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가 수산들에 목마장을 만든 이유 [수산봉수 제주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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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 기자]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 수산봉수 팻말 옆에 서 있는 글쓴이 이봉수. 토축 위에 있는 흰 벤치에 앉아서 일출봉을 바라보는 사진을 찍으면 '인생샷'이 나온다. |
ⓒ 이봉수 |
두루 알다시피 바다에서 조난돼 표류하는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은 물이다. 해군 장교 훈련 시절에도 '사방이 다 물이지만 소금물은 마시는 순간 극심한 갈증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배웠다. 제주 역시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강우량도 많지만 물이 귀한 곳이다. 제주도는 구멍 숭숭 뚫린 바위와 화산토로 돼있어 비가 내리면 이내 땅속으로 스며든다. 지하 암반 위 대수층을 따라 흐르다 지층 틈새로 치솟는 샘물이 바로 용천수다.
▲ 제주도 용천수 분포현황. 주로 해안과 일부 중산간지대에 용천수가 솟기 때문에 그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
ⓒ 제주특별자치도 |
물장오리, 물찻, 물영아리의 비경
제주의 지명에는 물이 들어간 데가 많다. 물이 가장 소중한 '지명정보'였기 때문이다. 오름 중에서도 분화구에 물이 있는 곳은 특히 비경인데 대개 이름에 '물'이 들어있다. 물장오리, 물찻, 물영아리… 물장오리는 늘 물이 넘쳐흐르는 곳이어서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던 오름이다.
▲ .분화구 주변을 도는 노란색 트레킹코스가 보이는데 분화구에는 물기가 많아 나무가 거의 없고 그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있다. 파란색 점선으로 표시된 올레2코스와 바로 연결되고 왼쪽 상단에 '빛의 벙커' 주차장이 보인다. |
ⓒ 이봉수 |
물뫼에서 왜 물이 사라졌을까
대수산봉 분화구에는 샘물이 솟아 못을 이뤘다는데 지금은 큰비가 내리지 않으면 물이 고이지 않는다. 일설에는 송나라 호종단(胡宗旦)이 제주의 산맥과 수맥의 기운을 누르고 간 뒤 수맥이 끊겼다는데, 믿어지지 않는다. <제주신문>과 제주MBC 등에서 일한 김종철의 역저 <오름 나그네> 제2권에 따르면 대수산봉은 예전에 이름난 방목지였을 만큼 온통 풀밭이었다는데, 지금은 흑송과 삼나무 등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 대수산봉에서 바라본 일출봉(왼쪽)과 섭지코지(오른쪽). 섭지코지로 둘러싸인 신양리 앞바다에는 바람이 세서 요즘 휴일이면 서핑족들이 몰려든다. |
ⓒ 이봉수 |
▲ 원나라 1호 목마장이 들어선 수산평. 가운데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는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인데, 대수산봉 사이에 드넓은 수산들이 펼쳐진다. |
ⓒ 이봉수 |
일부 문헌과 언론에서는 말 160필을 보낸 이가 원나라 순제의 총애를 받은 기황후라고 주장하는데, 문헌 조사를 해보니 연대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기황후설의 근거가 된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다. 서거정의 '제주목 관덕정 중수기'에 기황후가 목장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또 <탐라성주유사>에는 1300년에 기황후가 수산평에 목장을 설치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기황후가 황후가 된 것은 1340년이어서 <탐라성주유사>의 1300년과는 40년 이상, <동사강목>의 1276년과는 무려 64년 이상 햇수가 어긋난다. 아마도 원나라가 1276년에 말 160필을 보내 수산평에 목마장을 처음 개설한 역사적 사실이 후대에 기황후가 목마장을 설치한 행적과 결합돼 기황후가 처음으로 말 160필을 보낸 장본인으로 와전된 듯하다.
기황후는 기자오의 딸이면서 공녀로 원나라에 가서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기황후는 '몽고인 말고는 황후를 삼지 말라'는 가훈을 깰 만큼 재색이 뛰어나고 모국에 관한 '애정'도 특별했던 듯하다. 그는 목마장을 두는 한편으로 지금 제주시 외도1동에 수정사를 세워 불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오빠 등 기씨 일족이 국정을 농단하다가 공민왕에게 주살되면서 복수극으로 치달았다. 고려 출신 최유로 하여금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고려를 치게 했다가 최영 장군에게 대패했다.
탐라인에겐 너무나 가혹했던 말 기르기
말 양육은 탐라인에게 가혹한 공역(貢役)이었고 농경지를 침탈하는 문제도 있었다. 농경지 주변에 밭담을 쌓고 무덤 주변에 산담을 쌓은 것은 탐라인의 자구책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올레길을 비롯한 아름다운 제주 풍경의 핵심 구성요소가 되었으니 인간의 행위가 어떤 결과로 귀착될지는 알기 힘들다.
▲ 대수산봉에서 바라본 한라산. 한라산은 방패처럼 생긴 순상화산이어서 넓은 들판을 형성해 마소를 방목하기에 좋다. |
ⓒ 이봉수 |
그런데 최근, 제주에도 맹수가 나타났다. 관광객이 버리고 간 유기견이 들개떼를 이뤄 한라산 중산간지대에 방목하는 소를 습격해 잡아먹은 게 여러 건이라는 뉴스를 봤다.
큰물뫼 남동쪽 산기슭, 키아오라 바로 옆에는 군위오씨 입도조(入島祖) 묘가 있다. 입도조 오석현은 세조의 찬탈에 분개해 정삼품 벼슬을 버리고 지금 성산읍 고성리에 정착했다. 큰물뫼는 풍수지리에서 '와우형'(臥牛形)이라 하여 소가 누워있는 꼴인데, 그 젖통에 해당하는 명당에 입도조 묘가 있어 오씨 가문이 번성했다고 한다. 이번에 제주지사로 뽑힌 오영훈이 조상에게 신고하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내러 왔을 때 잠시 인사를 나눴다. 6년 전 키아오라리조트를 지은 오용원 전 전국문화원연합회장이 소개했기 때문이다.
▲ 대수산봉에 많은 곰솔은 줄기가 불그스레한 여느 소나무와 달리 검은색이어서 흑송이라고도 불린다. 바람 센 바닷가에 적응해 키가 잘 크지 않아 가지의 간격이 촘촘하다. |
ⓒ 이봉수 |
근데 우리 부부 말고도 늘 큰물뫼에 오르는 이가 있다. 그가 정상에 오른 날은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날마다 고함을 질러 산 아래까지 소음공해를 유발하고, 내가 산길에서 몇 번이나 만난 노루와 고라니, 산새들을 놀라게 하냐'라는 불만이 쌓였다.
어느 날 정상에서 한 남자를 만나 대화하던 중 "누군가 여기서 고함을 질러 정적을 깬다"고 불평했더니 "그게 바로 나"라고 고백하는 게 아닌가? 조선소 사장까지 지낸 뒤 위암이 발병하고 간으로 전이돼 방사선치료는 했지만 수술은 할 수 없어 자연치유를 하려고 성산에 왔다는 거였다. 산에 올라 고함을 지르는 것은 암 환자에게 좋다고 의사가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원망해온 마음을 사죄하고, '안부 인사'로 듣고 싶으니 매일 고함소리를 들려 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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