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광경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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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춘 기자]
▲ 마등령에서 바라본 설악, 운무에 산은 섬이 되고 |
ⓒ 박병춘 |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누구일까? 조금은 오래된 사건이다. 지난 7월 7일, 고딩 친구와 설악산 공룡 능선에 올랐다. 설악산 노선을 거의 다 탔지만, 유일하게 남겨 놓은 공룡을 닮은 능선! 친구와 나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체력 훈련은 기본이었다. 여러 산에 다니며 모의고사를 치렀다. 하필이면 장마가 심한 때였다. 오전에는 흐림, 오후엔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 설악과 운무가 만나 선경을 만들고 |
ⓒ 박병춘 |
숙소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찰나에 뭔가 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층을 표시하는 곳에선 이상한 글자가 아른거리고 우린 3층 반쯤에서 갇히고 말았다.
비상벨을 누르고 숙소 관계자와 소통했다. 그런 와중에도 119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머문 숙소에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 당일치기 산행이므로 새벽같이 나왔는데, 엘리베이터에 갇혔으니 식은땀이 절로 났다. 나는 인생 마지막인 듯 친구 힘을 빌려 영상을 촬영했다. 휴, 영화 한 편 찍은 느낌이었다.
▲ 비 예보가 있었지만 강행하기를 잘했다.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고, 풍경은 보물처럼 눈에 박혔다. |
ⓒ 박병춘 |
▲ 고교 시절 수학여행 중에 액자에 담긴 에델바이스를 사온 적이 있었다. 바로 '산솜다리'였다. |
ⓒ 박병춘 |
내게 야생화 멘토인 친구는 발걸음이 빨랐다. 친구는 이미 공룡 능선을 한번 타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공룡 능선이 운무에 가려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 풍광을 새롭게 본 친구에게 "지난 산행은 무효지? 이번이 진짜야. 내가 산 복이 좀 있거든!"이라고 말하자 격하게 공감했다.
돌아보면 산행마다 축복이었다. 덕유산, 지리산, 소백산, 오대산, 한라산 등 내가 갔던 모든 산이 함께 했던 우리를 안아 주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일출을 단박에 보았다. 10년 넘게 지리산, 설악산을 다녀도 일출을 보지 못했다는 산꾼의 푸념이 이상야릇했다. 갈 때마다 축복이었고 산 복이 가득했다. 언젠가는 나도 산의 매 발톱에 고생할 날 있으리니 자만을 경계하고 무조건 준비를 철저히 하리라.
▲ 설악산에만 서식한다는 희귀 식물, '연잎꿩의다리' |
ⓒ 박병춘 |
▲ 솔체꽃(구름체꽃)의 미소 |
ⓒ 박병춘 |
산솜다리, 연잎꿩의다리, 솔체꽃(구름체꽃), 금마타리, 산꿩의다리, 꿩의다리, 동자꽃, 등대시호, 은분취, 함박꽃나무, 노루오줌, 숙은노루오줌, 병조희풀, 바람꽃, 솔나리 꽃봉오리... 나의 야생화 멘토 친구의 안내에 따라 과분한 야생화를 영접했다. 산 복과 꽃 복이 더해 산행 내내 감탄을 연발했다.
전국 곳곳에 야생화가 산다. 그만큼 지역마다 꽃쟁이들도 많다. 야생화에 빠진 꽃쟁이들은 계절마다 분주하고 꽃 지도를 그려낸다. 낮아서 아름다운 야생화는 들여다볼수록 정교하고 신비하다. 좋은 사진을 촬영하려면 내가 눕거나 엎드려야 한다. 물론 이번 산행처럼 올려다봐야 할 때도 있다. 올려다볼수록 아름다운 노란 돌양지꽃에 렌즈를 집중했다.
공룡 능선을 타던 중, 잠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세상에, 직벽 한가운데 금강초롱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너무나 놀라 앞서가던 친구에게 소리쳤다.
"종열아! 여기 청사초롱, 청사초롱!"
▲ 8~9월에 핀다는 금강초롱꽃이 7월 초순에 활짝 피었다. 야생화 전문가들과 공유했는데, 무척 신기해하며 반응이 좋았다. |
ⓒ 박병춘 |
"뭐, 뭐라고?"
이미 두 군데 난코스를 유격 훈련하듯 내려갔던 친구가 화들짝 놀라 되돌아왔다.
"이야, 이건 금강초롱이잖아! 이걸 어떻게 봤어?"
▲ 암반에 핀 '돌양지꽃', 설명이나 표현이 불가하다. |
ⓒ 박병춘 |
그다음부턴 돌양지꽃만 눈에 들어왔다. 올려다 봐야만 촬영이 가능했다. 마크로 100mm 렌즈의 한계가 있었지만 작아서 더욱 아름다웠다.
▲ 우리 사는 세상은 크고 웅장한 맛에 빠져 있는 듯하다. 작아서 아름다운 존재들로 가치 전환을 하면 어떨까. |
ⓒ 박병춘 |
친구는 하산해서 마시는 콜라맛을 칭송했다. 소공원 주차장을 50미터 앞두고 자판기가 눈에 띄었다. 궁금했다. 자판기에서 콜라 두 캔을 꺼냈다. 마셨다. 표현 불가능한 쾌감이었다. 차에 오르기 전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서로를 토닥이며 웃음지었다. 우리를 안아준 설악을 뒤로 하고 설악항 횟집으로 향했다. 꿀맛 소주와 바다 내음과 친구의 미소를 마시며 나는 우쭐해졌다.
나를 찾으러 떠난 산행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누구일까?' 설악은 침묵으로 나를 가르쳤다. 덤으로 얻은 자신감, 자존감에 남은 생은 찬란하리라. 그래,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공룡을 타고 날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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