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人 이야기]연극평론가 김기란, "연극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

2022. 7. 18.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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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평론가 김기란(55) 선생을 알게 된 것은 독일에서 출간된 한스-티스 레만(Hans-Thies Lehmann)의 『포스트드라마 연극』(2013, 현대미학사) 번역본을 통해서였다. 이 책은 구조주의적인 텍스트 개념에서 벗어나 공간, 신체, 시간, 배우의 현존과 수행성, 퍼포먼스 등의 관점을 제시했다. 전통적인 희곡의 재현성을 거부한 동시대적인 미학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의 등장 이후로, 한국 연극계에서는 포스트드라마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김기란 선생은 그 중심에 있었다. 이후 『서울의 연극』(2019, 서울책방)과 『극장국가 대한제국』(2021, 현실문화연구) 등 연극, 철학, 인문학, 역사를 다루는 책을 통해서도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해왔다. 연구 논문도 수십 편 검색될 정도로 주제 영역이 방대했다. 연극 평론을 주업(主業)으로 하는 만큼 공연 분석은 날카로웠고 해석은 매서웠다. 문장으로 삼켜내야 할 말들만 쏟아내면서도 무대의 전경을 그릴 수 있도록 섬세했다. 자신감 넘치는 글쓰기는 그녀의 강력한 무기로 느껴졌다. 공부의 시작과 끝이자, 논문 쓰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논문의 힘』(2016, 현실문화)은 논문 쓰기의 바이블로 통하면서 많은 독자와 대학원생들에게 읽혔다.

“논문 글쓰기 지도는 제가 조금 자신 있습니다. 연구 논문의 방향을 잡는 것부터 그것을 풀어내는 데는 방법이 있거든요.”

그녀의 이미지가 날카롭고 차가울 것이라는 짐작은 비껴갔다. 취미로 여전히 ‘발레’를 배우고 있다는 그녀의 말에 ‘마음의 유연함’이 느껴졌고,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아이’ 같은 마음이 읽혔다. 철저하게 고립된 방식의 글쓰기를 좋아하는 듯했다. 2005년에는 혼밥과 혼술을 즐기면서 써 내려간 고독한 글쓰기로 공연 비평지 《공연과 리뷰》에서 선정하는 연극평론 부분 <비평상>을 받았고, 평론집 『비주류들의 말하기-2000년대 한국연극의 새로운 입장들』(2021, 1도씨)로 한국연극평론가협회에서 주관하는 ‘2021 여석기 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주말 대학로는 한산했다. 인터뷰 약속 장소의 문이 닫혀 있었고, 김기란 선생은 20분 전 인근 편의점에 도착해 있었다. 듣고 담아내야 할 것들이 방대해 월간 《한국연극》의 김상옥 객원기자가 동행했다. 주 50시간 이상을 강의한 적도 있다는 그는 불필요한 생활을 최소화하고 연극 보고, 강의와 평론, 연구논문 글쓰기로 허리가 고장난 것 같다며 앉아서도 몸을 여러 차례 좌·우로 움직여 보였다.

| 치열하게 글 쓰고 날카롭게 연극을 평론하는 김기란

그녀의 어린 시절은 특별했다고 고백했다. 돌이켜보니 자폐적 기질도 있었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혼자 책을 읽거나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여전히 대인관계도 서투르다고 했다. 1984년도 여고 시절, 학생 잡지에 응모한 수필이 당선되어 연극 티켓 두 장을 받았고, 그로 인해 김기란의 삶은 어두운 극장 한 모퉁이에서 연극을 보고 평론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홍익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해서는 영어 연극을 했고, 그때 경험으로 극문학과 연극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었다.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 편입한 뒤부터, 그녀의 인생은 매일 연극을 보고 분석하는 일에 매달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석사까지 마친 뒤 박사 과정 중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귀국 후 연세대학교에서 한국연극 및 희곡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기란 선생을 만나 ‘평론가라는 직업은 서서히 어두워지는 극장 한 모퉁이에서 연극을 보는 것이고, 매주 만나게 되는 연극이 밥벌이의 밑천’이라고 그가 어느 글에 썼던 말을 꺼내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연극을 보지 않으면 논문을 쓰거나 연구 활동을 할 수 없어요. 연구자에겐 현장이 아주 풍성한 먹거리랄까요. 강의도 그렇고 제 모든 활동은 결국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것으로부터, 연극이 계속 공연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돼요.”

