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5월 목포는 치열했다
[이돈삼 기자]
▲ 옛 전남도청과 분수대 5.18 당시 최후의 현장이었던 옛 전남도청과 민주광장의 분수대 풍경. 5.18을 상징하는 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
ⓒ 이돈삼 |
1980년 5월 21일 석가탄신이었다. 광주의 옛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있었다. 오후 1시, 어디선가 흘러나온 애국가와 함께 금남로에서 도청으로 진출하려는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이 총을 난사했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광주시내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42년 전의 일이다.
시민들이 무장을 하게 된 계기다. 시민들은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를 몰고 나왔다. 광주 인근 나주 화순 영암 등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내 무장을 했다. 시민군이 결성됐다. 시민군과 계엄군과의 공방이 시가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 5.18 추모 조형물 옛 전남도청 앞에 세워진 5.18 추모 조형물. 5.18당시 최후의 항쟁지를 찾는 방문객들을 숙연케 한다. |
ⓒ 이돈삼 |
광주시내 5.18사적지는 모두 32곳. 5.18항쟁이 시작된 전남대학교를 시작으로 광주역 광장,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옛터, 금남로, 옛 전남도청과 5·18민주광장, 상무관, 광주YMCA와 YWCA 옛터가 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 5.18 당시 목포항쟁 80년 5월 목포역광장에 모인 목포시민들. 목포의 시위는 광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분하게 진행됐다. |
ⓒ 목포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
80년 5월 목포에는 광주의 상황이 바로바로 전달됐다. 김대중 연행 소식도 전해지면서 시민들이 동요했다.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광주의 차량시위대가 목포에 도착하면서 광주와 비슷한 양상으로 항쟁이 전개됐다.
22일 새벽, 목포역 대합실이 시위대에 의해 장악됐다. 안철의 집에 재야활동가들이 모여 민주화시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후 항쟁을 투쟁위원회가 이끌게 된다. 횃불시위도 진행됐다. 집회와 시위가 목포역을 중심으로 열리면서 체계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목포의 저력은 70년대에 형성된 민주화 세력의 역할이 컸다. 기독교계의 역할도 두드러졌다. 목포에는 대학이 3곳 있었다. 고등학생들도 조직을 결성해 마지막까지 활동을 했다. 무엇보다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인 김대중의 고향이 사실상 목포였다는 점도 지역사회의 결집력을 높였다. 광주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지역민의 헌신적인 지원도 한몫을 했다.
▲ 5.18전남사적지 표지석 목포역광장에 세워진 5.18전남사적지 표지석. 목포역광장은 80년 5월 목포항쟁의 중심무대였다. |
ⓒ 이돈삼 |
시간과 장소는 달랐지만, 목포항쟁은 광주와 비슷하게 전개됐다. 광주에 지휘본부 격인 전남도청이 있었다면, 목포에서는 목포역이 그 역할을 했다. 당시 목포역사 2층에 항쟁지도부와 상황실을 갖춘 목포시민민주투쟁위원회가 설치됐다. 광주의 도청처럼, 목포역이 목포항쟁의 심장부 역할을 했다.
▲ 5.18전남사적지 표지석 옛 목포중앙공설시장 앞에 세워져 있는 5.18전남사적지 표지석. 옛 목포공설시장은 광주양동시장처럼 공동체의 상징 공간이다. |
ⓒ 이돈삼 |
중앙공설시장 옛터도 목포 민주화 투쟁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당시 시장상인들이 시위대에 김밥과 도시락, 음료 등을 제공하며 격려했던 곳이다. 광주의 대인시장과 양동시장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목포공동체 정신의 현장이었다.
▲ 옛 목포중앙교회 80년 5월 목포항쟁의 중심 무대 가운데 하나였던 옛 목포중앙교회. 지금은 문화센터로 변모했다. |
ⓒ 이돈삼 |
목포중앙교회 옛터도 중요한 장소이다. 유신 독재시대부터 양심적인 종교인들이 자주 모여 시국을 걱정하던 곳이다. 80년 당시 재야인사와 목사들이 모인 목포시민민주투쟁위원회를 열고, 목포시민 결의문 채택하며 범시민 투쟁을 결의한 공간이다.
▲ 옛 목포동아약국 목포의 민주인사들의 사랑방이었던 옛 동아약국. 5.18전남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
ⓒ 이돈삼 |
광주의 민주화운동에 고 홍남순 변호사가 있었다면, 목포의 민주화운동엔 안철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철은 당시 동아약국을 운영하던 약사이고, 교회 장로였다. 5.18당시 목포시민투쟁위원장을 맡아 항쟁을 이끌었다. 안철이 운영한 약국이 동아약국이고, 약국 2층에 그의 집이 있었다.
▲ 5.18민주묘지에 있는 안철의 묘 동아약국 약사였던 안철은 5.18 당시 목포시민투쟁위원장을 맡아 항쟁을 이끌었다. |
ⓒ 이돈삼 |
그해 5월 목포는 치열했다. 하지만 지역 중심의 거점운동으로 전개되면서 희생자도 거의 없었다. 대책위원회의 조직적인 투쟁과 함께 이준규 당시 목포경찰서장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전남도경에 안병하 경찰국장이 있었다면, 목포엔 이준규 경찰서장이 있었다. 당시 신군부의 강경진압 명령을 거부한 서장이었다. 외곽저지선 보호와 자위권 행사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즉 시위를 진압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신군부에 의해 파면을 당했다. 그리고 계엄사령부에 구속돼 고문을 당하고,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 목포근대역사관 목포근대역사관은 80년 당시 목포해역사 사령부의 헌병대가 있던 곳이다. 항쟁에 참여한 민주인사들이 붙잡혀 많은 고초를 겪은 곳이다. |
ⓒ 이돈삼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