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산 케터뷰] ① "득점왕들의 비법 훔쳐 탄생한" 21년도 주민규, 그 성스러운 계보

김정용 기자 2021. 12. 1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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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리스트] 김정용 기자= 2부 리그 미드필더로 프로가 된 선수가 6년 뒤 1부 득점왕을 수상할 거라고 예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민규는 그 길을 스스로 개척했다. 그동안 만난 여러 득점왕과 골잡이들에게서 비법을 훔쳤고, 비로소 골잡이라고 자부할 정도가 됐다. 2021시즌이 끝난 뒤 득점왕 주민규를 만나 골잡이로 거듭난 과정을 돌아봤다.


▲ 득점왕 출신 '쌤'들에게 훔친 비법들


주민규가 물려받은 득점왕 계보는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다. 1992년 프로 1년차 득점왕을 차지했던 임근재 감독이 주민규의 대신고 시절 스승이었다. 또한 2016년 득점왕 정조국 역시 대신고에서 코치 시절 임 감독에게 지도를 받은 적 있다. 올해는 정 코치가 주민규를 지도했다. 대신고 출신 득점왕 3명이 사제관계로 엮여 있는 역사다.


"임근재 감독님이 저한테 압박을 많이 하셨어요. 전화 하실 때마다 '무조건 득점왕 타야 된다. 2등은 아무도 기억 안 해. 너 예전에는 득점 2위에게도 실버슈를 줬던 거 알아? 그거 기억 하는 사람 있어? 아무도 안 알아준다'라고 하셨어요. '그럼요 쌤'이라고 매번 대답했죠."


주민규는 고등학교 때 공격형 미드필더나 스트라이커를 맡았다. 임 감독과 자주 일대일 돌파 내기를 했다. 임 감독은 체구가 작은데 마무리 감각이 좋은 스타일이었다. 발끝으로 톡 차서 골키퍼를 넘기는 슛을 시범보이고 나서 "이게 왜 안 돼?"라고 물어보고 내기에서 승리하곤 했다. 주민규가 미래의 득점왕으로 성장한 첫 단계였다.


"조국이 형, 그러니까 코치님은 함께 선수로 뛸 때부터 배우고 싶은 게 많았어요. 워낙 검증된 공격수였으니까. 그런데 선수 때는 비법을 안 알려주다가 코치가 되신 지금은 많이 알려주시더라고요."


주민규는 임 감독과 정 코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흡수하며 득점왕이 될 수 있었다고 돌아본다. 주민규는 한양대 시절부터 수비형 미드필더로 전업했다. K리그 공격진은 외국인 선수들과 경쟁해야 하니 롱런하려면 이쪽이 낫다는 조언도 들었다. 그때는 그럴싸한 이야기로 들렸다. 프로에서도 고양HiFC에서 2년 동안 미드필더로 뛰었다. 그런데 프로 3년차에 서울이랜드FC에서 스트라이커로 깜짝 변신해 득점 2위를 차지하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제가 득점왕이 될 거라고는 8년 전에 아무도 몰랐죠. 저는 동료 외국인 선수와 스무살 유망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선수들의 장점을 배우려고 했어요. 그 과정이 차곡차곡 모여서 올해 득점왕이 된 것 같아요."


주민규는 서울이랜드에서부터 본격적인 공격수 수업을 시작했다. 동료였던 김영광과는 훈련 중 슛이 막힐 때마다 다가가서 어떤 슛이 막기 어려운지 물어봤다. 역시 국가대표 출신 김재성, 조원희는 자기관리와 함께 이동국의 플레이를 보고 배우라는 조언을 들었다. 상주상무(현 김천) 시절엔 전술가였던 정경호 코치에게 움직임을, 김태완 감독에게는 신뢰를 받으며 K리그1에서 17골을 넣는 공격수로 발돋움했다.


K리그1으로 이적할 수 있게 됐을 때, 주민규는 '공격수 출신 감독이 있는 팀'을 찾아달라고 에이전트에게 요구했다. 그 결과 득점왕 출신 김도훈 당시 울산 감독의 제자가 됐다. 주민규는 김 감독이 '개인교습'을 많이 시켜줬다며, 골에 대한 여러 요령을 상세하게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2019년 울산현대에서 만난 주니오는 가장 골 감각이 좋은 동료였다. 움직임과 슈팅 템포를 보면서 배울 점을 찾았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제주에 합류, 토종 득점왕을 만들어 낸 경험이 있는 남기일 감독과 정 코치를 만나면서 완성됐다는 것이다.


