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이야기]위대한 놀이의 승부사 '연출가 윤시중'

2022. 3. 2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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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시중 연출가와 몇 차례 통화한 뒤 그의 연습실에서 만났다. 골목을 누비며 약도대로 찾을 수 없어 아파트 주변을 두세 번 돌고 나서야 만날 수 있었다. 밝은색 콤비 슈트를 입고 골목 한가운데서 그가 손을 흔들었을 때 위치가 확인됐다. 한성대 역에서 2㎞ 정도 떨어진 극단 하땅세 연습실은 장난감들이 즐비했고 책과 공연 소품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의 부친(父親)은 극작가 故) 윤조병 선생으로 70~80년대에 대표적인 희곡<건널목 삽화>(1970), <농토>(1981), <풍금소리> (1985) 등 40여 편의 희곡을 남겼고 마지막 유작이 된 작품은 시집 <커피 두고 갈게>였다. 연습실 한쪽 공간으로 두 사람이 마주할 정도로 이동식 탁자를 옮겼고 진한 커피 한잔을 내왔다.

벽면에 배우들이 작품 연구를 위해 단어를 연상해 지도처럼 그려 놓은 브레이밍스토리가 눈에 들어왔다. 극단 팻말이 된 <하땅세> 는 윤조병 선생이 생전(生前)에 운동할 때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땅으로 몸을 뻗고 좌우로 몸을 돌리는 동작’을 연속적으로 하면서 내뱉던 구호였는데 극단을 창단(2008)하면서 이름이 되어버렸다.

“하땅세라는 단어 리듬감은 좋았는데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고 세상을 살펴본다는 말이 그때는 싫었어요. 그런데 연극이라는 게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도 굽어보고 세상을 살려 보는 게 연극의 진리잖아요. 돌아가신 뒤에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부친은 원칙주의였고 연극을 대하는 성격은 깐깐하면서도 소탈했다. 아동·청소년연극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90년대부터 당시 변화되고 있는 국내 아동극을 매섭게 바라보고 회초리를 들었고 평론의 언어는 엄격했다. 창단부터 고인이 되실 때까지 하땅세 예술 감독을 하면서 아들과 극단의 삶과 예술적 좌표가 되어주었고 그도 아버지를 닮아 가고 있었다. 표정과 내면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단과 원칙이 살아있는 부친을 닮아있었고, 온화한 표정에도 시선은 칼날 같았다. 그의 부친 고 윤조병 작가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제서야 아버지 말씀대로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땅도 보면서 연극을 섬기게 됐다.

― 윤조병 선생 생전에 아들한테는 어떤 존재였죠?

“아버님도 글을 쓰는 작가로서 힘드셨던 것 같아요. 젊으실 때는 대쪽 같이 깐깐하셨고요. 자신과 자식한테 엄격하신 분이셨던 것 같아요. 연극을 하면서는 더 그러셨던 것 같고요. 제가 연극을 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깐깐함을 피하고 싶었고 많이 부딪쳤어요. 극단 하땅세가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는데 창단 초기에는 저와 극단의 작업 스타일과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죠(웃음). 연극을 다양하게 막 만들어 보는 게 제 스타일이었어요. 극단 이름도 처음에는 ‘망신살’로 지으려고 했을 정도입니다. ‘무대에서 연극이라고 너무 무겁게 폼 잡지 말고 실수하는 것도 보여주자’ 싶었는데 아버지가 볼 때는 20년 전에 얼마나 어설퍼 보이셨겠어요. 극단이 정착되고 극단 하땅세의 색깔을 만들어가면서 아버지도 인정을 해주셨어요.”

― 아버지의 큰 그늘을 연극인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군요.

“돌아보면, 무의식적으로 윤시중은 작가 윤조병 아들이란 약간의 거부감, 반항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과거에 아버지한테 벗어나려고 싸웠던 일도 많았어요. ‘큰 그늘 밑에서는 아무것도 안 자란다’라고 했더니 추성웅 선생님 2세들 얘기하면서 잘된다고 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 말을 듣고도 연극을 하는 환경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맨날 햇빛도 들지 않는 지하실에서 연습하고 고생하면서 연극은 돈이 왜 안되는지, 가난 할 수밖에 없는 예술인지 그게 궁금했고 그런 질문들을 던진 거죠. 당시에 저는 연극 환경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연극을 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안정되는 방법들과 기존 연극의 틀을 깨고 싶었다고 할까요. 연극을 하면 최고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께서 ‘연극을 하면서 최고가 어디 있나. 조금씩 연극이 다른 것 뿐이지’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이 이제서야 와 닿아요.”