김기란 선생은 치밀하게 연극을 보고 얻게 되는 분석과 진단을 통해, 한국 연극에 대한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무대 밖으로 꺼내 놓고 있다. 김기란 선생은 외출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안한 복장으로 인터뷰에 임했고, 웃음이 끊이질 않으면서도 전문 분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매서운 말로 날아왔다.

─ 고교 시절에 받았던 연극 티켓이 선생의 운명을 바꾸었군요.

“여고 시절, 여기저기에 글을 써서 보내봤는데, 그중 한 학생 잡지에서 제 글을 실어줬어요. 그리고 원고료 대신 연극 티켓 두 장을 주더라고요. 작품은 김미숙, 이승철 배우가 주연한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였어요.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어느 커피 광고에 오페라 연출가가 나와 한 말이 유행했는데요. ‘오페라를 처음 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보고, 제가 딱 그랬어요. 어떤 조직 생활이든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오던 제가 그 연극을 보는 순간, 이건 굉장히 다른 세계이고, 내가 사람들과 실제 섞이지 않아도 다른 이의 삶을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홍대 영문과에서 극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신 이유가 ‘사회적 관계가 낯설었던 선생에게 연극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영문과에서는 3, 4학년생이 주축이 되어 영어 연극을 만들어요. 그때 손턴 와일더의 <중매쟁이(matchmaker)>를 올리면서 남자 역인 바나비를 맡았어요. 머리를 싹둑 자르고 연기를 했는데, 대학로에서 연극 조연출을 하던 선배가 저한테 계속 연극을 해보라고 권유했어요. 아마추어 연극이었지만 일반 관객들도 많이 오고 반응이 좋았거든요. 사회적 관계가 낯설었던 저한테 연극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준 도구였던 거죠. 그때 제가 연극을 보고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저 자신으로만 침잠하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실 84년의 관극 경험 때문에 대학 진학을 고민할 때부터 연극이나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방목형이신 부모님이 그것만은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비혼으로 살아가겠다고 10살 무렵부터 부모님께 호언장담했는데, 네가 그걸로 먹고살 수 있겠느냐고 걱정하셨던 거예요. 타협책으로 영문과에 갔는데, 일단 극문학이 강세인 영문학을 배우면 나중에 연극을 할 기회가 생길 거라는 기대감도 있었어요. 그런데 남의 나라 문학을 배우다 보니, 우리나라 문학을 공부해 보고 싶어서 국문학을 복수로 전공했어요 한국문학에서 극문학은 되게 마이너에요. 당시엔 또 월북 작가 해금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라, 다룰만한 극작가나 작품도 많지 않았어요. 다시 연세대 국문과로 편입해서, 처음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 마이너이기 때문에 오히려 연구하고 발견할 게 많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 선생의 글을 읽을 때는 무대를 바라보는 논점이 분명하고, 분석과 해석이 날카롭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글을 뒷받침하는 자료도 풍부하고요. 정돈이 잘 된 글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문체(文體) 때문에 차갑다는 오해를 받을 것 같은데.

“간결하고 건조하죠. 그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체에요. 제 인상이 무뚝뚝한 편이라, 글이 인상만큼은 아닐 거로 생각하는데.(웃음) 사회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고 뾰족한 구석이 있다 보니, 좋은 의도로 이야기해도 상대방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글을 썼어요. 글은 최종 인쇄가 될 때까진 계속 고치고 덜어낼 수 있지만, 말을 한 번 던진 뒤엔 어떤 부연 설명을 붙여도 회복이 안 되잖아요. 진심을 전하는 데엔 말보다 글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독일 유학하면서 이중 언어 상황에 놓이게 되니까, 우리나라 말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는데요. 우리말에는 수사가 되게 많아요. 독일에서 보고서를 작성할 때 불필요한 관형사, 부사를 쓰지 않는 습관을 길렀어요. 쓰더라도 내용 함축적이지, 단순히 문장을 꾸미기 위한 것은 아닌 거죠. 저는 감상적인 글보다는, 논문이나 평론같이 문제에 집중하는 딱딱한 글쓰기를 좋아해요.”

