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과근무 일상화에 반발..워라밸? 태만?

명순영 2022. 9. 11.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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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조용한 사직' 열풍 왜 불까

김성훈 씨(가명)는 최근 ‘태업 아닌 태업’에 돌입했다. 꽤 알려진 중견 기업에 다녔던 김 씨는 2년 전 스타트업으로 옮겼다. 주변에서는 ‘노비를 하더라도 대감집 노비가 낫다’며 작은 기업으로의 이직을 말렸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월급은 다소 작겠지만 스톡옵션을 톡톡히 챙겨 상장 때 ‘대박’을 이루겠다는 꿈을 꿨다. 입사 초기만 해도 그는 ‘내 한 몸 불사르며’ 일했다. 야근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팀장이 시키지 않은 업무도 손들고 먼저 나서 해결하는 ‘허슬(Hustle) 플레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들어 김 씨는 사고방식을 180도 바꿨다. 경영진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데다, 회사 비전을 찾기 힘들어서다. 50대인 사장은 성과에 대해 적절하게 보상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만을 외쳤다. 또한 “일하지 않으면 회사가 망할 수 있다”며 생존을 위한 노력만 강조했다. 스톡옵션에 대해서는 “장기적으로 생각하자”며 야박한 태도를 보였다. ‘즐겁게’ 일하자는데 도무지 즐겁지가 않았다. 게다가 최근 바이오 업계에 찬바람이 불며 투자와 상장이 물 건너가자 희망은 더욱 사라졌다.

김 씨는 “주변 얘기를 듣지 않고 왜 이직했는지 후회가 든다”며 “앞으로는 새로운 자리를 얻을 때까지 내가 생각하는 월급 정도만큼의 일을 수동적으로 할 생각”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 씨의 태도는 최근 미국에서 화제가 된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신드롬과 맞닿아 있다. ‘Quiet quitting’을 직역하면 ‘조용하게 직장을 그만둔다’는 뜻이다.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지는 않지만 정해진 시간과 업무 범위 안에서만 일하고 초과근무를 거부하는 노동 방식을 의미한다.

‘조용한 사직’ 열풍은 뉴욕에 거주하는 엔지니어 자이드 펠린(Zaidle ppelin)이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짤막한 영상을 계기로 시작됐다. 자이드 펠린은 영상에서 “최근 ‘조용한 사직’이라는 용어를 배웠다”며 “일이 곧 삶이 아니며(Work is NOT your life), 당신의 가치는 당신의 성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Your worth is not defined by your productive output)”라고 말했다. 이 영상은 8월 말 350만건 넘게 조회됐고, 4600개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워싱턴포스트(WP) 등 미국 언론은 이 같은 미국 내 트렌드를 짚으며 다양한 사례를 소개했다. 미국 워싱턴 D.C.에서 교통 분석가로 일하는 페이지 웨스트는 입사 1년이 채 안 된 시점에서 더 이상 초과근무를 하지 않기로 했다. 업무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머리카락이 빠지고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날이 이어져서다. 그는 주 40시간을 넘겨 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추가로 업무 교육을 이수하거나 동료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없애기로 했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나는 내가 일하기로 돼 있는 시간만 근무하고, 받은 만큼만 일하며, 그 외에 추가로 더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구인 사이트 ‘레쥬메 빌더’의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1000명의 미국 노동자 가운데 21%가 “조용한 사직을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미국에서 ‘조용한 사직’ 열풍이 거세다. 뉴욕에 거주하는 엔지니어 자이드 펠린이 올린 짤막한 영상(사진 왼쪽)을 계기로 소셜미디어(SNS)에서 확산 추세다.

▶코로나 때 대규모 정리해고

▷경기 회복됐어도 충원 못해

미국에서 ‘조용한 사직’ 현상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미국 노동 시장은 극심한 구인난에 시달려왔다. 코로나 유행 초기에 해고된 노동자들이 완전히 은퇴해버린 영향이 적지 않았다. 아울러 육아 등 돌봄 노동 등으로 근로자의 노동 시장 복귀는 더디기만 했다. 높은 실업수당에 취해 고용 시장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노동자도 부지기수였다.