하땅세 창단 무렵 연출가 윤시중은 아동극 <세상에서 제일 작은 개구리 왕자>(2008) 을 선보이면서 어린이극으로서는 연출의 놀이성과 공간, 이야기, 배우들의 선율이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해 이 작품으로 서울 어린이 연극제 최우수 작품상과 인기상, 특수부문 상을 받았다. 미국, 일본, 베트남, 터키, 튀니지로 공식 초청되었고 이듬해 두 번째 작품 <붓바람>이 평단과 해외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작가 윤조병의 아들에서 연출로 각인시켰다.

―아버지 연극을 보고 영향을 받을 수도.

“삼일로 창고극장, 문예회관 대극장(현 아르코 대극장)을 연극이 뭔지도 모르면서 아버지를 쫓아다녔어요, 처음 연극을 봤는데 재미가 없다고 느꼈어요. 작품은 기억이 안 나는데 공연이 끝나고 아버지를 따라 커튼을 한참 헤치고 분장실로 들어갔는데 그때 배우들이 계셨던 게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윤시중은 어린 시절부터 연극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부친의 영향은 그의 몸으로 흐르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연극을 한다고 말하니 선생님이 그를 크리스마스 때 발표할 연극 발표회 연출을 시켰고 학교는 크리스마스 연극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윤시중은 연극이 재미가 없어서 친구들끼리 연습을 시켰는데 그 작품이 1등을 했다. 연극보다는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미대에 진학해 미술 작가를 꿈꾸었고 아버지는 아들이 고3이 될 때 무용을 전공해 보라고 말했다.

― 미술을 좋아했는데 희곡 작가이신 아버지는 무용을 전공하라고 했군요. 진로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텐데.

“아버지 화법은 특유한 은유가 있어요. 대학에 꼭 가야 하냐며 ‘집 밖에 바람은 부는데 잔가지가 나무에 흔들리고’ 하시면서 대학에 안 보내려고 하셨어요. 은유 화법에는 미술을 전공하면 전시회도 개최하고 돈도 많이 들잖아요. 당시에는 작가로 사시니까 아들을 뒷바라지 할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안 되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고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하셨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요. 대학을 안 가도 할 수 있다는 믿음도 계셨던 것 같아요. 그 말씀이 지금도 판단이 잘 안 되는데 ‘인생은 꼭 대학 간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세상을 바라보시는 눈이 열려계셨던 것 같아요. 저도 우리 아이한테 ‘남들처럼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한 대로하면 가는 거지’라고 말하거든요. 이상하죠. 생각할수록 아버지와 제가 연결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마음으로는 아들이 연극을 하길 바라셨던 것 같고요.”

| 7백만 원 들고 미국으로 간 게 ‘신의 한 수’였죠.

중·고등학교때 부터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선생들은 그가 곧잘 공부를 잘하는 학생으로 기억했다. 연극과는 거리감이 있었다고 생각한 그는 1988년도에 서울예술대학 연기과에 입학한다. 전공은 연기(배우)였다. 내성적인 성격인 그는 연기 전공을 하기에는 학교생활이 힘들었고 대학에서도 장학금을 받는 모범생이었다. 그의 이미지는 다양한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배우의 표정과 닮아있었다. 웃을 때는 무대를 놀이로 전진하는 아이 같았고 침묵이 길어 질 때는 아버지의 시선이 보였다. 연출할 때는 무언으로 그의 깐깐함을 드러내는 연출가로 느껴졌다. 배우들은 무대에서 날것의 놀이성으로 극단 하땅세의 색깔을 칠하고 움직인다. 무대를 움직이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오브제 활용과 놀이성으로 질주하며 무거운 서사도 극단 하땅세의 화법으로 색색으로 치환시키는 역동적인 작품을 개발하고 만들어왔다. 무대에서 너무 잘 놀아 작품 <위대한 놀이>(2016) 을 선보였고 이 작품으로 제10회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 한국 평론가협회 올해의 베스트3 한국 연극 올해의 베스트 7에 선정되었다. <위대한 놀이> 배우 문숙경은 이 작품으로 제53회 동아연극상 신인연기상을 받게 된다. 대학 졸업 후에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배우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오디션을 보고 서울예술단 단원(1996~1997)으로 활동하게 된다.

