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비밀 일기장처럼.. 15년 꿈꾸다 만든 영화

김상목 2022. 2. 1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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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김상목 기자]

▲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진진
 
1_도입부: 소녀와 개에게만 허락된 유토피아

어린 소녀는 반려견과 산책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저분한 덤불 속으로 반려견이 쫓아 들어가 버린다. 애타게 부르지만 개는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소녀는 용기를 낸다. 개를 따라 덤불 속에 난 작은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다행히 아직 어린 소녀의 작은 체구는 반려견이 지나간 구불구불한 어두운 틈새를 통과할 수 있었다. 소녀가 구멍의 반대편으로 비집고 나온 순간, 세상에서 오직 소녀와 개에게만 허락된 비밀의 정원이 활짝 열린다.

대체 이곳은 어떤 공간일까. 그들 외엔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너른 초원은 곧 소녀와 개만이 출입 가능한 놀이터가 된다.(이 공터의 유래와 용도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소녀와 개는 바깥에서는 불가능한 자유를 그곳에서 만끽하며 누린다.

어느 날 개가 무엇인가를 찾아낸 듯 집요하게 땅을 파기 시작한다. 무엇인가 인공적인 게 느껴진다. 어린 소녀는 개와 함께 소꿉장난으로 흙집 놀이를 하듯 땅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고사리 손으로 하는 작업에는 꽤 시간이 걸리지만 바다와 풀밭 사이를 가로막은 방파제 벽까지 이어진 기다란 철로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곳은 지금은 막혀 있지만 어딘가로 향하던 통로였던 듯하다.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의 도입부는 어른들에겐 출입이 금지된 세계, 오직 소녀와 개만의 자유로운 정원을 영상화보집 마냥 청량한 기운이 넘실대는 풍경으로 선사한다.
 
2_전반부: 이별 후에 맞는 새로운 인연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런 동심의 세계는 지속될 수 없음을. 누구건 겪듯 유년시절의 낙원은 에덴동산처럼 세상의 비밀을 하나둘 알아가면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다. 8살 소녀 '사야카' 역시 그 운명에 충실한 행로를 거치게 된다. 그 시작은 소녀에겐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반자, 시바 견 '루'와의 뜻하지 않은 이별이다.

8살 소녀는 친구처럼 지내던 반려견과의 이별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루와의 추억이 깃든 둘만의 비밀 아지트를 찾아가지만 이제 그곳은 둘만으로 꽉 찬 공간이 아닌, 8살 작은 소녀에겐 광활한 유배지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혹시나 루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자기에게 거듭 덧없는 희망을 불어넣으며 고립된 소녀에게 어느 날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홀연히 나타난 개는 금방 다시 어디론가 사라진다. 하지만 소녀는 결국 인근에서 다시 개를 발견한다. 그곳은 재즈카페 레이디버드. 후세라는 노인이 홀로 운영하는 곳이다. 개는 어느 날 가게로 흘러들어온 떠돌이라고 한다. 둘은 그렇게 첫 만남을 시작해 인연을 이어간다.
 
▲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알고 보니 후세 할아버지는 코바야시라는 어린 아들을 해난사고로 잃고 외롭게 살아왔다. 하지만 후세는 아들이 죽은 게 아니라 멀리 떠나 있는 것뿐이라 강변한다. 그 또한 사야카처럼 소중한 존재, 각자 소중한 존재와의 이별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다. 소녀 사야카는 반려견 루를, 노인 후세는 외아들 코바야시를 잃었지만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서로에게 위로를 해준다. 그렇게 둘의 동병상련은 기이한 우정으로 쌓여지게 된다.

사야카가 루와 만나게 된 건 또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며 친구가 없던 소녀가 애완동물 숍에서 파양당한 뒤 버림받은 처지의 강아지에게 자신을 투영했기 때문이다. 루가 자신을 떠났다는 걸 받아들이는 건 소녀가 외톨이 신세인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게 되는 과정인 셈이다. 8살 소녀에게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그리고 소녀는 루와의 이별을 준비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그 지점이 더욱 소녀의 집착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정서 때문에 사야카는 후세를 이해할 수 있다. 이별의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자신도 이렇게 슬픈데 수십 년을 그런 상실감을 안고 살아온 할아버지는 얼마나 슬플까 하고 소녀는 생각한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사야카는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쌓아나간다.