─ 1998년도 월간 《한국연극》 8월호에서 평론 데뷔를 하셨더군요. 제목이 “기대에 못 미친 배우 중심의 극단, 극단 연극세상의 <좋은 녀석들>”이었지요. 한창 글을 쓰기에 뜨거운 나이었을텐데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나요.

“서른한 살이었는데 안 뜨거웠죠. (웃음) 되게 위축돼서 쓴 글이었거든요. 그 해에 오태석 작가의 <천년의 수인>이 발표됐고, 동숭아트센터에서 작품을 알리기 위해 리뷰 공모를 했어요. 세 명에게 상을 줬는데, 제가 가작을 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어디 글을 낼 때마다 심사평이 안 좋았어요. 주위에 화려한 글쓰기를 하는 국문과 친구들이 많아 스스로 비교하기도 했고요. 내 글이 통과가 안 되는 건, 분석력이나 문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유학을 하러 간다고 하니,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이하 공이모)에서 총무를 맡고 있던 저에게 선생님들이 기회를 주셨어요. 선생님들의 호의로 쓰게 된 것이고, 편안한 마음을 갖고 7월 월평으로 발표했던 글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눈물이 쏙 빠질 만큼 그분들이 싸늘하게 평가하시는 거예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연극》에 발표했던 건 더 공부해서 내 글을 읽게 만드는 힘을 길러야겠다 다짐하며, 되도록 무난하게 쓴 글이에요. 그다음 달에 독일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 독일로 떠나기 전에 선생이 지켜봤던 세기말 한국 연극 무대의 풍경은 여전히 유효한가요? 당시 구희서, 김방옥, 김미도, 안치운, 이영미 등이 연극 평론계를 이끌었지요.

“90년대는 한국 연극의 르네상스였어요. 당대 연극 평론가 중엔 국문학이나 영문학을 전공한 분들이 많았어요. 그 와중에 외국에서 극문학 혹은 드물지만, 연극학을 공부했던 분들이 속속 국내로 돌아와, 지금은 중견이나 원로가 되셨죠. 그분들이 새로운 외국 희곡과 공연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셨어요. 우리의 삶을 담은 창작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열망도 클 때였거든요. 90년대 대학로는 새로운 창작극과 번역극으로 넘쳐나는 공간이었고, 저는 여관을 얻어야 하나 생각할 정도로 매일 대학로를 찾았어요. 저녁만 되면 나가서 혼자 연극을 봤습니다. 당시 자신을 굉장히 충만한 상태라고 여겼어요. 그러다 독일로 갔는데, 두뇌가 쪼개질 만큼의 충격을 받았죠.”

“독일인들은 제 삶을 너무나 충만하게 채워준 연극들과는 너무나 다른 것들을 연극이라 말하더라고요. 제가 한국에서 봤던 것들은 대개 블랙박스나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배우들이 희곡의 인물을 구현하는 연극이었어요. 국내에서 월북 작가들과 브레히트 작품이 막 해금되던 시기여서, 말로만 듣던 서사극 공연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말하자면 90년대 한국연극계는 드라마 연극의 르네상스인 동시에 새로운 이론과 작품, 양식들이 소개되던 때였어요. 특정 장르에 쏠려있었지만, 그 틈새에 다양한 기운들이 있었죠. 그래서 독일로 떠나기 전에는 제가 본 연극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독일 가자마자 베를린대학 연극학과의 에리카 피셔 리히테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이제 드라마 연극 안 한다. 그건 한국에서 더 많이 할걸. 희곡 텍스트 분석 같은 것도 독문학과에서 하지, 연극학과의 연구 대상은 공연이야. 드라마를 공부하고 싶다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맞아.’ 전 벼락을 맞은 거 같았어요. 희곡 평론이나 문자 텍스트에 익숙했던 제가, 베를린에 가서 일 년 동안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연극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매일 만났습니다.”

─ 당시 독일 연극의 흐름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군요.