―배우(연기) 소질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뮤지컬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본 성격과 진로가 연결되는군요.

“제가 몸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노래 연습도 많이 했고 배우로 신체 훈련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서울예술단에 들어가서도 재능이 없는 것 같고 즐겁지가 않았어요. 내가 연기를 못하니 연기자(배우)를 가르치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영어 공부를 하면서 유학을 준비한 건데 된 건데 돈이 없었어요.”

― 영어는 자신이 있었군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들어가서 영어 공부를 했어요. 남영동 통역학원도 다녔고요. 그런데 우연히 관광 가이드를 선발하는 인터뷰에서 영어를 제일 못하는 제가 붙는 겁니다. 그때 알았어요. 가이드도 ‘영어보다는 적극성과 현장 생존력 같은 거를 더 본다는 생각’하고 가족 회의를 했어요. ‘가이드 말고 미국으로 유학 가겠다’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선전포고를 한 거죠. 미국 유학하려고 지독하게 돈을 벌었어요. 천 오백만 원이 모였는데 친척한테 8백만 원을 빌려주고 700만 원을 들고 무작정 미국으로 간 겁니다. 아버지한테 벗어난 게 신의 한 수였죠(웃음).”

― 미국 유학 시절 연기보다는 무대 미술로 전향을 했다.

“"영어권 국가에서 배우를 전공하고 연기를 하려면 영어로 극 중 인물 감정을 막힘없이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우리말을 못 하는데 무대에 설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거죠. 고등학교 때부터 미술을 워낙 좋아해서 이 분야로는 자신이 있었고 재능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외로워서 빈 엽서를 사다가 뉴욕 풍경을 그려서 친구들한테 보내기도 하고 미국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그려서 보내줬는데 반응들이 좋았어요.(그는 배우 이야기를 꺼냈다) 한 번은 한두 번 배우를 한 적이 있는데 연기를 하다가 자신이 너무 창피해서 무대에서 울었어요. 연기가 아니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진짜로 운 거죠. 공연이 끝난 뒤에 관객들 얼굴을 보는데 자신이 너무 수치스럽기도 하고 끔찍한 경험을 한 거죠. 배우로도 잘한 작품도 있어요(웃음).”

뉴욕시립대학교 브룩클린 대학원에서 무대 디자인과 (MFA)를 다니는 동안 그의 말처럼 아버지를 떠나온 게 ‘신의 한 수’였다. 무대 미술을 하면서 그의 재능도 돌아왔고 그 만의 방식으로 연극에 눈을 떴다. 뉴욕 동네를 다니며 버려지는 쓰레기와 재활용 폐품들을 모아 작품을 만들었고 뉴욕에서 생활하는 동안 36개 작품에 참여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무대 미술 전문가로 활동했는데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부터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독특한 방식으로 무대를 만들고 작품에 따라 무대 활용을 천재적으로 활용하는 그를 뉴욕의 극장가들은 지켜봤고 윤시중은 브로드웨이 아시아 컴퍼니(The Broadway Asia Company) 기술 감독을 거 뉴욕 78번가 시어터 랩(New York 78th Street Theater Lab) 극장 상임 디자이너로 발탁된다. 파격이었다. 당시 극장은 미국 실험극을 주도하는 공연장이었고 미국 최고의 배우가 된 로빈 윌리엄스가 젊은 시절 스탠딩코메디를 하던 곳이었다.

― 미국 실험극을 주도하는 극장에서 한국인이 전속 상임 디자이너가 된다는 게 쉽지 않을텐데요.

