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이야기]박장렬 연출의 ‘리어왕’, 극단 민예의 ‘졸업’

2022. 11. 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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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이미지를 걷어내니 선명(宣明)해지는 박장렬의 리어왕

박장렬 연출은 조광화 작품<연오세오>(1989)로 데뷔를 했다. 극단 뮈토스를 거쳐 혜화동 1번지 동인 3기로 활동한 후 1996년 연극집단 반을 창단했다. 연출과 작가로 달려오면서 50여 편 가까운 작품을 연출하고 다양한 희곡을 썼다. ‘대학로 저항의 투사’ 이미지는 그가 서울연극협회 회장을 3∼4대를 연임하면서 생겨났다. 소신 발언과 연극인 정책들을 쏟아냈고, 세월호와 블랙리스트, 미투가 본격 점화되면서 그의 강렬한 저항은 투사 이미지로 각인(刻印)시키면서 정치적인 이미지도 형성되었다.

이후 경남도립극단 예술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공격과 저항은 현실과 타협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그는 대학로 연극과 선을 긋고 경남도립극단으로 내려가 박경리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지Ⅰ>(김민정 작, 2020)을 창단 공연으로 선보였고 이듬해는 <토지Ⅱ>를 공연하면서 연극으로 토지 1, 2부 시리즈를 완성했다. 그의 대학로 작품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인색했다. 이번 <리어왕>(경남도립극단)을 통해 박장렬 연출 작품이 안정적이면서도 무대로 드러나는 극의 힘들이 명확해지고 있다.

전쟁터가 되어버린 리어의 죽음과 광야

무대는 리어가 소유하고 있는 영토의 재산 분배로 시작되는데 작품이 시작되면서 몰입감을 주었고 2막부터 연출의 타격감들이 장면으로 배치되었다. 공간과 무대 윤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대를 몰고 가는 연출의 힘과 시선이 변화된 것이 느껴졌다. 이번 경남도립극단의 <리어왕>은 연출 역량을 드러내 보이는 총체적인 작품으로 보였다. 지역 도립극단의 작품을 하면서 “연출이 무대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구나”라는 인상을 받기가 쉽지 않은데, 충분한 작품이었다. 50여 편의 작품 연출을 돌아온 시간이 무대로 고이기 시작했다. 이 지점이 좋았다. 그동안 연출 무대에서 거친 부분들, 때로 빈틈을 보이는 무대 구조와 플롯 배열들이 작품마다 고른 구도로 연출의 극성(드라마)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번 <리어왕>을 통해 연출 색감으로 그려 낼 수 있는 미학성과 구도를 형성했다고 할까. 시도는 다양하면서도 과감했고 무대는 안정되었다.

그동안 전통 리어왕과 실험적인 리어왕들을 봐왔는데, 이 두 가지를 융합시키면서도 매우 안정된 구도를 보여주었다. 그동안 극단 뮈토스를 오경숙 선생과 거치고 극단 반은 이끌면서 보여주었던 공격적인 날것의 감각들이 정리되었다. 공립극단의 예술 감독을 하면서 민간극단들과는 다른 장점의 재료만 사용하지 않고 공부하려는 태도들과 시선들이 배우들과 단단하게 융합되면서 작품을 베어내는 힘들이 느껴졌다. 몇 가지의 아쉬운 점들만 빼면 박장렬 연출의 작품 중에는 완숙되어 가는 정점(頂點)의 고지에 이르는 감각을 보여주었다.

1막은 간결한 정리를 보여주었고 2막부터 거너릴과 리건의 사악한 권력의 욕망으로 전쟁터가 된 광야를 떠돌며 미쳐가는 리어왕에 승부수를 걸고 공간에서 연출의 미학성을 드러낼 수 있는 한계점까지 달린다. 구도와 공간성, 극과 장면의 사이, 음악, 배우들의 연기와 오브제(피아노, 난파선, 폐지비닐봉투 등)과 때로는 한국적인 정서의 리어왕으로. 광야는 바람과 폭풍우가 몰아쳐 진실이 위배(違背)되지 않는 도시 분위기를 형성한다. 코딜리어와 같은 인간들이 넘쳐나는 도시국가가 되어야 함에도 연출은 리어의 죽음에 코딜리어를 포개 놓고 거너릴과 리건마저도 권력의 사악한 욕망을 죽음으로 끊어 놓는다. 연출의 시선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의 절망감이 은유적으로 묻어 있다.