“독일 연극 중에서도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소개된 극단이 아마 샤우뷔네의 작품일 거예요. 사실 1998~2002년까지, 제가 독일에 있을 때 샤우뷔네에 대한 평가는 중도-보수적 경향의 연극을 하는 단체였어요. 익숙한 드라마 텍스트에 20% 정도의 변형을 가하는 방식이었죠. 독일은 공연 아카이브가 정말 잘 돼 있어요. 연극학과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동시대 공연을 봤는데, 드라마 연극이 거의 없는 거예요. 제가 공부한 모든 틀은 드라마 연극에 맞춰져 있는 상태여서,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했어요. 오랫동안 특권적이고 독점적인 권력을 갖고 있던 희곡의 언어가 아니라, 공연, 특히 인간의 몸으로 만들어내는 퍼포먼스에 대해 집중적으로 배웠어요. ‘매체와 연극’이라는 세미나에서는 공부하는 연극학과 건물을 다 비웠어요. 방을 하나씩 맡아 학생들이 꾸미고 싶은 대로 꾸며보는 과제였어요. 이론을 공부하는 연극학과이지만 수업 방식도 굉장히 실험적이었죠. 전 원래 박사 논문을 타진하러 간 거였지만, 리히테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기초 세미나부터 들었어요. 박사 논문을 쓸 기회와는 좀 더 멀어졌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실험과 시도가 있었던 밀레니엄 시대 핫플레이스에서 다양한 연극을 원 없이 봤으니까요.”

| 독일에서 돌아오다

4년 간 독일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온 김기란은 독일 연극학의 주요 쟁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광폭적인 연극비평으로 이어졌다. 2008년 상반기, 원작을 재창조한 매력적인 공연들 <김현탁의 산불>, <이옥의 히스테리, 정조의 히스테리>, 김낙형의 <맥베드>를 평론한 글에서는 ‘희곡 텍스트는 미완의 텍스트이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연극 작품의 충분조건일 뿐 필요조건은 아니다’라고 썼다. 이처럼 한국연극 현상에 나타난 포스트드라마의 방향성에 대해 진단했다. 박근형 연출가의 대표작 <청춘예찬>(2005)에서는 ‘소품을 흥미롭게 활용해 공간이동의 대비를 나타냄으로써, 연극 기호의 유동성이 무대에서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다’고 진단했다. 관객으로서 가장 연극답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며,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술, 탄탄한 극작법을 지닌 희곡 텍스트, 연극 기호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살려낸 작품 등으로 평가했다. 김기란은 “저는 평론 글을 쓸 때 희곡에 의존하지 않아요. 철저하게 공연을 보면서 몸과 시선의 감각으로 받아들인 대로 글을 쓰지요”라고 말했다.

― 한국으로 돌아온 뒤 광폭적인 연극비평을 하셨던데. 2002년 이후부터 한국연극 무대의 풍경은 글을 놓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었나 보군요.

“여전히 드라마 연극의 힘이 셌지만, 희곡의 존재를 상정할 수 없는 공연들이 늘어났고, 평론계에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이 생겨났어요. 공이모에서는 희곡 평론과 연극 평론을 구분하는 인식의 전환도 있었죠. 우리나라가 앞서가지는 않았지만 빠르게 뒤쫓아가고는 있었어요. 그때 용기를 내서 한스-티스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한국에 소개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 이론을 예비하는 중요한 논문이 있어요. 독일 연극학과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짧은 학술 논문인데 제가 그걸 번역해서 공연 관련 잡지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단 한 군데도 실어주지 않았어요. 내용이 너무 어렵고, 우리 연극의 실정에 맞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제가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번역한 이후, 드라마 연극의 반대자로 찍혔는데요. 다른 걸 얘기하니 그 목소리가 더 크고 세게 들렸던 거 같아요. 근데 전 드라마 연극을 정말로 좋아해요. 제 평생 소원도 잘 만든 우리의 드라마 연극 한 편을 보는 거예요. 처음에 이 세계로 이끌었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도 드라마 연극이었고요. 포스트드라마는 우리의 의지, 취향, 애호도와 상관없이 도저한 세계 연극사의 흐름입니다. 드라마 연극만 붙잡고 있어서는 우리 연극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생각하고 있어요. 귀국해서 드라마가 아닌 연극들을 열심히 찾아봤어요. 2008년 당시 제가 매력적으로 느꼈던 건 김현탁 연출가의 <산불>이었는데, 제 생각과 이론에 맞는 작품을 발견했던 거죠. 아무리 멋진 이론을 들여와도, 우리 공연 현장에서 그것이 구현되지 않으면 설명해내기가 어렵거든요. 이후 김현탁의 모든 공연을 다 봤어요. 그의 작품이 인정받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레만의 글을 소개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아서, 한국연극계에서는 그런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전 늘 ‘이론이 현장을 따라가지 못 하는구나’라는 반성을 합니다.”