“무대를 하고 미술을 만나게 되면서 오히려 연극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던 시간이었습니다. 미술적인 감각으로 무대를 바라보면 연극적인 표현들이 다양하게 접근 할 수도 있고요. 자유로운 문화에서 제가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엄격한 분위기의 극은 단체와 배우의 규칙들이 존재하잖아요. 극장의 규칙이죠. 자유스럽고 책임감은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에요. 책임 무대 디자이너가 돼도 너무 자유로운 거예요. 신 나서 죽도록 열심히 하고, 또 열심히 했어요. 이때 경험이 인생 최고의 시간들 인 거죠. 극장 팀들이 성취도도 높고 공연하는 배우와 연출들 프라이드가 굉장합니다. 이때 만났던 경험과 동료들이 자산이 된 거고 뉴욕에서 만난 한 편의 연극이 저한테 커다란 영향을 주었어요.”

― 어떤 작품이죠.

“시어터 컴플렉스의 <악어의 거리>라는 작품이었어요. 이 작품이 와 닿은 겁니다. 영화는 시공간의 제약이 없고 연극은 제한적이라고 연극이론 교과서로도 우리는 보편적으로 생각해 왔잖아요. 그런데 이 연극은 ‘연극이야 말고 시공간에 제한이 없네!’라고 느꼈어요. 무대의 상상력은 한계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작품이었죠. 결국, 관객들이 무한한 상상을 가질 수 있도록 무대 공간에서 표현되는 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시각적으로 공간과 시간을 설명하기보다는 시간과 공간을 분할하고 경계를 지워내도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움직여 낼 수 있고 그것을 무대로 표현하는 연극을 보고 감동 받았습니다.”

―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 극단 사다리에서 호주 연출가 로저린드와 한국의 설화인 하백의 이야기를 그리는 아동극 <징검다리> 작품에 참여하게 되면서 무대에서 ‘놀이성’을 윤시중 연출의 시선으로 개념화 하게 된다.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외국 연출가들 작업은 감각으로 쫓아갈 수 없는 굉장히 뛰어난 연극 작업 들이었고요. 국립 극단에서 올린 <귀족 놀이>(연출, 에릭비니에)와 <아가 맴돈>(연출, 미하르노프보) 놀란 게 있습니다. 무대의 확장성이 상상 이상으로 실현시키는 힘이 있으면서도 무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엄격합니다. 아가멤논의 연출 같은 경우 무대에 테이블 대도구가 나오는 장면이 있어요. 연출은 테이블 다리 두께를 가지고 무대 위에서 계속 확인하고 공간과 싸우는 겁니다. 보름 간 매일 무대에 10㎝, 9㎝, 11㎝의 테이블 다리의 두께를 체크 했어요. 미세한 차이죠. 객석에서 바라보면 별로 차이가 없어요.”

“게다가 그 테이블의 위치를 정하려고 밤을 새웁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감동이 있는 작업이었어요. 국내 연출가가 한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의 배우들의 열기는 좋았지만, 공간에 비해 과도한 에너지가 너무 괴로워서 조명기만 봤어요. 보면서 ‘조명기 하나로는 연극을 못 할까’하는 생각이 떠올랐고 <세상에서 제일 작은 개구리 왕자> 라는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 놀이로 무장하고 하땅세의 스타일과 언어로 연극을 말한다.

극단 <하땅세>는 창단공연(2010)으로 배우이자 시인인 낸시 해스티(Nancy Hasty)의 <연출가>라는 작품 원작(윤조병 번안, 윤시중 연출, 76 스튜디오)을 올렸다. 이 작품은 극단 하땅세 전작 작품들과 장르를 비켜 가는 것 같은데도 전환점이 되어준다. 아버지의 사실주의 계열의 구조주의적 희곡과 연극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전통연극과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하땅세로 올려진 원작 <연출가> 작품도 아버지의 희곡 언어와 연극적인 세계관 사이에 부자의 갈등이 있었던 것처럼 작품은 닮아있었고 무대에서 그려진 작품은 파격적이었다. 롤러코스터 코미디 연극을 표방한 연극에서 배우의 연기는 거추장스러운 연기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파격과 자극적인 감정으로 거침없이 표현했다. 가공되지 않은 연기는 거칠면서도 극 중 인물들의 공포체험 이상으로 사실적인 전율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이후 <천하제일 남가이>(2012), <파리대왕>(2013)과 아시스토파네스의 <새> (2013, 윤조병 번안, 윤시중 연출>를 부자가 공동으로 작업하면서 학창 시절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은 연극 정신으로 닮아 가고 있었고 부친의 깐깐함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극단 하땅세 초기 작품 다 서편으로 아들은 국내 연극 연출가가 되어 있었다. 이후, 그는 <템페스트>(2014), <Faust 1+2>(2014) <위대한 놀이>(2017), <그때 변홍례>(2018)와 광주 아시아문화의 전당의 <시간을 칠하는 사람>(2019)을 거치며 국내의 연극상과 연출상을 받았고 그의 작품은 해외에서 인기가 더 높아졌다. 특히 가족극 <오버코트>(2015), <붓바람>(2016), <외투>(2015) 은 아비뇽과 국제무대에서 초청이 잇따랐고 작품 평가가 좋았다. 무대의 빈 여백과 오브제를 활용한 배우들의 놀이는 다양한 이야기와 장면으로 변주해 독특한 하땅세의 작품성으로 표현되었다.