두 딸(리건과 거너릴)의 사악한 욕망의 파티에서는 군무 앙상블들을 배치해 인간이 거세된 두 인물의 내면을 리듬감으로 형성하고 툭툭 밀어 넣는 음악적 멜로디와 가사는 대사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극적인 감정의 선율로 흐르게 한다. 마지막까지 리어를 동행하는 광대는 눈알이 뽑혀 죽어간 글로스터와 순수한 죽음의 영혼들을 향해 노래로 위로하고 여전히 리어의 죽음은 현재의 시간의 이미지로 투사된다. 연출은 리어의 죽음을 위로하는 광대가 되고자 했고 리어왕을 현재로 풀어내는 것은 인생의 숙제였던 것 같다. 공연 후 “세계의 리어왕을 저만큼 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라고 한다. 연출에게 리어왕의 도전은 일상에서 보여주었던 저항적인 태도들이 작품으로 향하고 있으니 거친 무대는 발효되고 선명해지는 것 같다. 현장의 한계와 일상의 내면을 걷어내니 무대가 보인다.

특히 경남도립 배우들의 안정된 발성과 연기가 재해석한 이번 리어왕 작품과 결이 잘 맞아서일까. 때로는 연기의 앙상블, 대사의 질감과 톤들이 비슷하게 들리면서도 작품을 살려내려는 경남도립극단 단원들의 팀워크로 작품이 결속되어 단단해진 것 같다. 한갑수, 문창완과 거너릴, 리건, 코딜리어 세 딸들(박시우, 이상희, 박선혜) 그리고 극 중 인물들이 고른 연기를 보였다. 대사의 음감이 좋은 배우들이다. 경남 벅수골 극단을 거치며 40년 이상을 무대에서 버텨내고 있는 박승규(리어왕)는 때로는 연민의 마음으로 때로는 광기의 분노로, 막내딸의 식은 심장의 온기를 느끼며 죽어가는 리어를 그려 넣는다. 조명(김철희)와 의상디자인(박근여)도 연출의 의도를 선명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무대를 그려낸다. 토요일 만석에 가까운 1층 객석 관객들은 서성이는 기립박수에 각 좌석 열 마다 동참해 마음을 보내고 70대의 옆 관객은 “잘봤어요”로 보답한다. 리어왕을 보고 소리로, 웃음으로 화답하는 관객들 열정에 도시, 진주의 문화 감각을 읽을 수 있었다. 작품은 관객 마음을 그만큼 위로 했다.

| 졸혼(卒婚)과 사랑의 멜로 극단 민예의 연극<졸업>

극단 작은신화의 ‘믿을지 모르겠지만’(최용훈 연출) 김이율 작가와 이은숙 작가가 공동으로 쓴 ‘민예극단’의 연극<졸업>(동숭무대 소극장, 김성환 연출)은 노장의 원로 배우들이 무대를 포용하는 여유로움을 깊게 묻어내는 작품이다. 100세 시대에 70대들의 졸혼과 이혼, 그사이에 피어오르는 노년 부부의 삶은 애증(愛憎)관계로 묶여 있으면서도 질투는 사랑의 감각을 재확인하는 신호가 된다. 연극 졸업의 이야기는 이렇다. 동네 한의원을 운영하며 낚시를 좋아하는 극중 인물 한의사 민상범(이태훈 분)은 아침드라마 전문 배우인 정인애(우상민 분)와 졸혼을 하고도 당분간 한집에서 살아간다. 이 사이 정인애는 노년의 2막 사랑이 방송국 음향감독을 하던 홍상우(조영선 분)을 향하고 한의사 민상범은 동네시장에서 횟집을 하는 나복희(이혜연 분)을 좋아하는 식이다.

