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빛만으로도 보석처럼 빛나는 게 우리 석탑”
사진작가 양현모(59)씨는 2009년 홀로 떠난 경주 여행에서 만난 감은사지 3층 석탑을 잊지 못한다. “어둠이 깔리는 폐사지에서 웅장하게 솟아오른 탑의 자태에 ‘멋지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그는 “그날 밤 근처 식당에서 민박하며 아침에 다시 탑을 보고 사진 찍을 생각에 밤새 잠을 설쳤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인물·패션 사진을 찍어온 그의 마음에 뜻밖의 석탑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와 패션·광고 사진으로 이름을 떨치고 돈을 벌면서도 떨쳐내지 못했던 질문, ‘내가 정말 원하는 사진은 무엇일까?’에 대한 답을 만난 순간이기도 했다.
‘탑을 찍는 사진작가’ 양씨의 전시가 서울 인사동 통인화랑 지하 1층에서 열리고 있다. 2010년부터 찍어온 700기 가량의 탑 사진 중 그가 고르고 고른 작품 14점을 선보인다.
그의 탑 사진은 독특하다. 검은색 배경에 오로지 탑만 보인다. 탑 뒤로 흔히 보이는 대웅전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모델이 완벽하면 단색 배경에 조명 하나만 있어도 충분히 감동적”이라며 “시선을 오로지 탑에만 집중시켜서 자연광을 받는 석탑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물 사진을 찍듯 배경에 검은 천을 두르고, 쓸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아날로그 필름을 쓴다. 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탑의 중간 높이에서 촬영한다. “렌즈와 거리에 대한 왜곡을 없애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른 조명 없이 자연광에만 의존해 찍는다. 그가 2016년 촬영한 ‘봉감탑’은 아예 황금탑으로 보인다. 그는 “아침 햇빛을 머금은 탑”이라며 “태양 빛을 받아 빛나는 찰나가 있다. 그 찰나를 잡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조명을 쓰면 더 편하지 않을까. “내가 왜 그런 생각을 안했겠나. 시도도 해봤다. 아무리 해도 자연광이 보여주는 완성도를 따라 갈 수 없다.”
수많은 탑 사진 중 그가 특히 애정을 느끼는 것은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비례미가 뛰어나면서도 부드럽고, 군더더기 없는 조형미는 볼 때마다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탑을 찍으며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구조와 균형미, 디테일을 정확하게 찍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탑이 지니고 있는 에너지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탑은 그냥 돌이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여기 서려 있다”고 했다.
탑 사진으로 2017년 뉴욕에서 첫 해외 전시를 연 그는 “언젠가 탑 실제 크기의 사진으로 전시를 여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로마 조각과 견주어도 조형미로 절대 뒤지지 않는 게 우리나라 석탑이나 토우”라며 “석탑에 우리 문화의 고유의 미감이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으로 이를 널리 알리고 싶다”고 했다. 전시는 12월 4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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