<그때, 변홍례>는 극단 하땅세 배우와 연출의 놀이 정신으로 무장하고, 장면으로 구현되는 행동들이 흑백 영화의 한 장면으로 교차됐다. 놀이극 형식으로 표현시켰는데 <위대한 놀이> 이후 극단 하땅세의 연극적인 무대 방향이 잘 담겨있는 작품이었다. 죽음의 진실을 둘러싼 모순과 권력, 추악한 인간의 욕망과 탐욕, 법과 정의의 부재 등 시대 속에 은폐된 추악함은 한국 사회 수중 속에 침몰되어 있는 진실의 실종과 정의의 부재를 연극적인 놀이와 은유로 드러냈고 스탠드 백열등은 소품으로 조명으로 투사됐다. 등장인물 내·외면의 감정을 조절하는 장치로 다변화시키는 기능을 하면서 무대를 배치하는 아이디어가 기발했다. 배우들은 무대를 종횡무진 하며 인물의 감정과 분위기를 스탠드 백열등으로 장면 분위기를 만들고, 인물 감정의 크기를 조절하거나 밝히며 스크린으로 그림자를 투영해 인간의 감추어진 욕망을 흑백으로 조절하며 흥미로운 연극적 놀이 발상으로 무대를 활보하며 극 중 인물을 그려냈다. 비로소 연출은 아버지의 언어를 벗어나 다른 연극을 선 보이고 있었다.

― 극단 하땅세의 창단 작품이 <하땅세>군요.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컸던 작품이었어요. 홍보도 뜨기 위해 안달해서 부와 명예를 노리고 만든 작품이라고 하면서 막 밀어붙였어요. 이전 작품들이 아버지 희곡 언어와 결이 다르지만, 실험적인 방식을 고민하고 작품으로 극단의 예술적 방향성과 정체성을 찾을 때였어요. 창단 공연은 하땅세 놀이적 스타일로 접근한 게 아니었고요. 연기도 극사실주의로 강하게 무대를 만들었어요. 모든 걸 진짜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였어요. 연극적인 움직임, 극 중 인물 대사의 감정을 배제하고 연극을 ‘진짜처럼’ 해보자 하고 할 때인 데, 진짜로 연극을 하니까 관객들도 충격을 받은 작품이었어요. 극 중 인물로서 인물 되기를 요구하지 않았고 진짜 그 사람이 무대에 있는 것같이 했거든요. 이후 작품부터는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로도 힘을 빼는 시간들이었습니다.”

― 극단 하땅세의 브랜드는 놀이성이고, 연극적인 변주의 오브제로 상상을 자극하고 무대화된다는 점이죠. 배우들도 놀이 정신으로 무장하고 무대에서 달리더군요. 놀이성과 연극성의 경계를 무대로 응축하고 풀어내는 힘이 크다고 할까요. 하땅세의 놀이의 개념은.

“저는 시켜서 하는 것은 다 싫어해요. 배우들도 마찬가지인데요. 자율성 안에서 최대한 다른 연극적인 장면들과 아이디어를 만들어냅니다. 작품 안에서 우리가 마음껏 놀다 보면 작품 안에 들어가 있고요. 작품을 한 방향으로 바라보고 분석하고 하지를 않아요. ‘청개구리’ 심보 같은 건데(웃음) 대본은 일정한 무대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텍스트로만 바라보게 되고 드러나지 않은 것을 발견해서 하땅세 스타일로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고 배우들도 그것을 즐깁니다. 대본을 보고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가 아니라 ‘이걸 연극으로 과연 만들 수 있을까?’라는 도전 의식이 생기는 작품을 즐기는 게 극단의 분위기인 것 같아요. 공연하면서 계속 바뀌는 연극을 원하는거죠.”