3_후반부: '은하철도의 밤'을 경험하는 소녀

하지만 그저 여유로운 치유로만 이야기는 흐르지 않는다. 소녀에겐 두 번째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첫 번째 이별도 아직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8살 소녀가 또 다른 이별을 맞이하는 순간은 성장담으로선 동심에서 현실로 나아가는 순간이지만 영화적 표현에선 현실에서 잠깐이나마 환상의 세계를 체험하는 형태로 묘사된다.

후반부는 어렵게 소녀가 다시 구축한 찰나의 우정과 인연을 또다시 이별하는 과정이다. 이 여정은 사야카에겐 무척이나 잔인한 시간이라 당연히 진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어떤 8살 아이가 소중한 이들과의 거듭된 준비 안 된 이별을 무탈하게 넘길 수 있을까. 영화는 그런 잔인할 수 있는 체험을 관객들에게, 그리고 영화 속 소녀에게 진통제 처방 마냥 환상적인 작별의 기회로 조금이나마 고통을 연착륙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결단을 밀어붙인다.

그 순간 미야자와 겐지의 아름다운 동화 <은하철도의 밤>이 떠올랐다. 예기치 않은 친구와의 작별, 그 작별을 슬픔 속에서도 그저 잠시 떨어져 있게 된 것처럼 인내하는 이들의 풍경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소중했던 가까운 이들과 차츰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엔 조부모, 나중엔 부모, 그리고 배우자와 자녀, 친구들까지 하나둘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될 것이란 사실을 누구나 인식하지만 감당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반려동물 역시 그렇다. 맨 처음 사야카가 부모에게 '루'를 데리고 살겠다고 요청할 때 아버지는 딸에게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개는 사야카보다 먼저 죽는데 그 상황을 견딜 수 있겠냐고. 사야카는 고민 끝에 결심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영화는 그런 소녀의 결단이 시험당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층층이 쌓아올린다. 아이의 시점에서 보는 성장물의 이상적 공식이다.

4_만듦새: 익숙한 소재를 정교하게 세공하다
 
▲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어린아이의 이별을 거친 성장과정을 다루는 작품은 차고 넘치도록 많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역시 그 정석적 전개를 따른다. 2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분량은 그런 일 방향 전개에는 넘치는 시간이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느슨하게 되기 좋은 구성이다. 감독은 분량을 줄이는 대신에 단순한 구성을 보강하는 골조를 여러 겹으로 세우는 방법을 취한다.

관객이 한눈팔면 샛길로 빠지기 좋을 만큼 영화 내내 소녀의 과거 회상과 현재 상황이 수시로 플래시백으로 넘나든다. 이 측면은 소녀의 기억과 현실을 교차시켜 사야카의 감정상태를 관객이 시각적으로 확인하게 해주지만 거듭되는 회상 장면의 현실 침범은 경계선을 무너뜨려 관객에게 산만하게 보일 수 있는 한계를 노출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반려견 '루'을 맞아들이게 된 과정과 더불어 행복했던 순간들이 소녀에게 얼마나 소중했던 시간인지는 확실하게 관객 뇌리에 각인되는 건 분명하다.

여기에 한 축이 더 투입된다. 두 개의 시간대를 아우르는 또 다른 장치로 10년 후 주인공 소녀가 영화 속 시간을 회상하는 내레이션이 아교풀처럼 빈틈을 메운다. 소녀가 소중한 존재들의 죽음과 그로 인한 이별을 겪으며 성장해가는 과정은 곧 그가 세상과 현실에 대해 알게 되는 과정과 등치된다. 그걸 10년 후의 자신이 회상하며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는 해설자 역을 소화해낸다. 약간이나마 너무 자주 과거와 현재, 실재와 판타지를 롤러코스터 마냥 자유롭게 횡단하는 극중 배경 이해를 배려하는 셈이다. 그런 안전장치를 믿고 감독은 마음껏 '환상성'을 끼얹는다.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영화는 거의 통째로 2시간짜리 환상동화가 된다.

그런 특징 때문에 관객이 이야기에 감정 이입이 안 된다면 지나치게 흐름을 잡아 늘린 걸로 느껴질 테다. 하지만 유년시절 누구나 갖고 있던 말 못할 비밀, 이별의 상처를 세밀하게 풀어주는 영화 속 풍경에 빠져든다면 아주 특별한 체험의 시간을 누릴 법하다.