▲ 최전방에서 공을 기다리는 건 고통스럽다


지난 5월 수원삼성을 상대로 발리 골을 넣은 뒤, 주민규는 "나도 이제 공격수의 본능이 생긴 것 같다"고 느꼈다. 주민규는 공민현의 크로스를 받아 그야말로 무의식중에 몸을 날리며 지면과 거의 수평이 된 상태에서 정확하고 강력한 슛을 갈겼다. 스스로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나서 경기 후 영상을 많이 돌려봤다. 방송사 뉴스에서 똑같은 장면을 재현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훈련장에서 던져주는 공으로는 그 감각이 살아나지 않아서 수십 번 반복하느라 모두 민망해졌다. 그는 처음 골잡이로서 두각을 나타냈던 6년 전과 지금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성장했다고 말한다.


"다들 대충 차는 것 같은데 어떻게 쉽게 득점하느냐고 물어봐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동료들이 떠먹여주는 걸 잘 받아먹어서 그렇게 보였던 것 같아요. 득점왕은 동료 선수들이 만들어 준 거에요. 이 말 많이 했는데, 늘 진담이죠."


문전에서 골만 노리는 건 쉬운 일로 들리지만, 사실은 고역이다. 주민규는 미드필더 출신답게 수비를 등지고 공을 지키는 플레이, 2선으로 내려가 패스를 넘기는 연계 플레이에도 일가견이 있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최전방 가운데서 버티라는 지시를 받았다. 왼쪽의 정우재, 오른쪽의 안현범과 같은 리그 톱 클래스 윙백들이 크로스를 올릴 수 있게 해 주라는 것이었다.


"감독님이 제일 많이 하신 말씀이 '인내해라'였어요. 그게 힘들어요. 공을 거의 잡아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경기가 생기니까. 지시대로 따르기 위해서 마음을 많이 다스려야 했어요. 지시대로 한 덕분에 득점왕이 됐고 감독님 전술에 따르면 팀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걸 확인했죠."


주민규는 올해 활동폭이 좁다는 점을 지적받았고, 이는 국가대표에 뽑히지 않는 이유라고도 알려져 있다. 주민규는 익숙한 일이라고 했다. 2015년 처음 주목받았을 때도 주민규보다 득점은 적지만 활동폭이 넓은 이정협이 국가대표에 깜짝 발탁돼 활약했다. 플레이스타일 변화를 고려해 볼 만했다. 그때 박상균 당시 서울이랜드 대표가 "민규 선수의 장점을 잃지 마라. 남들 말에 휘둘리면 특색을 잃게 된다"고 조언했고, 이 말에 깊이 공감한 주민규는 골잡이로서 역량을 갈고닦는데 더 심혈을 기울이기로 했다.


▲ 득점왕의 휴식시간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은?


"거의 안 봐요. KBK(김보경), 베리나이쑤(조수혁), (박)주호 형 채널, 고등학교 축구부 동창이 하는 말년 호빙요 정도만 봐요. 아는 사람 나오는 건 그나마 재밌어서."


그렇다면 쉴 때 하는 일은?


"유튜브 대신 보는 건 영화나 드라마. 특히 제주 선수들은 이동할 때 볼 영상을 폰에 저장해놔야 하거든요. 최근에 '지옥' 몰아봤고, 보고 싶은 건 킵해놓는 편."


가보고 싶은 곳은?


"시즌 중엔 조용히 쉬지만, 휴가 때는 여행 가는 걸 굉장히 좋아해요. 와이프와 연애할 때 첫 해외여행을 세부로 갔는데 스노클링하면서 물고기 보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작년에 신혼여행을 못가서 올해 몰디브 가려고 예약해 놨다가 방역단계가 바뀌면서 아쉽게 취소했어요. 몰디브 꼭 가보고 싶고, 한 번은 축구 보러 꼭 가보고 싶어요. 영국, 스페인, 독일, 프랑스를 다 돌면서."


팬 질문 ① MVP를 받아간 홍정호에게 한 마디 한다면?


"홍정호 선수가 받는 게 당연하죠. 친분이 없고, 홍명보 자선축구에서 한 번 만난 게 전부인데 이 자리를 빌어 축하를 전하고 싶어요. 제주 동료들은 '네가 받아야지'라고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죠."


② 기억에 남는 골 세리머니는?


"(이)창민이와 (오)승훈이 형이 부상 입었을 때 그 선수들의 번호로 세리머니를 했어요. '제주는 하나다'라는 구호대로 선수들끼리 뭉친 기분을 제대로 느꼈어요."


③ 퀀도1을 신고 있는데, 주민규에게 GD란?


"스니커즈 계의 신적 존재 아닌가요. 그분께 빕니다. 다음 드로우도 당첨되게 해 주세요."


※ '풋볼리스트'는 올해 K리그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득점왕 주민규,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에서 맹활약하며 포항스틸러스 대표한 임상협, MVP 홍정호, 38세에 팀의 강등을 막아내며 시즌 최우수 골키퍼로 거론된 김영광, 신흥 강호 대구FC의 희노애락을 겪고 올림픽에도 다녀온 정태욱입니다. 하루에 한 명씩 그들의 2021년을 돌아봅니다.


사진= 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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