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일신우일신 그리고 배송노동자 [걸어서 실리콘밸리]
[김욱진 기자]
▲ Bay Trail 미국 여성작가 리베카 솔닛의 작품 <방랑벽(Wanderlust)>은 작가 자신이 샌프란시스코만(Bay)을 걷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걷기의 인문학(반비)>으로 번역된 한국어판에서 출판사는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뽑았습니다. <걸어서 실리콘밸리> 프로젝트에서 저 역시 샌프란시스코만 둘레길(Bay Trail)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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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8일 화요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섭니다. 일어난 시각은 새벽 5시 남짓이지만 대문을 열었을 때는 오전 7시가 다 됐습니다. 배낭을 꾸리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일주일 여정을 소화하는 데 꼭 가져갈 물품을 추려내기가 쉽지 않더군요.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몸만 가고 싶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습니다.
어느새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입니다. 마흔은 불혹이던가요? 미혹됨이 없어야 하는 나이가 다가오고 있지만 제가 살아온 세월은 그만큼 단단하지 못합니다. 감당할 듯 감당하지 못할 듯한 아리송한 무게의 배낭 지퍼를 닫습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내디딜 시간입니다.
미국의 여성작가 리베카 솔닛의 작품 <방랑벽(Wanderlust)>은 작가 자신이 샌프란시스코만을 걷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걷기의 역사(A History of Walking)라는 소제목이 붙은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걷기의 인문학(반비)>으로 번역됐습니다. 출판사에서는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뽑았습니다.
언뜻 너무 거창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시도 중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는 걷기라는 데 동의합니다. 이번 '걸어서 실리콘밸리' 프로젝트에서도 가능한 한 화폐를 덜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소비가 미덕인 나라에서 절약은 무슨 의미일까요? 제 삶에서 실험해보고 싶었습니다.
▲ Bicycle Friendly 헨리 포드의 나라에서 자동차 없이 생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광활한 대륙답게 미국에는 다양한 삶의 담론과 방식이 존재합니다. 걷다가 미국자전거연맹(League of American Bicyclists)의 표지판을 보고 반가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자전거 친화적인(Bicycle Friendly)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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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광활한 대륙답게 미국에는 다양한 담론이 존재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기 전 제가 가방에 넣은 책은 <당신의 차와 이혼하라(돌베개)>입니다. "자동차 중독문화에 대한 유쾌한 반란"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현재 절판됐습니다. 중고서점에서 어렵게 구한 책을 기내에서 훑어보며 내심 놀랐습니다.
저자 케이티 앨버드는 미국에서 자동차 없이 사는 생활을 1992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자동차'라는 등식을 깨고 싶었던 것이지요. 책장을 덮으며 관념에 빠져 미국은 이렇다, 저렇다 결론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바라보고 제가 말하는 미국은 제 삶과 경험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흘렀고 마침내 저는 실리콘밸리를 걸어서 일주할 용기를 냈습니다.
실리콘밸리를 걷기 시작하자마자 세계 굴지의 반도체 회사들이 나타납니다. 메모리 반도체 생산기업 마이크론(Micron), 시스템 반도체기업 엔엑스피(NXP) 건물을 차례로 마주했습니다. 한국처럼 초고층 빌딩이 밀집한 지역이 아니라 널찍한 평지에 덩그러니 놓인 글로벌 기업의 건물이 인상적입니다.
▲ Micron 실리콘밸리를 걷기 시작하자마자 세계 굴지의 반도체 회사들이 나타납니다. 메모리 반도체 생산기업 마이크론(Micron)의 모습입니다. 호수 위의 오리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아주 치열하게 발을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걸 오리증후군(Duck Syndrome)이라고 부르던가요? 눈에 보이는 풍경이 전부가 아니듯 평온함의 이면에는 분명 혁신가들의 바쁜 발놀림이 존재하고 있을 터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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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mazon Warehouse 무엇보다 제 눈길을 사로잡은 풍경은 샌프란시스코만 둘레길(San Francisco Bay Trail)을 타면서 맞닥뜨린 아마존 물류창고였습니다. '구글하다'가 검색하다를 의미하는 것처럼 '아마존하다'가 구매하다, 더 나아가 판매하다를 뜻하는 날이 머지않아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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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제 눈길을 사로잡은 풍경은 샌프란시스코만 둘레길(San Francisco Bay Trail)을 타면서 맞닥뜨린 아마존 물류창고였습니다. 제가 아마존에서 물건을 처음 샀던 때를 2007년으로 기억합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5년 전이군요. 기억을 떠올려보면 시간은 언제나 빠릅니다.
미국에 와서 당시 무엇을 샀는지 확인하고 싶어 로그인을 해보지만 그때 가입한 제 이메일 계정은 사라졌습니다. 오기가 생깁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마존닷컴에 전화를 합니다. "지금 내 사정이 이러이러한데, 구매목록이 남아 있을까?" "그래? 확인해줄게."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니 상담원이 의아한 반응을 보입니다. "2007년에 가입한 계정은 있는데 구매목록은 없네?" 그러면서 덧붙이는 한마디가 불씨를 살립니다. "아마존닷컴 맞아? 아니면 해당 국가에 있는 아마존에서 확인해야 돼."
