 순혈주의를 청산했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자양분으로 성장해온 축구에서 인종주의는 민족주의의 왜곡된 형태로 계속 표출된다. 튀르키예 출신인 메수트 외질은 독일 국적을 가졌는데도 "이기면 독일인, 지면 외국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인스 워드와 어머니가 한국에서 인종 차별에 시달리다 못해 이민 갔다가 미식축구의 영웅이 되어 돌아오자 열렬히 환영한 일화가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말해준다.

프랑스는 더 과감하게 인종차별을 철폐했고 결국 축구 최강국이 됐다. 지난번 월드컵에서는 엔트리 23명 중 21명이 이민자 후손이었고 이번에는 25명 중 23명이 그랬다. 독일은 게르만 순혈주의를 청산했다고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혈통에 따라 국적을 부여하는 속인주의를 택하고 있어 한계가 있다. 프랑스는 낳은 장소에 따라 국적이 정해지는 속지주의를 택하고 있다. 실은 아르헨티나도 이민의 나라다. 우승의 주역인 메시와 디마리아 선수, 스칼로니 감독은 모두 이탈리아 이민 후손이다.

프랑스가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여전히 최강팀이라고 생각한다. 결승전은 사실상 비긴 게임인 데다 후반전의 경기 내용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축구 통계 매체 <옵타>가 뽑은 '월드컵 베스트 11'에도 프랑스 선수는 4명이나 포함됐다. 우승국이 2명 포함된 것과 대비된다.

'톨레랑스의 나라'에도 인종주의 고개 들어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측면에서 나름대로 분석기사를 써봤는데, 실은 프랑스 축구의 미래도 장담하지 못하겠다.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에도 다시 인종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팀에서 유색인종을 빼라'고 주장해온 극우 인종차별주의자 르펜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추세가 그 증거다. 소셜미디어(SNS)에는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골을 넣지 못한 두 선수와 슛을 막지 못한 골키퍼 요리스에게 인종차별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정치와 경제를 왜곡할 수 있는 축구

아르헨티나는 브라질과 함께 축구강국이지만 월드컵 같은 메가이벤트와 지나친 축구 붐은 물가폭등과 빈부격차 등 암담한 경제현실을 덮어버리고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키운다. 아르헨티나는 연간 물가상승률이 100%에 육박했다.

브라질은 빈부격차가 가장 큰 나라에 속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브라질 청소년은 '축구로 성공하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80%인데 '공부로 성공하겠다'는 비율이 20%밖에 안 된다. 월드컵은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 상승에도 일부 기여한 듯한데, 그것이 '정치를 잘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질까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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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터넷 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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