문제는 남은 직원들. 이들은 코로나19 감염 위험과 함께 초과근무 등 심각한 노동 환경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CNN은 전문가 멘트를 인용해 고용주가 코로나19 이후 일어난 대량 사직을 고려하지 않은 탓에 남은 직원에게 추가 업무가 부과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열렸는데도 신규 채용이 이뤄지지 않으며 노동 환경이 열악해졌다는 설명이다.

노동력 부족으로 남은 인력이 고생하는 장면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항공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영국 항공은 일손 부족을 이유로 내년 3월 말까지 히드로 공항을 오가는 1만편의 항공을 취소하기로 했다. 기존 인력 추가근무로 겨우 운항을 이어왔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에 내린 조치다. 국내 항공사도 사정은 별반 다를 바 없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하늘길이 막히며 극심한 고용 불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항공 수요 회복으로 일터로 돌아가고 있지만, 늘어난 수요만큼 인력이 회복되지 않아 노동 강도가 지나치게 높아졌다는 호소가 이어진다.

더군다나 노동자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 탓에 실질적인 임금 하락을 겪고 있다. 기본 근무시간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초과근무까지 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는다. 여성 리더십 전문가 캐시 카프리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조용한 사직은 최소한의 일을 한다기보다 계약된 업무 범위를 넘어서고 수당을 받지 못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노동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에드 지트론은 미 NPR 방송에 “이 용어는 직원 노동력을 착취하고 추가 보상 없는 과로 문화를 통해 이익을 얻는 기업 방식에서 유래했다”며 “적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받은 만큼 일하고 추가적인 의무를 지지 않으며 할당된 시간을 초과해 일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열악해진 노동 환경은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졌다. 최근 미국 내 노조 결성률이 늘어나고 있는데,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내 노조 조직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초과근무에 지칠 대로 지쳤나

▷주요 글로벌 기업 노조 결성 늘어

무노조 경영을 고수해온 애플사에서는 지난 6월 18일(현지 시각)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인근 토슨의 애플스토어 직원 투표에서 찬성 65명, 반대 33명으로 첫 노조 설립안이 가결됐다. 이들은 미 최대 산별 노조 중 하나인 국제기계·항공우주 노동자연합(IAM)에 가입해 자체 지부를 결성하게 된다. 미국 270여 애플스토어에서 노조 결성안이 투표를 통과한 것은 처음이다. 지난해에는 미국 뉴욕주 버펄러시의 한 스타벅스 매장에서 1980년대 이후 첫 스타벅스 노동조합이 설립됐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의 물류창고 노동자들이 미 노동관계위원회(NLRB)에 노조 결성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 같은 노조 결성 추세는 노동 인력이 귀해진 가운데 미국 노동자가 회사로부터 안정적인 근무 환경을 얻어내려는 움직임을 반영한다는 게 미국 언론 해석이다. 더불어 ‘조용한 사직’은 ‘일과 삶의 균형(Work Life Balance)’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다. 미국 매체 더힐은 “조용한 사직은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로 MZ세대가 주도한다”며 “코로나19 대유행이 초래한 ‘대퇴직(Great Resignation)’의 연장선”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서도 마찬가지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5월 ‘신(新)기업가정신 선포식’을 앞두고 국민과 기업인 706명을 대상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기업가정신’을 설문조사했다. 그 결과, 국민들은 기업가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기업의 실천과제로 워라밸 실천, 즐거운 일터, 임직원 성장과 관련된 ‘기업 문화 향상(26.9%)’을 가장 많이 꼽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MZ세대(1984~ 2003년 출생자) 1000명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일자리 판단 기준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 66.5%(복수 응답)가 ‘일과 삶의 균형이 맞춰지는 일자리’라고 답했다. 두 설문조사는 기업이 물질적인 보상과 함께 개인 생활을 보장해줄 때 직원이 ‘열의’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中 탕핑주의, 韓 욜로도 같은 맥락

▷자기개발 소홀하다 도태” 우려도

조용한 사직은 미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지난해 중국 젊은 층 사이에서는 ‘탕핑주의’라는 말이 유행했다. 아등바등 노력하지 않고 최소한의 벌이로만 생계를 유지하자는 생활 태도를 뜻한다. 중국 사회의 치열한 경쟁 시스템과 청년층의 박탈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사회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의미를 담았다는 해석도 나왔다.