―윤시중 연출이 담아내는 미장센은 놀이성이다. 그 장면의 확장성이 드러나고 전달되기 위해서는 배우들이 극단 하땅세 무대 규칙에 맞게 잘 노는 게 중요한데.

“배우들은 연출의 디렉션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작품을 함께 만드는 ‘창작자’라고 생각합니다. 배우 훈련도 하지만 팀이 공동으로 체험을 많이 하면서 정서적인 공유하는 편이에요. 영화관이나 전시관도 찾아다니기도 하고 작품들과 연관된 사회적인 접근을 많이 합니다. 생각의 근육들을 더 확장시키고 키워내려는 것 같아요. 결국에는 놀이는 상상이고 변주인데, 경직되어 있으면 하땅세에서 놀이 잘하는 선수로는 실격인 거죠. 테이블 리딩은 별로 안 하는 편인데 이 과정이 무거워지면 배우들이 경직돼요. 무대에서 마음껏 놀고 뛰어야 하는데 분석을 통해 규칙이 먼저 생기는 겁니다. 그 규칙 안에서만 맴돌다 보면 작품이 안 풀려요. 게임도 많이 하죠.”

―같은 생각입니다만, 연극 교육을 하면서 분석적인 측면으로 작품의 분석과 해석을 탐구하는 과정들이 작품을 무대화 하는 데는 장점이 되면서도 이 안에 갇히면 배우들은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연출과 드라마트루기들은 작품 해석 중심으로 가고 배우들은 작품과 인물의 기초적인 정보만 이해되면 대사를 이해시키고 무대에서 장면을 만들고 그 과정이 무대와 인물의 적응력을 향상하는데 효과적인 것 같아요. 저도 철저하게 배우의 마음과 내면이 용해 될 때까지 놀게 하는 스타일입니다(웃음).

“극단 하땅세 배우들은 작품에 대한 탐구욕이 강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이 작품의 분석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은 되는데, 작품을 연습하다가도 문제가 생기도 풀리지 않으면 더 좋아하고 즐거워해요. 각자 접근 방식으로 숙제를 풀어가면서 배우로서의 변화도 생기게 되고 극복하면 또 숙제가 생기면서 작품에 탐구욕도 생기게 되니까요. 처음에는 그 과정이 힘들 수 있는데 인식되는 순간 배우도 작품도 바뀌게 됩니다. 작품 생명력을 만들어 주는 동력이 된다고 생각해요.”

― 극단 하땅세는 창단부터 현재까지 지켜지는 원칙이 있다. 25명 단원은 전업(專業) 배우들이고 철저하게 극단에서 활동 연차 별로 막내 단원부터 고참인 극단 하땅세 대표(문숙경)까지 월급을 받고 회계도 극단 관리도 분업화시켰다. 15년 동안 그 약속을 지키면서 작품을 만들어 왔고 단원들은 극단 생활에 믿음과 신뢰를 보내고 있다. 배우로서 성장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나고 윤시중 연출과 작업하는 것을 즐긴다.

“오기가 좀 생겼어요. 배우들은 연극하면서 고생하다가 영화와 방송으로 잘 된 후 ‘연극할 때는 어떠 했어요’하는 말들이 싫었어요. 연극이라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위상에도 화도 좀 났고요. 연극으로만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싶었고 그게 꿈입니다. 배우들도 큰 꿈들이 있잖아요. 연극을 하면서 방송이나 영화 눈치 안 보고 배우 생활할 수 있도록 요즘에는 TV나 영화에도 배우들이 병행하라고 하고 기회도 오고 있어요. 그런데도 문숙경 대표 같은 경우에는 방송 촬영이 연습 기간에 잡히면 포기를 해요. 물어봤어요. ‘드라마에 출연하지 왜 그래’ 자신의 일정 때문에 팀에 영향을 줄까 봐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철저하게 공동체 극단이군요.