아뿔싸! 제가 처음 가입한 아마존 사이트는 아마존UK였습니다. "미안한데 영국에 있는 아마존 서비스센터 번호 좀 알려줄래?" "응, 잠시만. +44-20708-8479**로 해봐." "그래, 고마워." 바다를 건너 신호음이 닿자 아마존UK에서는 몇 가지 개인정보를 확인합니다.
최근 배송지가 어디냐는 질문에 저는 15년 전 머물던 영국 중동부 소도시의 기숙사 주소를 뒤져야 했습니다. 담당자는 꼼꼼하게 우편번호까지 확인합니다. 미국에서는 ZIP code를 물어보더니 영국에서는 postal code를 불러달라는군요. 작지만 흥미로운 표현의 차이입니다. 우편번호 관문까지 통과하자 제 이메일로 구매목록을 보내주겠답니다.
어렵사리 받은 메일에는 구매정보 4건이 들어 있었습니다. 2007년 저는 사전을 두 권 샀고, 어학교재를 한 권 샀으며, 나머지 하나는 여행 가이드북이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졸업을 앞두고 취직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마존은 여전히 제게 인터넷서점으로 남아있었지요.
이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어쩐지 아마존에서 뭔가를 살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마존이 킨들을 출시하며 전자책 시장을 만들 때 잠깐 귀가 번쩍 뜨였지만 한국어 사용자인 제 선택은 결국 예스24의 크레마였습니다. 이렇게 인터넷서점으로나마 존재하던 아마존은 차츰 저와 인연이 멀어졌습니다.
15년이 지나 실리콘밸리를 걷다가 아마존 배송창고를 마주쳤습니다. '구글하다'가 검색하다를 의미하는 것처럼 '아마존하다'가 구매하다, 더 나아가 판매하다를 뜻하는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대형 물류창고를 보면서 무엇이 지금의 아마존을 만들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창업자의 철학을 훔쳐보는 것이겠지요. 제프 베이조스의 책 <발명과 방황(Invent & Wander)>에서 그는 '데이원(Day 1)' 정신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20여 년 전 닷컴버블 때 아마존은 거품이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베이조스는 "우리는 매일 인터넷 시대의 첫날에 살고 있다"고 답변합니다.
승자가 역사를 쓰는 것처럼 아마존이 시장에서 승리했기에 그의 '첫날' 정신이 빛을 발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결과를 놓고 돌이켜보면 베이조스는 다른 기업가보다는 크고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2003년 3월, 미국 서부 몬테레이에서 TED 콘퍼런스가 열립니다. 몬테레이는 실리콘밸리에서 차로 1시간이면 가는 가까운 곳입니다. 여기서 베이조스는 "전기를 불빛을 내는 용도 이상으로 사용하세요"라는 100년 전 시어스(Sears) 백화점 광고문구를 인용하면서 "우리는 그야말로 인터넷 시대의 초창기에 살고 있습니다"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합니다.
▲ Amazon Trailer 코로나19 이후 아마존은 더욱 커졌습니다. 디지털 시대, 아마존에서 금맥을 찾아헤매는 골드러시 행렬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마존에는 금맥을 만든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도 있지만 금을 캐려는 수많은 배송노동자도 있습니다. 사진을 찍다가 본 아마존 대형 배송트럭 운전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걷는 저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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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아마존은 더욱 커졌습니다. 디지털 시대, 아마존에서 금맥을 찾아 헤매는 골드러시 행렬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1849년 골드러시에 나선 이들 중 정작 금을 캐서 돈을 번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오히려 채굴에 필요한 장비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이들이 부를 누렸습니다.
아마존에는 금맥을 만든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도 있지만 금을 캐려는 수많은 배송노동자도 있습니다. 사진을 찍다가 본 아마존 대형 배송트럭 운전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걷는 저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습니다. 그 눈빛을 마주친 저는 어쩐지 얼마 전 본 다큐멘터리 <노회찬 6411>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2005년, 고 노회찬 의원은 대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나라 판결문에 보면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전문경영인으로서 한 직장에서 수십 년 동안 성실히 재직해온 점을 감안한다'고요. 여쭙겠습니다. 후보자는 판결문 중에 '피고인은 수십 년간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감수하면서, 산재 위험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노동해온 점을 감안하여' 이런 구절을 보신 적 있습니까?" 당시 대법원장 후보자의 답변은 "못 봤습니다"였습니다.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는 수많은 아마존 배송노동자를 고려할 때 비단 대한민국만의 척박한 현실은 아닐 것입니다. 속도와 효율의 가치가 무엇보다 최고인 시대입니다. 기술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실리콘밸리 혁신가들이 꿈꾸는 미래는 과연 무엇일까요? '걸어서 실리콘밸리' 프로젝트를 하는 내내 이 화두가 제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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