국내에서도 회사 생활에만 매진하지 않겠다는 삶의 철학을 보여주는 단어가 적지 않다. 미래보다 현재를 즐기는 ‘욜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 일과 삶의 균형을 따지는 ‘워라밸’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천장현 머서코리아 부사장은 “미국에서의 조용한 사직 현상은 한국에서 이미 진행 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했다. 한국에서 장시간 노동 문화가 오랜 기간 자리 잡은 가운데, 이에 걸맞은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직장인이 많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그는 “한국 직장 사회에서는 소위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온다는 말이 있다”며 “일에 매진하다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소진하는 번아웃 현상을 겪은 직장인이라면 언제든 조용한 사직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조용한 사직은 태만, 낮은 업무 몰입도, 의욕 부진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데 ‘조용한 사직’은 조직 내에서 ‘빠르게’ 도태되는 길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대형 증권사의 시니어 애널리스트는 “주 40시간이 엄격하게 시행됐을 때 주어진 일만 최소한으로 처리하고 스스로 역량을 키우려고 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업종이나 직무 특성상 최소한의 일만 해도 개인 경쟁력을 잃지 않을 수 있겠지만, 애널리스트나 영업맨 등 자기 역량 강화가 절실한 직무라면 ‘조용한 사직’으로 경쟁에서 이기기는 힘들 것”이라고 일갈했다.

▶직원 동기 부여 고민하는 기업

▷유연근로제·성과 보상 등으로 대응

기업은 ‘조용한 사직’ 문화가 생산성을 낮출 수 있다고 우려하는 한편, 다각도로 업무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최근 각종 설문조사에서 일하기 좋은 기업 상위권에 오르는 SK그룹의 변신이 대표적인 사례다. 잡플래닛은 8월 29일 상반기 동안 잡플래닛에 남겨진 기업 평가 21만건을 토대로 7년 차 미만 저년차 직원들 만족도가 높은 대기업 순위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1위는 SK텔레콤, 2위는 SK하이이엔지, 3위는 NH투자증권, 4위는 SK이노베이션 등으로 SK그룹이 주를 차지했다.

예를 들어 SK텔레콤은 ‘9 to 6’라는 획일적인 출퇴근 근무 형태서 벗어나 구성원들이 4주 160시간 내에서 자유롭게 근무시간을 선택해서 일할 수 있는 자율근무제를 적용 중이다. 주당 근무시간을 채우면 금요일은 쉬는 ‘해피프라이데이’도 올해부터 월 1회에서 월 2회로 확대했다. 도시 곳곳에 거점형 업무 공간 ‘스피어(Sphere)’를 공식 운영하면서 구성원이 본사에 출근할 필요 없이 집 근처 거점 오피스에서 업무할 수 있다. 근속 기간 5년 주기로 리프레시(Refresh) 휴가를 부여하거나 아침 식사를 무료 제공, 임신기 단축 근로·사내 어린이집 등의 정책은 직무 열의를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높은 근무 만족도는 유능한 인재 유치라는 선순환 구조로 이어져 다시 업무 만족도로 돌아온다는 게 SK텔레콤 설명이다. 잡플래닛 측은 7년 차 미만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은 기업들의 공통적인 키워드로 ‘교육’ ‘기회’ ‘복지’를 꼽았다.

‘복지부동’이라는 단어가 상징처럼 돼버린 공무원 사회도 변하고 있다. 복지부동은 ‘땅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시키지 않으면 어떤 일도 하지 않고 무사안일을 꾀한다는 뜻으로, 어쩌면 ‘조용한 사직’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조용한 사직’을 넘어 ‘진짜 사직’ 사례가 늘었다.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재직 기간 5년 미만 퇴직 공무원 수가 1만명을 넘어섰다. 그러자 인사혁신처는 공직 문화 혁신안을 내놓기도 했다. 경직된 조직문화 탓에 신입 공무원의 조기 퇴직이 점점 늘어나는 공직사회의 내·외부 목소리를 반영하는 데 초점을 뒀다는 게 인사혁신처 설명이다. 스터디카페 등 원격 근무가 가능한 장소와 시간을 확대하고, 민원이 몰리는 근무시간 외 나머지 시간은 유연근무를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자율근무제’를 시범적으로 도입하는 게 변화의 징조다.

[명순영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75호·추석합본호 (2022.09.07~2022.09.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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