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력 좋고 힘이 세 놀랐죠”…이태호 감독이 떠올린 가나

이동환 2022. 11. 27. 18:4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선수] 이태호 강동대 감독
가나와 처음 붙은 1983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서 결승골
실명 극복한 ‘인간 승리’…안와골절 손흥민에 덕담
이태호(가운데) 강동대 감독이 1983년 6월15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준결승전 가나와의 경기에서 선제 결승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이태호 감독 제공


한국이 가나와 가장 처음 맞붙었던 건 1983년 6월15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준결승전에서다. 중계방송 화면이 우그러져 캐스터가 사과할 정도로 폭우와 낙뢰가 쏟아진 악천후의 상황을 뚫고 당시엔 생소했던 아프리카 팀을 상대로 선제 결승골을 넣은 주인공은 이태호(61) 강동대 감독이었다. 대표팀에서 공격형 미드필더와 셰도우 스트라이커를 봤던 이 감독은 지난 26일 국민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사실 아프리카 선수들과 이전까지 붙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며 “그 때 마주한 가나 선수들은 몸이 유연하고 파워도 상당히 좋아 놀랐고 경기 내내 고전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이 감독의 말처럼 이날 경기는 상당히 치열하게 전개됐다. 한국과 가나가 서로 치고 받는 경기 양상이 반복됐다고 한다. 그런 경기 흐름을 뒤집은 건 볼 컨트롤과 발재간이 좋아 ‘한국의 게르트뮐러’라 불리던 이 감독이었다. 가나 페널티박스 안쪽에서 볼을 이어 받은 이 감독은 수비수 두 명을 발재간으로 제치고 오른발 강슛을 날려 우측 탑코너를 뚫어내 한국을 결승에 진출시켰다. 이 감독은 “가나 선수들이 먼 한국까지 오느라 적응을 못한 상태였고, 우리에겐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있었던 것 같다”며 “골이 들어간 순간 너무 기뻐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했다”고 말했다.

월드컵은 언감생심이던 시절
이태호(오른쪽) 강동대 감독이 1983년 6월15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준결승전 가나와의 경기에서 선제 결승골을 넣고 세리머니하고 있다. 이태호 감독 제공

요즘 축구팬들에게는 생소한 대통령배 축구대회는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로 시작됐다. 이후 ‘대통령배’, ‘코리아컵’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1999년까지 역사가 이어졌다. 아시아가 축구의 변방일 7~80년대엔 이런 대회를 통해서만 해외 유수의 팀들과 맞붙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태국의 킹스컵, 말레이시아의 메르데타컵, 일본의 기린컵 등 아시아 국가들끼리 앞 다퉈 비슷한 위상의 대회를 만들어 경쟁하기도 했다. 대통령배 축구대회 개막전에 박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이 직접 관람하며 대회의 격을 높이려 했던 이유다.

재미있는 건 국가대표팀이 아닌 해외 명문 프로팀들까지 초청돼 경기를 치렀단 점이다. 83년 대회에서도 이 감독이 뛴 한국 대표팀을 결승에서 3대 2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건 허정무 대전하나시티즌 이사장이 이끌던 PSV아인트호벤이었다.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미국·나이지리아·태국·인도네시아 외에 이탈리아 세리에A의 제노아 CFC와도 상대(한국 3대 1 승)했다. 이 감독은 “1년에 한 번씩 있는 행사라 좋은 팀들을 많이 상대했던 것 같다. 한 번은 차범근의 레버쿠젠과 개막전에서 붙었던 기억도 있다”며 “당시는 월드컵이란 건 감히 통과를 못한다고 생각해서 한국에서 하는 대통령배도 큰 영광이라 항상 우승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아쉬웠던 월드컵의 기억
월드컵은 애초 16개국만 참가할 수 있는 대회였다.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엔 티켓이 한 장 밖에 주어지지 않아 1966년 북한, 1978년 이란을 제외하곤 월드컵을 밟아본 사례가 없었다. 당시 아시아 국가들에겐 월드컵에 나간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 1982년 24개국, 1998년 32개국 체제가 되면서 한국에도 기회가 생겼다.
이태호 강동대 감독이 1983년 6월15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뛴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준결승전 가나와의 경기 중계방송 사진. 이태호 감독 제공