― 2005년에는 현대미학사 《공연과 리뷰》에서 선정하는 비평상을 받으셨지요.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번역하기 전, 관련 내용 글을 번역해서 소개하고 싶었어요. 레만의「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이해하기 위하여」라는 소논문인데, 매체에서 다 거절당했어요. 유일하게 실어주신 분이 《공연과 리뷰》의 김태원 선생님이세요. 신진에게 개방적이시고 좋은 아티클을 선취하는 감각이 있으시죠. 번역본을 싣고 나니, 선생님께서 계속 글을 써보라고 용기를 주시더라고요. 번역 논문은 내용이 어렵고 우리 현장에 금방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걸 풀어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독일 연극학의 새로운 개념들」이라고 해서, 퍼포먼스적 전환에 해당하는 이론과 개념들을 5회에 걸쳐 《공연과 리뷰》에 실었습니다. 당시 좋은 반응들이 많았고 그 글로 상을 받게 됐어요.”

― 『비주류들의 말하기: 2000년대 한국 연극의 새로운 입장들』로 2021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여석기 연극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작년에 국립극단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이태주 선생님이 쓰신 70년대 연극을 다룬 평론집을 읽었어요. 그 글은 70년대 연극사 자체에요. 저한테도 연극사 기술에 대한 욕망이 있어서, 한 세대의 흐름을 보여줄 수 있는 평론집을 만들어봐야겠다고 다짐했어요. 1998년 이후로 2021년까지 쓴 글 중 연극사적 흐름을 형성할 수 있는 내용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저는 시종일관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드라마 연극이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그런 내용으로 글을 모을 수 있었어요. 『비주류들의 말하기』는 개인적으로 저의 관극 인생 35년을 마무리하는 심정으로 낸 거예요. 왜냐면 2019년에 허리 디스크가 탈출하면서 강직이 왔거든요. 허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진통제로 버티며 누워 지냈고요. 그 이후로는 오래 앉아 있지를 못해요. 연극을 보면서 제가 힘든 건 참을 수 있는데, 자꾸 몸을 움직이게 되니까 주변 관객들이 싫어하더라고요. 이제 연극을 못 볼 수도 있겠다는 낙담 속에서 더 늦게 전에 그동안 쓴 평론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낸 건데 큰 상을 주셔서, 진통제를 먹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웃음)”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읽으면서 당시 한국 연극에 변화의 지점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앞으론 이러한 흐름으로 가겠구나라는 신호를 받았지요. 번역을 결심할 만큼 레만의 이론에는 어떤 특별한 점이 있나요?

“『Postdramatisches Theater』은 1999년 독일에서 출판되자마자 필독서처럼 읽히는 책이었어요. 한국에선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적다 보니, 영어번역본만 나온 상태였지요. 영미권은 여전히 드라마 전통이 강해서인지 영어번역본은 완역이 아니라 드라마 연극에 해당하는 부분만 주로 번역이 됐고요.『Postdramatisches Theater』 전반부에는 드라마 연극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담겨있거든요. 드라마 연극을 전복하되, 그것을 몸소 체험한 뒤, 드라마 연극을 넘어서는 대안을 제시하는 거예요. 전반부에 비극으로부터 시작하여 드라마 연극, 그다음 이것과 다른 포스트드라마로 책이 구성돼있어요. 영어번역본은 레만의 의도를 벗어나 후반부 내용에서 많은 부분을 누락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레만의 이론에 대한 오해도 많았어요. 그것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완역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더라고요. 레만 선생님도 발췌 번역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고집을 부렸어요. 나중에 굉장히 후회했죠. (웃음) 5년 간 휴가 한 번 못 가고 책상에 붙어서, 팔꿈치가 빨갛게 짓무를 때까지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작업했어요. 독일어를 그다지 잘하지 못하니까 더 힘들었어요. 번역은 해도 본전이고 나쁜 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될 텐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세계 연극사의 흐름이라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 논문을 검색하니 상당한 양이 뜨더군요. 그중 단연 포스트드라마 연극 미학과 배우, 무대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김기란 선생이 생각하는 요즘 한국 연극의 흐름은.