이 정도로 노년의 2막 사랑이 꼬이면 재미감이 덜한지 작가는 나복희, 홍상우 과거를 고향마을의 첫사랑 관계로 설정한다. 전라도 고향으로 돌아간 과거시간들은 고향말로 청춘이 되어 돌아오고 짝사랑의 애틋함은 여전하다. 무대는 이혼과 졸혼, 노년의 2막의 사랑들이 공감을 불러내고 정인애는 애인 홍상우가 속이 체해 남편 침술을 빌리면서도 세 사람 관계는 능청스럽고 졸혼을 해도 애정전선에는 질투가 넘친다. 낚시터 장면이다. 두 사람은 속마음을 털어놓는데, 아침드라마를 안 봐준 남편이 원망스러우면서도 낚시를 싫어했던 부인을 향해 투덜대는 장면에서는 사랑이 식지 않았음을 느끼게 하고, 살면서 부부의 공감이 중요함을 인식하게 한다.

노년들의 멜로로만 극의 분위기를 달리면 장면은 심심해 지는데 작가는 이 두 사람의 청춘의 과거 시간을 소환하고 무대는 80년대 디스코텍 분위기로 전환된다. 젊은 날 청춘의 사랑은 과거가 아니라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의 마음이다. 이 장면에서 조영선은 춤 잘추는 오빠(제비)로 등장해 탄력적인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고 이혜연은 디스코텍 죽순이 춤 솜씨를 재현하면서 객석은 웃음으로 ‘빵’ 터진다. 데이트하기 위해 방문한 커피숍에서 네 사람이 마주치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표정들에 웃음이 터지는데 가족문제는 졸혼을 하고 2막 사랑을 향해도 이들을 묶어내는 애틋한 부부애로 되돌린다.

연극졸업은 소극장(동숭무대)에서도 다양한 장면전환을 속도감 있게 재현해 낼 수 있도록 이중무대로 알차게 배치했다. 이 작품은 1시간 30분 동안 네 명의 배우들이 2~3초 타이밍의 간극 없이 극을 유쾌하게 몰고 가는 노장들의 연기에 여유로움이 묻어있다. 마지막 장면은 분위기의 반전이다. 민영범은 아내 정인애를 향해 학사모를 씌우고 고단한 삶을 달려온 아내를 위한 헌사의 졸업장을 받친다. 아름다운 졸혼의 졸업장으로 인생 2막을 서로 ‘쿨’하게 달려가면서도 아름답다.

1973년에 창단된 극단 민예는 올해로 49주년이 되었다. 빠르고 다양한 연극들이 30∼40대와 50대들로 대학로와 연극의 주변을 채워가는 시대에서도 민예의 창단 전통성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연극을 아날로그 정신으로 지속해서 만들어 가고 있다. 이번 작품은 그동안 넉넉한 지원사업을 수행하지 못한 극단이 원로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극단 출신의 대표적인 배우들이 모여서 공연했다. 이름만으로도 한국연극의 연보가 되는 이태훈, 우상민, 조영선 선생들은 이런 마음을 아는지 소극장 무대를 배우의 연륜으로 그려냈고 대표 이혜연은 그 틈으로 극의 분위기를 살려냈다.

다양한 대학로 연극들이 존재하는 시대에 그 의미만으로도 박수를 보내는 연극이다. 그만큼 무대를 지켜내는 극단과 원로 배우들 모습은 극중 인물 민상범 처럼 졸혼을 하고도 2막을 향해 달리고 있고 그 토양들이 거름으로 쌓여 다시 연극이 되는 것이 아닐까. 원로(元老)는 노년의 나이 보다는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종사해오면서 경험으로 연륜이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배우들은 연기로 연륜의 무대를 보여주었다. 소재주의와 사회적 이슈를 선점하는 무대에 떠밀려 기술을 부리지 않고 담백하게 무대를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연극이다. 이번 연극에 해석과 해설을 덧붙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평생 연극을 섬기면서 오늘도 묵묵히 연습실과 무대로 향하는 네 분의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작가와 연출이 그 마음을 보태니 그 자체가 연극 한편이 된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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