적어도 영화를 만든 감독은 정말 간절히 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 티가 역력하다. 2004년 출간된 동명의 단편소설에 매료된 뒤 감독은 여러 굵직한 영화들의 제작과 연출을 소화하면서도 15년 동안 원작의 영화화를 꿈꿨다고 한다. 작품을 보고나면 그런 홍보자료가 겉치레가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다. 아마 원작자도 스스로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고 비밀기지에 숨겨놓았던 일기장처럼 작품을 썼던 것 같다. 작가나 감독이나 지극히 개인적 기억을 비슷한 경험을 공유할 이들과 나누고자 일을 벌인 셈이다.

배역진은 아마 제작진이 내세울 수 있는 최상의 카드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배우 본인보다 가족내력이 홍보자료 첫 줄에 가는) 사야카 역 주연배우 니이츠치세는 아역연기자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차고 넘치게 소화해낸다. 아직 온전히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연기를 기대할 순 없지만 반려견과의 교감에 퍽 공을 들였음은 영화 내내 확인 가능하다. 소녀와 우정을 쌓고 그녀가 한 꺼풀 더 허물을 벗는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후세 역 배우도 관객에게 충분히 공감되는 버디무비를 이끌어낸다.

여기에 일본영화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눈에 익은 명품조연배우들이 다수 등장해 제 몫은 충분히 해낸다. 무엇보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들이라 할 존재, 인간에게 버림받았던 경험을 눈빛과 동작으로 뿜어내는 동물배우들의 활약이 눈부시다.(루와 루스 역 두 견공은 영화제작이 끝난 후 함께 살고 있다고 전한다) 여기에 어느새 또래 배우들 중 청춘스타에서 연기파로 진입하려는 아리무라 카스미의 목소리 연기가 어우러져 존재감을 발한다.

5_마무리: 분명 누군가에겐 소중한 추억의 일기장으로 다가갈 영화
 
▲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그렇게 제작진이 합심해 내놓은 결과물은 비슷한 소재와 유형의 것들에서 봤음직한 공통적 요소들의 집합체다. 그런데 꼭 나쁜 의미로만 말하는 게 아니다. 본 작품이 담아낸 이야기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세계 어디서나 공감되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익숙한 이야기가 식상하지 않도록 좋은 재료를 투입해 무척 공들여 세공한 시도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가 유사한 작품들에 대해 확실히 비교우위를 차지하는 숨은 주역은 일상에서 순식간에 판타지로 전환되는 순간순간 공들인 미장센과 적절하게 투입되는 음악의 협연이다. 특히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도입부에서 소녀와 개가 자신들만의 비밀정원을 찾아내고 누리는 풍경의 경우, (아무리 텍스트로 묘사해도 한계가 뚜렷하기에) 직접 관객이 체험해 느껴야 한다. 반면에 대미를 장식하는 빨간색 은하철도 정거장 판타지 세상은 분명 과잉이지만 누군가에겐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으면 하는 소망의 총합이라 할 만하다.

결국 이 영화는 익숙한 것들의 변주라는 규정을 한 발짝도 벗어나진 않는다. 감독이 과도하게 사적인 기억과 영화를 등치시켰다고 볼 지점도 툭툭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선사하는 위안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분명 적잖게 떠오른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그런 이들과의 만남을 간절히 기다리는 중이다. 무엇보다 반려동물을 대하는 마음자세를 자녀와 공유해야 할 가족들에겐 훌륭한 시뮬레이션이 아닐 수 없는 작품이다. 
 
<작품정보>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Show Me the Way to the Station, 駅までの道をおしえて
2019|일본|드라마
2022.02.17. 개봉|126분|전체관람가
감독 하시모토 나오키
주연 니이츠 치세(사야카), 오이다 요시(후세 코타로),
      아리무라 카스미(10년후의 사야카),
      루(루), 마노르카(루스)
출연 사카이 마키(사야카의 엄마), 타키토 켄이치(사야카의 아빠),
      하다 미치코(사야카의 큰엄마), 마키타 스포츠(사야카의 큰아빠),
      사토 유타로(코이치로), 요 키미코(간호사), 에모토 아키라(동물병원 원장),
      이치게 요시에(사야카의 할머니), 시오미 산세이(사야카의 할아버지)
원작 이주인 시즈카
수입 / 배급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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