“ ‘낙담’입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가 비대면을 경험했잖아요. 그때 이게 어쩌면 천우신조라는 생각을 했어요. 익숙한 흐름을 끊기가 어려운데, 우리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로 생각한 거죠. 그동안 공연을 하던 방식, 평가하던 방식, 배우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연극을 할 것을 요구받게 되었잖아요? 기존의 물리적 공간에 다 같이 모여서 연극을 보던 방식과는 다른 것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데, 아직은 호흡이 짧은 실험들과 소비되는 시도들만 보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은 신촌극장처럼 작은 공간을 발견했다는 거예요. 예술의 생명은 다양성이잖아요. 2030세대의 젊은 연극인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 위해 분발하고 있어요.”

― 『서울의 연극』(2019), 『극장국가 대한제국』(2020), 좀 튀는 『논문의 힘』(2016) 등도 출판하셨는데.

“제가 국문과 박사 논문으로 대한제국 시절 극장사를 썼어요. 『서울의 연극』은 청탁받아 쓰게 된 책인데, 이 책의 포맷이 되는 게 『극장국가 대한제국』이에요.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극적인 효과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문화적 퍼포먼스에 대한 내용입니다. 제 박사 논문 주제이자 박사 후 연구 과정 주제에요. 정말 아끼는 책입니다. 전 독일에서 논문과 보고서를 쓰는 것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했어요. 독일 대학은 학술적인 글과 감상적인 글쓰기를 철저하게 구분해서 전자를 집중적으로 훈련시켜요. 리히테 선생님께 박사 논문 지도를 받으려고 독일 유학 전 프로포졀을 보낸 적이 있는데, 한국으로 피드백을 보내셨더라고요. ‘이건 프로포졀이 아니야. 네가 뭘 말하고 싶은지도 분명하지 않고, 그냥 공부 열심히 한 걸 잘 정리한 거야. 말하자면 이건 설명문이지. 네 주장이 담겨 있고 그걸 논증하기 위한 논문의 프로포졀이 아니란 말이야.’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글쓰기를 익혀야 해요.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며, 논리적 글쓰기에 관심을 두고 강의에 반영했습니다. 입소문이 날 때쯤 황우석 교수의 연구 윤리 위반 사건이 터졌고, 이후 논문 쓰는 법에 대해 도움을 달라고 강의 제의가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현실문화 출판사 사장님과 식사를 하면서 그 이야기를 무심코 했는데, 저녁에 전화를 주셨어요. ‘그거 책으로 냅시다.’”

| 김기란이 말하는 대학로 연극 문화, 동시대 연극들

김기란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여고 시절을 돌아 독일 유학 시절과 《공연과 리뷰》 이야기를 통해, 연극 비평을 쉼 없이 달려온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가공되지 않고 기술을 부리지 않는 말과 성격은 단단한 글로 베여있었고, 지독한 글쓰기를 통해 치유를 받는 것 같았다. 녹음을 중단시킨 채 바람을 쐬고 들어와 인터뷰를 이어갔다. 숨김없이 꺼내 놓는 말에 놀랐고, 논리적으로 대답하는 방식이 습관처럼 느껴졌다.

― 코로나 시대 한국 연극의 현상들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나요?

“올해 초 EBS와 이런 내용의 인터뷰를 했어요. 포스트코로나 시대 공연 예술의 미래는 두 가지로 예측된다. 첫 번째는 연극판 넷플릭스, 또 하나는 비대면 상황에서도 공연예술의 본질을 유지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공연 양식을 찾아내는 것이다. 두 가지 전망 중 저는 후자를 지지한다고 말했어요. 전자는 이미 공연 예술의 본질에 맞지 않는 거니까요. 영화의 등장에 맞선 서사극이 그랬던 것처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분명히 새로운 형식을 발견할 것이고, 그런 움직임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대에게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더 익숙할 수 있습니다. 국공립극장의 경우 아직도 기성세대 관객을 좀 더 염두에 두지만, 최근의 <기후비상사태:리허설>처럼 성취도와 무관하게 다른 걸 해보려는 시도도 있어요. 아쉬운 것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결합해 서로 부스터 샷 같은 역할을 나누기보다는 현상적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점인데, 그래도 저는 이 현상에 숨어있는 긍정적인 힘 또한 믿고 싶어요.”

