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방송국도 살렸다, 박은빈이 갱신한 인생 캐릭터
[양형석 기자]
90년대까지만 해도 배우보다는 '스타'의 이미지가 강했던 이병헌은 2000년 박찬욱 감독의 < 공동경비구역JSA >에서 이수혁 병장이라는 '인생 캐릭터'를 만나면서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이병헌은 2005년 <달콤한 인생>의 김선우, 2010년 <악마를 보았다>의 김수현,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광해군과 하선, 2015년 <내부자들>의 안상구, 2020년 <남산의 부장들>의 김규평을 연기하며 인생캐를 수시로 경신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배우 송강호도 마찬가지. 대한민국 3대 영화제(청룡상, 대종상, 백상예술대상)에서 무려 8번의 남우주연상 및 대상을 수상했던 송강호는 이제 대표작이나 인생캐릭터를 따로 선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배우'가 된 지 오래다. 송강호는 올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를 통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또 하나의 인생캐릭터를 추가했다.
이병헌이나 송강호처럼 수시로 인생캐를 경신하는 배우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배우들은 연기활동을 하면서 단 하나의 인생캐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 배우는 아직 만 29세에 불과한 젊은 나이에도 수시로 인생캐를 경신하며 대중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연일 자체 최고시청률을 작성하며 방영 6회 만에 두 자리 수 시청률을 넘보고 있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박은빈이 그 주인공이다.
▲ 박은빈은 <청춘시대>에서 유쾌한 여대생 송지원을 연기하면서 단아했던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는데 성공했다. |
ⓒ jtbc 화면캡처 |
아역배우로 시작해 데뷔 20년을 훌쩍 넘긴 중견배우(?) 박은빈은 그동안 <무인시대>,<왕의 여자>,<천추태후>,<선덕여왕>,<계백>,<구암 허준> 등 여러 사극에서 주로 단아한 캐릭터들을 연기했다. 그런 박은빈이 <청춘시대>에서 머리 좋고 성격도 좋은 데다가 예쁘기까지 한 '모태솔로' 송지원을 연기한다고 했을 때 시청자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보여준 박은빈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은빈은 '여자 신동엽'으로 불릴 정도로, 야한 농담도 서슴지 않는 유쾌한 여대생 송지원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렇다고 송지원이 진지함이라곤 찾을 수 없는 속 빈 캐릭터는 아니었다.
송지원은 전 남자친구에게 끌려다니는 예은(한승연 분)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은재(박혜수 분)에게 "사람마다 다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야. 그 사정을 알기 전까진, 이렇다 저렇다 말하면 안 되는 거고. 너도 그런 거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남들은 도저히 이해 못 해도 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라는 어른스러운 말로 '선배미'를 뽐내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박은빈이 연기했던 송지원 캐릭터와 실제 배우 박은빈의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실제 박은빈은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연기 활동을 했기 때문에 작은 일탈조차 해볼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을 가진 박은빈이 오직 연기력 만으로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송지원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탄생시켰고 이로 인해 박은빈이 할 수 있는 연기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는 점이다.
▲ 박은빈은 <스토브리그>에서 프로야구단 최초의 여성 운영팀장 이세영 역을 맡아 걸크러시 매력을 뽐냈다. |
ⓒ SBS화면캡처 |
박은빈이 2019년에 출연했던 드라마 <스토브리그>는 노골적인 야구드라마다. 그것도 선수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아니라 단장과 프런트가 중심이 돼 꼴찌팀이 스토브리그 기간 동안 전력을 보강해 강 팀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 드라마였다. 그런 <스토브리그>에 박은빈이 출연한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당연히 박은빈이 백승수 단장(남궁민 분)과 러브라인을 형성하는 '꽃병풍' 역할을 맡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박은빈이 연기한 이세영은 프로야구 유일의 여성 운영팀장이자 최연소 운영팀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나온다. <스토브리그> 출연 당시 만 27세에 불과했던 박은빈은 입사 10년 차의 운영팀장을 연기했다. 드라마에서 나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지만 팀 내 중견선수인 서영주(차엽 분)에게 "어린 놈이 싸가지 없이!"라고 당당히 소리치는 것으로 보면 이세영 팀장의 나이는 대략 3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된다.
하지만 박은빈은 자신의 실제 나이보다 한참 많은 프로야구단 운영팀장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특히 서영주가 연봉협상에서 단장과 마찰을 일으키며 단장의 무릎에 술을 뿌리자 서영주를 향해 컵을 던지며 "선은 네가 넘었어!!"라고 소리치는데 이 장면은 지금까지도 박은빈을 따라 다니는 '시그니처 대사'가 됐다. 그 밖에도 이세영 팀장은 중요한 순간마다 때로는 백승수 단장마저 압도하는 '걸크러시 매력'으로 시청자들을 사로 잡았다.
물론 선수단 관리를 위해 선수들이 옷을 갈아입는 라커룸에 수시로 드나들어야 하는 운영팀장의 업무특성상 여성이 운영팀장이 된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야구팬들의 지적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스토브리그>가 그 흔한 러브라인 하나 없이 19.1%의 높은 시청률(닐슨코리아 기준)을 기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나이를 뛰어넘어 이세영이라는 캐릭터에 완벽하게 녹아 든 박은빈의 기여도가 결코 작지 않았다.
▲ 박은빈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똑똑하면서도 순수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다. |
ⓒ ENA 화면캡처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이언트>,<낭만닥터 김사부>의 유인식 PD와 영화 <증인>의 문지원 작가가 의기투합해 제작을 결정한 드라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처음부터 박은빈을 주인공으로 낙점했지만 박은빈이 자폐연기에 부담을 느껴 거절했다. 이후 박은빈은 영화 <마녀2>와 드라마 <연모>에 출연했는데 유인식 PD와 문지원 작가는 영화와 드라마 촬영이 끝날 때까지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고 박은빈을 기다렸다.
박은빈은 제작진의 정성에 출연을 결정했지만 사실 자폐 연기는 배우로서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은빈은 자폐 스팩트럼 장애를 가진 우영우의 디테일한 특징들을 완벽하게 표현하면서 시청자들의 극찬을 받고 있다. 우영우가 뛰어난 머리와 번뜩이는 재치로 사건을 하나씩 해결하는 것도 보기 좋지만 여러 사건들을 접하면서 우영우가 변호사로, 그리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점점 성장하는 과정이 현재 시청자들을 사로 잡고 있는 포인트다.
사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방송하고 있는 ENA는 'HDONE', '채널N', 'sky Drama' 등을 거쳐 지난 4월 ENA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 신생채널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곽도원과 한고은이 출연했던 <구필수는 없다>에 이어 ENA 채널이 두 번째로 선보인 드라마다. 채널 자체가 시청자들에게 생소하다 보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역시 박은빈이라는 검증된 배우가 출연했음에도 0.9%의 초라한 시청률로 출발했다.
하지만 온오프라인에서 점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방영 6회 만에 1회 시청률의 10배가 넘는 9.57%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지상파와 케이블 드라마들을 제치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질주하고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15일 현재 넷플릭스 TV쇼 부문 월드랭킹 6위에 오르며 세계적으로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우영우 신드롬'의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또 한 번 인생 캐릭터를 새로 쓴 박은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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