“저는 대학에서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로 월급 받잖아요. 극단 창단은 제가 했지만, 극단 하땅세는 단원들이 주인입니다. 극단 초기에는 어려워서 연습 실비를 빌려주었지만, 그 후로는 저도 10원도 극단에 돈을 보태지 않습니다. 공동으로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 연극을 해서 저축하고 모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월급을 주는 겁니다. 작품도 잘 만들고 레파토리도 몇 작품이 탄탄해도 25명 전원한테 그 약속을 문 대표가 지켜가고 있다는 것이 힘든 일이에요. 아직은 잘 버텨내고 있습니다. 단원들한테 말해요. ‘여러분들의 땀으로 티켓도 팔고 공연해서 번 수익금으로 좋은 연극을 만들기 위해서 모인거다. 공연 티켓 안 팔리면 우리는 극단을 떠나서 각자 집에서 연극하자’라는 마음으로 뭉쳐있어요.”

극단 하땅세는 윤조병 선생의 ‘깐깐한 연극 정신’이 피어나고 있었다. 기존 연극과 다른 연극무대를 추구하는 아들의 연출 세계는 놀이 정신으로 ‘꽃’에 물을 뿌리면 같은 씨앗인데도 피어나는 꽃의 화려함은 달랐다. 연출가 윤시중은 극단 작품들을 성공시켜 왔고 작품성과 연출력도 국내 대표적인 극단으로 불려지고 있다. 창단 15년 만에 극단 하땅세는 60석 규모의 극단 전용 소극장을 올해 11월 개관을 위해 성북동에 마련하고 있다. 무대미술과 극장 전문가인 그가 극장 도면을 그리고 배우들은 연극 ‘하땅세의 극장’을 공연하는 것처럼 공사 살림을 맡고 있다. 가구는 당근 마켓에서 중고로 사고 손질은 배우들이 한다.

―극장 이름을 ‘위대한 놀이’라고 지으면 어떨까 싶군요.

“(웃음)극장이 개관하게 되면서 꿈이 생겼어요. 연극을 보러 온 관객들이 하루 종일 극장에서 머물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아동극을 보러 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는 위층에서 배우들과 다양한 교육을 주제로 연극 놀이 수업도 참여하고요. 특별 강좌나 이벤트 프로그램도 마련하고 싶네요. 아이들 성격 발달을 위해 놀이 프로그램도 하면 좋을 것 같고요. 하루에 하땅세 작품을 한 공간에서 서너 작품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에요. 오전 9시에는 아동극을 하고 점심시간에는 낭독극, 저녁에는 성인극을 자정 12시 넘어서는 심야 연극을 할 겁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드리고 싶고요.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24시간 연극 전용 극장을 꿈꾸는 겁니다. ”

―국내 연극 환경과 현실에서 성인극과 아동·청소년극 두 장르를 병행하면서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는 극단은 하땅세가 유일한 것 같다.

“아동극은 창단 전부터 <세상에서 제일 작은 개구리 왕자>를 만들었는데 작품성을 인정받고 대박이 나면서 세계를 누비고 다녔어요. 연습실에 이 작품으로 다녔던 해외 공연 지도를 만들어 놨는데요. 정말 많이 다녔습니다. 아버님도 어린이극에 관심이 많으셨고요. 그 뒤로도 극단 하땅세 스타일로 어린이극을 만들면 작품이 좋다는 얘기들을 하시고 상도 많이 받게 됐지요. 극단이 장르에 구분을 두지 않는데 둘 다 좋은 평가를 받으니까 지칠 줄 모르고 하게 되는 것 같고 배우들도 아동극, 일반극 경계가 없이 작품들을 다 소화해 내주고 있어요. 단지 차이점은 전달하는 스토리가 다른 거고요. 접근 방식은 놀이로 무장해 작품을 표현하니 그 경계가 없는 게 하땅세의 장점인 것 같아요. 아, 자랑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네요.”

― 극단 하땅세의 다양한 레파토리 작품으로만 극단과 극장을 유지하기는 힘들지요.

“가면 갈수록 연극을 하는 것이 힘들 수 있는 구조인데 버틸 때까지 달려가는 겁니다. 연극은 어려운데 ‘바꾸어 야지’라는 마음으로 연극을 만들고 있는 거죠. 문 대표와 단원들이 잘 버텨내고 있고 작품성도 인정을 받고 있으니 앞으로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어요.”