― 연극 평론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철저히 작품 편입니다. 연출가나 작가의 의도 말고, 저한테 온 것들에 대해서만 말해요. 리플렛이나 사전 정보 없이 공연에 저를 온전히 맡기는 편이에요. 평론은 숙명적으로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작품을 평가한다는 마음보다는, 저한테 온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되도록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쓰려 합니다. 그다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잘 읽히는 문장이에요. 문장을 짧게 쓰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잘 전달되도록 노력합니다. 그러려면 생각이 분명해야 해요. 두루뭉술하거나 어설프게 알고 있는 경우, 글에선 금방 표가 나니까요.”

―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장인 심재민 평론가는 SNS에 이런 문장을 남겼어요. 요즘 선진국들이 고민하는 의제인 기후 위기, 젠더, 메타버스 등의 테마를 강조하는 연극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선점만 할 뿐 영향력 있는 공연들은 없다고 진단을 하시던데.

“전적으로 동감해요. 얼마 전 창작극 심사를 할 때도 느꼈지만, 내용이 몇 개의 키워드에 쏠리더라고요. 저는 그 키워드가 다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령 퀴어를 다루는 경우에도 내용과 형식이 다양해야 하는데, 키워드로만 소비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이걸 소재주의라고 불러요. 사실 퀴어, 페미니즘, 기후와 환경 위기가 2~3년 고민하고 때려치울 문제는 아니잖아요. 특정 문제에 쏠림이 있을 뿐, 지속 가능한 주제로 전개되는 시도가 많지 않다는 거죠. 물론 평론도 다양해져야죠. 한 작품을 여러 사람이 써서 논점을 비교하며 관객들이 읽을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해요.”

― 글쓰기 방식과 플랫폼이 다양화되고 있는 요즘, 평론가의 생존 방식과 차별성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웹진의 경우 공연 정보나 평가의 순환율이 높잖아요. 반면 연극 평론지는 무겁고 순환율이 낮죠. 젊은 연극인들은 웹진을 통해 공연 정보부터 평론까지 소통하는데, 일 년에 네 번 종이책으로 발행되는 《연극평론》은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 보니, 평론의 대상으로 삼는 공연들이 조금 제한적이지 않나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연극평론가협회에서도 《연극평론》이 좀 더 대중적인 잡지가 되기를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적으론 방법을 찾기 어려워요. 일 년에 네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종이 잡지가 순환율을 따라잡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럼에도 여전히 종이라는 매체만이 담당할 수 있는 내용은 있습니다. 좀 더 심층적인 내용을 다뤄야겠죠.”

― 올해 한국 연극의 흐름과 특징에 대해 진단을 해주시지요.

“퇴행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2년 동안 연극인들이 생존을 위한 생활에 쫓기다 보니 그 후를 준비하기가 어려웠어요. 대면 시대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공연 준비만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요. 공연예술계는 2년 동안 멈춰있었지만, 비대면 상황의 새로운 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감각은 이미 달라졌어요. 예를 들면 좌석을 한 칸씩 비우고 앉아서 보는 게 쾌적하고 좋았거든요. 우리 삶의 패턴이 바뀌었어요. 2년 전에 비해 더 나빠지진 않았지만, 멈춰있던 공연 문화를 다시 이전 그대로의 형태로 마주했을 때, 달라진 문화적 경험 속에 있던 사람들은 그걸 퇴행적으로 느낄 수 있어요.”

―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맞는 작품들이 나와야겠군요. 김기란 선생이 주목하는 연출가와 작품이 있겠지요?

“극단 동의 강량원, 극단 돌파구의 전인철 연출가의 작업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변화를 지향하며 익숙했던 것과 조금씩이라도 다른 공연을 지속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어려운 일을 해내고 계세요. 젊은 연출가 중에서는 원지영, 송이원 연출가를 주목해요.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공연 공간에 대해 고민하고, 무엇보다 진정성이 담기지 않는 공연은 하지 않는 분들이라는 점에서 변화된 문화 환경에 적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신작을 기다리게 하는 분들이죠. 또한 기업으로서는 드물게 지속적으로 한국 연극에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 두산아트센터의 활약에도 많은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 앞으로 한국 연극은 어떠한 변화와 준비를 해야 할까요?

