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 뒤에 숨은 가슴아픈 한국적 서사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미디어창비, 432쪽, 1만7000원
한국계 이민자 작가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올해 문학 출판에서 주목할만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파친코’의 이민진을 필두로 미셸 자우너(‘H마트에서 울다’), 캐시 박 홍(‘마이너 필링스’), 마야 리 랑그바드(‘나는 화가 난다’), 김주혜(‘작은 땅의 야수들’) 등이 국내에 소개돼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또 한 명이 추가됐다.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 소설가 허주은(영어명 June Hur)이다. 2021년 미국에서 출간돼 호평을 받은 허주은의 미스터리 역사소설 ‘사라진 소녀들의 숲’이 번역돼 나왔다.
“돌과 바람의 섬 제주 어딘가, 역사를 간직한 숲 곶자왈과 봉우리에 구름을 얹은 한라산 사이에서, 우리 아버지가 사라졌다.”
소설은 열여덟 살 소녀 ‘민환이’가 바다를 건너 제주도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조선 최고의 수사관이었던 아버지 민 종사관의 죽음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 가는 중이다. 아버지는 제주도의 한 마을에서 소녀 13명이 실종된 사건을 추적하던 중이었다. 제주도에는 사이가 안 좋은 여동생 ‘민매월’이 살고 있다.
1800년대 조선의 고립된 섬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는 용감한 소녀의 이야기다. 여기에 고려시대 이래 중국 황실에 어린 소녀들을 공물로 바치던 공녀 제도가 겹쳐진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소설의 아이디어는 고려 시대 학자였던 이곡이 공녀 제도에 대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쓴 편지에서 착안했습니다”라고 밝혔다.
고려의 처녀들을 끌고 가는 행위를 금지해 달라고 요청한 이곡의 편지에는 “뇌물을 바쳐 (중국) 사절의 탐욕을 채우면 아무리 아름다운 처녀라 해도 풀어준다고 합니다. 한 처녀가 풀려나면 그 처녀를 대신한 단 한 명의 처녀를 찾기 위해 수백 가구에 대한 수색이 이루어집니다”란 대목이 나온다. 바로 여기서 소설의 핵심적인 미스터리가 태어났다.
사라진 소녀들이라는 소재는 미스터리물에서 종종 사용된다. “열세 번째 아이가 사라진 지 1년 넘어수다.” 소녀 탐정이라는 캐릭터 역시 영어덜트 소설에서 낯설지 않다. “가서 아버지를 찾거라, 댕기 머리 탐정.” 작가는 이런 익숙한 구조 속에 공녀 제도라는 한국의 비극적 역사를 풀어 놓는다. 이를 통해 구조적으로 친숙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매우 낯선 미스터리 소설을 만들어 낸다.
소설 속에서 소녀들은 희생자이자 그 비극의 해결자가 된다. 강대국과의 마찰을 피하려는 나라, 출세를 꿈꾸는 관리, 자기 딸만 보호하려는 아버지가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은 힘없고 약한 여자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이 비극의 공모에 도전하고 해체하는 것도 소녀들의 용기와 자매애, 연대였다.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소녀들이 왜 사라졌는지, 미스터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어른들의 세계는 침묵과 의문으로 가득하고, 누구 하나 믿을 수 없다. 마지막에 배치된 놀라운 반전에 이르기까지 댕기 머리 소녀 탐정을 응원하며 읽게 된다.
이 소설을 통해 국내 처음 소개되는 허주은은 미국에서 세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2020년 첫 소설 ‘뼈의 침묵(The Silence of Bones)’과 2021년 두 번째 소설 ‘사라진 소녀들의 숲(The Forest of Stolen Girls)’이 연속해서 영어권 최고의 미스터리 문학상인 에드거 앨런 포 상 후보(영어덜트 소설 부문)에 오르면서 주목을 받았다.
올해 발표한 세 번째 소설 ‘붉은 궁(The Red Palace)’은 포브스에 의해 ‘2022년 가장 기대되는 소설’로 선정됐고, 연말에 뉴욕타임스 선정 ‘잊을 수 없는 영어덜트 미스터리 6권’에 뽑혔다. 현재 2024년 출간 예정으로 연산군을 소재로 한 네 번째 소설을 쓰고 있다.
허주은의 소설들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역사소설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주인공은 모두 10대 소녀로 청소년문학 또는 영어덜트 소설로 분류된다. 소녀 주인공은 형사를 돕는 하녀인 다모(‘뼈의 침묵’)이기도 하고, 수사관의 딸(‘사라진 소녀들의 숲’)이기도 하고, 궁궐의 의녀(‘붉은 궁’)이기도 하다.
허주은은 인천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아버지의 유학을 따라 캐나다로 떠났다. 가족들이 귀국하게 되면서 함께 돌아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이후 토론토대에서 문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10대 시절부터 작가의 꿈을 키웠다는 그는 10년의 습작기를 거쳐 첫 책을 냈다고 밝혔다. 첫 책의 출판 계약까지 100번 이상 거절을 당했다. 현재 토론토에서 남편,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이번 소설의 배경이 된 제주도는 작가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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