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영국 TV의 경이로운 FA컵 결승전 중계

김식 2022. 4. 1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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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영국에서 학사, 석사와 박사 과정을 공부했다. 학위 과정 사이에 시차가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1990년대, 2000년대와 2010년대를 모두 살아봤다. 스포츠가 삶의 낙인 필자는 영국에서 수많은 중계를 봤다. 자연스럽게 한국과 영국 스포츠 중계의 차이점이 뚜렷하게 구분됐다. 이번 칼럼에서는 영국 TV의 스포츠 중계를 보며 받은 ‘신선한 충격’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국대학은 1년이 3학기 제로 구성된다. 9월 말 개강해서 크리스마스 방학 전까지가 가을학기다. 봄학기는 1월에 시작해서 3월 말 부활절 방학 전까지다. 3주의 부활절 방학이 끝난 4월 중순부터 6월까지가 마지막 학기인 여름학기다. 학부에서는 주로 마지막 학기에 시험이 몰려 있다. 여름 방학이 코앞이지만, 그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서는 시험 기간을 버텨내야 한다.

정치학을 전공한 필자의 학부 생활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가뜩이나 영어 실력이 달리는데 정치와 철학을 넘나드는 전공 수업을 따라가기 버거웠다. 게다가 필자가 학부에서 본 모든 시험은 3시간짜리 논술 시험이었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런던 날씨는 계속 좋아진다. 그러나 학부생에게 마지막 학기는 언제나 우울했다.

시험 기간만 되면 많은 학생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시험 기간에는 공부 빼고 다 재밌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질색하는 토론 프로그램 시청이나 집안 청소도 이 기간에는 너무 재미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 불구화(self-handicapping)’라고 칭한다.

필자도 시험 기간이 되면 평소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 다트나 크리켓까지 챙겨보곤 했다. 원래 좋아했던 축구는 더 열심히 찾아봤다. 이 기간에 열리는 스포츠 중계는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웠다. 특히 1997년 여름학기 때 스포츠에 더 집착했다. 그만큼 그해 시험이 더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년 축구협회 소속의 모든 프로와 아마추어 클럽이 참가해 챔피언을 가리는 대회가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 대회다. FA컵은 시간제 교사, 전기공 같은 일반인이 소속된 아마추어팀도 리버풀 같은 프로의 빅 클럽과 맞붙을 기회를 얻는다. 이론적으로는 아마추어 클럽도 우승해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FA컵의 매력 덕분에 대진 추첨이 TV로 생중계될 정도로, 잉글랜드에서 이 대회가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1997년 5월 17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116번째 FA컵 결승전이 열렸다. 필자가 좋아하는 첼시가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미들즈브러였다. 편성표를 보니 BBC에서 낮 12시부터 중계를 한다고 한다. FA컵 중계를 하나도 놓치기 싫었던 필자는 12시부터 TV를 켜고 킥오프를 기다렸다.

TV 중계는 우선 FA컵의 역사, 위대했던 선수와 순간 등을 보여줬다. 올 시즌 FA컵이 거쳐온 각 라운드의 하이라이트와 결승에 올라온 첼시와 미들즈브러의 여정도 소개했다. 필자는 킥오프 전 각종 프로그램에 배당하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야 1시간은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오후 1시, 1시 30분을 지나도 킥오프할 기미가 안 보였다. 황당했다. “킥오프는 도대체 언제 하는 거야? 벌써 2시가 가까워지고 있는데!” 오기가 생긴 필자는 TV를 틀어놓고 했던 시험공부를 때려치웠다. 그리고는 TV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엇을 더 보여줄지, 경기가 언제 킥오프할지 정말 궁금해졌다.

드디어 선수단을 태운 버스가 웸블리에 도착한다. 선수들은 멋진 슈트에 선글라스를 끼고 영화배우 같은 포스를 뽐내며 경기장에 입장했다. 그들은 몸을 풀었다. 식전 행사를 거쳐 경기는 정확히 오후 3시에 킥오프했다. 방송 시작에서 킥오프까지 무려 3시간이 걸린 것이다.

필자는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도 축구 중계를 할 수 있구나”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축구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얼마나 대단하면 이런 중계가 가능할까” 하는 경외심까지 들었다.

결승전은 2명의 작은 거인인 첼시의 지안프랑코 졸라와 미들즈브러의 주니뉴 파울리스타의 대결로 주목받았다. 선제골을 기록한 첼시의 디 마테오(좌)와 졸라(우)가 기뻐하고 있다. [첼시 구단 홈페이지)]

웸블리의 관중석은 두 클럽을 상징하는 파란과 빨간색 셔츠를 입은 팬들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 장면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로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특히 북해에 인접한 소도시에서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런던의 웸블리를 찾은 미들즈브러의 팬들은 그해 프리미어리그(EPL)에서 강등될 것이 확정된 상태였다. 그래도 구단 역사상 최초의 FA컵 우승을 염원하며 똘똘 뭉쳐 있었다.

결승전은 첼시의 2-0 완승으로 끝났다. 루드 굴리트 감독의 첼시가 클럽 역사상 두 번째로 FA컵 우승을 달성한 것이다. 경기 후에도 BBC는 30분 이상을 할애해 하이라이트, 인터뷰, 시상식 등을 중계했다. 필자는 이날 경기를 보느라 무려 5시간 30분을 썼다. 프로그램 구성 방식 등의 차이로 올림픽 중계와 직접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겠지만, BBC가 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 중계에 할애한 것은 4시간이다.

지금도 BBC는 FA컵 결승전 관련 중계를 이렇게 한다. 2018년 BBC1은 FA컵 결승전 중계를 오후 2시에 시작해 저녁 7시 40분에 끝냈다. 밤 11시부터는 35분짜리 하이라이트를 보여준 데 이어, BBC2도 이날 FA컵 관련 프로그램에 2시간 10분을 투자했다.

잉글랜드의 FA컵 결승전 중계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 방송이 아니다. 필자가 본 것은 축구를 국가적인 축제로 승화해 만들어낸 한 편의 대서사시였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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