이 감독도 고려대를 졸업한 1983년 운 좋게 K리그의 전신인 ‘슈퍼리그’란 프로리그가 출범하면서 안정적으로 축구 실력을 갈고 닦을 수 있었다. 당시 현대 호랑이, 유공 코끼리 등 라이벌 팀들과 각축을 벌이던 대우 로얄즈의 주축 선수로 뛰며 세 번의 리그 우승(1984, 1987, 1991)을 이끌었고, 자연스럽게 월드컵에 출전하는 국가대표팀에도 뽑혔다.

한국이 처음 참가한 1986 멕시코월드컵과 1990 이탈리아월드컵까지 두 대회에 출전한 이 감독은 아쉽게도 월드컵에서 단 1경기 밖에 뛰지 못했다. 1986년엔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전 어웨이 경기에서 수비수와 골키퍼까지 제치고 결승골을 넣는 등 활약했지만 차범근 전 감독이 선발되면서 후보로 밀려나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1990년엔 새롭게 떠오른 신성인 황선홍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밀려 첫 경기 벨기에전에서만 교체 선수로 20분 뛰었다. 그게 이 감독에게 유일한 월드컵 기억이다. 이 감독은 “선수로서 평생에 한 번 나갈까 말까 한 월드컵은 다른 대회하고는 분위기 자체가 달라서 차분하려고 노력했는데 흥분됐던 기억이 난다”며 “지금 선수들은 그때와는 달리 외국에서 경험이 풍부해 훨씬 더 편하고 안정적으로 경기하고 있는 것 같다”고 뿌듯해했다.

실명 극복 ‘인간 승리’…손흥민 마음 쓰여
이태호(왼쪽) 강동대 감독이 올해 팀에 영입한 가나 출신 데니스 선수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태호 감독 제공

이 감독은 1987년 포항제철 아톰즈와의 경기 중 공중볼에 헤더를 시도하다 당시 포항제철의 센터백이었던 남기영 대성고 감독의 발에 오른쪽 눈을 맞아 시력을 완전히 잃는 아픔도 겪었다. 원래 발리슛이 특기였던 이 감독은 이후 좁은 시야에 자꾸 헛발질을 하고 멀리서는 골대 위치도 보이지 않는 어려움을 반복적인 연습으로 극복해 ‘인간 승리’를 이뤄냈다. 안와골절 부상 중인 손흥민에게 더 마음이 쓰이는 이유다. 그는 “시야도 좁을뿐더러 다른 한 쪽 눈을 또 다치면 아예 시력을 잃을까봐 이후 경기에 나가는 게 무섭고 위축되기도 했다”며 “가나 선수들이 얼마나 터프하게 들이댈지 모르겠지만 손흥민은 세계적인 선수라 쉽게 적응해나갈 거라 기대한다”고 했다.
이태호(가운데) 강동대 감독이 1983년 6월15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준결승전 가나와의 경기에서 선제 결승골을 넣고 오른손을 번쩍 들고 있다. 이태호 감독 제공


공교롭게도 이 감독은 올해 가나 국적으로 계명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은야메 데니스 오세이(19)를 스카우트했다. 타고난 체격과 스피드, 탄력 덕에 강동대의 기대주로 보고 육성 중이라 한다. 이 감독은 28일 열릴 가나전에서도 상대 선수들의 스피드와 힘이 경계 대상이라 봤다. 그는 “가나 선수들이 체격조건도 좋은데 세계 유수의 리그에서 경험을 쌓아 83년 붙었던 선수들보다도 훨씬 강해진 것 같다”며 “상대는 1차전에서 패해 더 밀어붙여야 할 입장일 텐데 조심스럽게 경기 운영하면서도 최대한 빨리 선제골을 넣어 심리적인 부분을 활용해야 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