― 이제 아버님 윤조병 선생을 이해하시겠군요.

“기억해 보면 많이 죄송하죠. 아버님의 말씀이 이해됩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데요. 저도 초창기는 배우들한테 원망도 많았어요. ‘내 꿈은 이런 데 배우들은 안 쫓아온다’ 그런데 아버님이 예를 드셨어요. ‘내가 너한테 다 물려 줄 테니까 저 땅에 농사를 좀 지어라. 나중에 네 땅이 되는데도 너도 안 하잖아’라고요. 제가 배우들을 너무 편협하게 바라봤던 것 같아요. 아버님은 넓게 세상을 바라보고 희곡을 쓰시고 자식을 대하셨는데, 돌아보면 제 인생과 다 연결이 되고 감사하죠.”

―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 작품은.

“지난해 국립 극단에서 낭독극으로 공연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아쉬웠던 작품이었어요. 100년을 걸쳐 시·공간이 바뀌고 100명 이상의 극중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걸 연극으로 한다는 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어요. 소설이 좀 독특해요. 굵직한 스토리가 없어요. 그래서 이 작품을 무대화 하고 싶었고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어요. 소설에서 표현된 걸 우리는 3차원 공간에서 어떻게 보여줄까를 고민했죠. ‘큰 중국의 근현대의 역사를 가장 작은 집에 올려 놓으면 어떨까’ 하는 발상의 개념으로 시작된 작품인데 반응이 너무 좋습니다.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가 블로그, 공연 예매 사이트에서 후한 점수를 받아서 당황스러워요. 작품이 좋았다는 80여명의 공연 후기 평가가 줄을 이었고 10점 만점에 9.9점을 받고 있습니다.”

― 윤시중 연출의 대표작 세 작품을 선택해 달라고 했다. ‘그는 어렵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어려운데요. <위대한 놀이>, <시간을 칠하는 사람들>,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 정도 될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친 뒤 두 사람은 극장으로 걸었다. 극단 <하땅세> 윤시중 연출의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라이트 하우스,3,7~26) 주택 극장은 연습실 입구(入口)에서 10분 쯤을 동네 시장통을 지나 생선과 나물 냄새를 맡으며 걷는 길은 상쾌했고 골목길 네 다섯 번을 꺾으면 언덕에 보였다. 동네 일부가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고 있어도 돈암동 주택들은 세월을 안고도 견고해 보였다. 골목 전봇대에 공연 포스터를 걸어 놓고 관객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했는데, 극단 하땅세가 연습실로 쓰던 공간을 주택 무대 공간으로 변화를 주었고 신 사실주의 계열의 류진원 작품을 설계하면서 자연환경을 살리며 놀이성도 극대화 되고 있었다. 주택극장에서 마루는 무대 공간으로 변해있었고 하땅세 배우들 13명이 관객들을 안내했다. 소지품은 번호가 부착됐고 집들이에 초대 받은 느낌이 들었다. 무대는 가로 5~6m 세로 4m 정도 되어 보였다.

30여 객석 앞 우측으로 주택 화장실이 보였고 좌측으로는 부엌과 방으로 쓰던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구조였는데, 천장에는 윤기가 나는 한옥형 대들보가 가로 세로로 얽혀있었고 조명은 자연광을 사용했다. 주택 공간은 무대 공간으로 살아났다.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는 지난해 명동예술극장에서 낭독극으로 공연이 되었고 이번 공연이 국내 초연이다. 작품은 극 중 인물 양 백산의 삶의 대서사를 다루며 인생과 삶에서 만나는 인간들의 말(言)에 관한 이야기다. 말이 넘쳐 나는 세상에 그 만 마디보다는 삶의 좌표로 박힐 수 있는 ‘한마디’ 말이 소중한 세상이다. 배우들 날 것의 연기와 놀이성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장면을 만들고 인물을 그리며 공간과 작품을 살려내고 있었다. 윤시중은 무대에서 ‘만 마디 말’ 보다는 위대한 놀이의 승부사였고 연출가였다. 하땅세의 놀이 정신 스타일을 웃음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꼭 봐야 할 작품이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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