“이제 정말 체질을 바꿀 기회입니다. 위기가 기회에요. 어쩌면 기성세대가 ‘이것만 연극이야’라는 잘못된 사인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돼요. 교육, 현장, 평론, 지원의 방향 등이 새로 정립되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요. 변화에 대한 맷집을 기른 창작자들은 살아남을 거예요. 창작자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익숙함에 함몰되는, 달콤한 주례 비평에 안도하는 매너리즘입니다.”

― 독일에서 돌아온 후 20년 간 하루 5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을 만큼 대학 강의와 폭넓은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허리 디스크가 탈출했나 봐요. 저는 연극 보고 책 읽고 강의하고 글 쓰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밥, 빨래, 청소 같은 일상적인 일은 거의 하지 않고요. 큰 욕심이나 욕망이 없어서인지 늘 만족합니다. 저는 외로움보다 지루함이 더 무서워요.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삶이 지루하다고 생각했어요. 삶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는 뭔가를 찾는 게 인생의 큰 숙제였어요. 그러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보고, 이거다, 이것만큼 재밌는 세상은 없다고 느꼈죠. 저는 공연분석 수업을 가장 좋아하는데요. 학생들에게 공연 보라고 무자비하게 종용해요(웃음). 학생들은 친구들이나 지인 공연을 주로 봐요. 제가 출강하는 학교는 서울에 있지 않아서인지 다들 대학로까지 자주 나가질 못해요. 어저께 본 공연 얘기를 꺼내면, 졸던 학생들도 다 깨어나더라고요. 학생들은 새로운 것을 알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지만, 기회를 잘 못 만나는 거죠. 일단 공연을 많이 보게 하고 연극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깨주려고 합니다. 학생들과 공연을 보고 토론하는 그 수업이 제일 재밌어요.”

인터뷰를 마치고는 서지헤 연출가의 <아일랜드>를 함께 봤다. 공연은 초연 때보다 연출의 섬세함이 살아나 있었고, 마지막 ‘안티고네’ 극중극 장면에서 두 죄수는 죽음과 공포의 절망을 벗어던졌다. 제도의 형벌을 ‘인간의 자유’로 초월하는 장면에서 최무인, 남동진의 연기는 돋보였다. 한국 공연사의 역사로 남고 있는 실험극장의 <아일랜드>(윤호진 연출)는 이승호(윈스톤), 서인석(존)으로 출발해 임현수, 유정기, 김갑수 배우 등으로 세대 교체되었고 1977년 11월에 초연해 1987년 7월까지 10년 동안 관객 15만여 명을 동원했다. <아일랜드>를 바라보는 현대적인 해석과 2평 남짓한 죄수의 방은 두 배우의 연기로 무대의 심연(深淵)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전통적인 <아일랜드> 무대와 결을 달리하면서도 역사적인 공연이라는 전통을 잇기에 충분했다. 공교롭게도 김기란 선생도 두 배우의 브로맨스가 빛나던 이 작품을 기억했고, 1987년도 공연 팜플릿은 변하지 않은 채로 그녀의 책장에 있다고 말했다.

공연을 본 뒤 김기란 선생은 연극 <타자기 치는 남자> 때부터 배우 최무인의 팬이 됐다며, 어린아이처럼 분장실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극장 앞에 섰고, 연출가는 스마트폰을 들고 촬영 버튼을 눌렀다. 대학로를 걸으면서 한 음식점으로 향했고, 두 시간 동안 비공개 대화를 나눴다. 앞으로 계획을 묻자 “하던 대로 할 겁니다. 공연 보고, 리뷰 많이 쓰고. 다른 선생님들의 선택을 받지 않는 공연들을 더 많이 들여다보려 해요. 기록이 되어야 하니까요. 보석이 될 수 있는 원석들을 발견하는 게, 연극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제가 연극에 다시 돌려줄 수 있는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기란 선생은 자기 말처럼 사회 관계에 서투르지도 않았고, 현실을 진단하는데도 날카로웠다. 가공되지 않은 솔직한 말로 무장 해제시키는 어린아이의 매력도 있었다. “연극 보고 책 읽고 글 쓰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그녀의 ‘혼밥’은 글을 쓰기 위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선택이었고, 사회 관계는 철저하게 글을 통해 이뤄졌다. 그녀의 지독한 글쓰기는 고립과 외로움으로 소화(消化)된 세상이었고, 독자들은 그녀의 글로 소통하고 있었다. 김기란의 ‘고립’은 한국 연극의 현상들이 변화하는 신호로 느껴졌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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