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생활 접고 짐꾼으로, 길에서 보낸 그의 24년

김상목 2021. 11. 1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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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행복의 속도>

[김상목 기자]

1_속도 중독증에 빠진 한국사회
 
▲ "행복의 속도"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영화사 진진
 
한국사회는 압축성장으로 지난 반세기를 돌파해 왔다. 그 결과 세계 최빈국 대열에서 '선진국' 반열에 편입되는 극히 드문 입지전적의 주역이 되었으나 우리가 누리게 된 물질적 풍요에 비해 상대적 빈곤과 정서적 황폐의 부작용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지 오래다. 한국에 일하러 온 이주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 중 하나가 '빨리빨리!'라는 건 공인된 사실이다. 유행에 특히나 민감한 것도, 남들 다 따라가는 '대세'에 나 홀로 뒤처지면 안 된다는 강박 또한 강렬하게 작동한다. 허깨비를 쫓듯이 '나'의 주체적 판단보다는 다수에 묻어가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이런 집단적 체험은 민주시민의 덕목이 아닌 권위주의 시대 동원체제의 부정적 유산인 셈이다.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라 하지만, 사회 양극화 심화와 함께 실용이 아닌 체면과 눈치 때문에 벌어지는 과도한 속도경쟁과 소모적 공회전의 사회적 비용은 결코 부작용이 적지 않다. 세계행복지수 또한 국가별 척도가 제각각이라 신뢰도는 떨어지지만 경제적 부의 규모보다 안심하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더 결정적 요소라는 점은 충분히 입증된다. 자기 스스로 만족되는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무리 없는 인생을 살면 족할 텐데, 우리는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아져 버렸다.

2021년 11월 18일,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조용히 개봉했다. <행복의 속도>라는 제목의 작품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들이 적혀 있다.

"매일매일 짊어지고 걸어야 하는 나만의 길, 나만의 무게"
"무엇이 나를 걷게 할까요?"

사진 속 남자는 우리 옛 지게 비슷한 도구에 키보다 높은 짐을 층층이 쌓아올린 채 어디론가 총총히 길을 걷는 중이다. 한눈에 봐도 자기 몸무게보다 무거워 보이는 짐 꾸러미를 메고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 궁금증은 영화를 보면 하나 둘 풀리기 시작할 테다.

2_내셔널 지오그래픽 자연 다큐멘터리 부럽지 않은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동북방으로 좀 더 올라가면 후쿠시마 현, 도치기 현, 군마 현, 니가타 현 총 4개의 현에 걸쳐 약 1억 평, 3만7200헥타르의 오제 국립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람사르 협약에서 공인된 일본 최대의 습지 지대다.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평균 해발 1,5~600미터의 고산습지인 오제 일대는 4월 말에야 얼음이 녹고 10월 말에는 얼음이 다시 어는 서늘한 기후와 잘 보존된 생태환경으로 각광받는 트래킹 명소다.

국내외에서 밀려드는 수많은 트래커들이 늪지대에 가까운 습지를 이동할 때는 오직 폭 50cm , 총 70km 구간 전체가 원목으로 짜인 통로로만 육상이동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중간 중간 여행자들이 묵는 산장에 필요한 각종 물품은 마치 히말라야의 포터처럼 '봇카'라는 이름의 짐꾼들에 의해 인력으로 대부분 조달된다. 수십 킬로, 많으면 백 킬로그램 가까운 등짐을 메고 이들 봇카들은 트래커들과 같은 길을 이동해가며 산장의 보급을 책임지는 존재다. 이들이 없다면 오제 습지의 산장들은 유지될 수 없다.

영화는 두 명의 '봇카'를 주인공 격으로 내세운다. '이가라시'와 '이시타카'가 각자의 이야기 중심인물로 자리한다. 봇카들의 고된 여정은 마치 순례를 떠난 수행자들의 표정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경건하고 과묵하다. 땀을 비 오듯 흘리거나 비를 맞으면서도 이들의 표정은 과묵하기만 하다. 카메라는 그들의 운송통로를 따라가며 오제 습지대의 경이로운 풍광들을 마음먹고 잔뜩 담아낸다. 인간의 자기 제어능력과 지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칭송했다면 곧 뒤를 잇는 마치 초현실주의적으로 느껴지는 그림 같은 습지대의 생물군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히말라야나 안데스 산맥에만 인력에 의지하는 포터 문화가 존재하리라 생각했건만 현대 일본에 이런 직업이 존재하고 있으리라는 건 감히 상상조차 못해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카메라에 담긴 봇카의 여정은 놀라움을 넘어 경외심의 대상이다.

3_안빈낙도하는 삶과 그 너머의 불안을 함께 아우르다
 
▲ "행복한 속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이가라시는 24년차 고참 봇카다. 그는 오제 습지의 자손인 양 봇카의 삶에 만족하며 매년 5월부터 10월까지 반년은 짐꾼으로, 그 이외 기간은 생계를 위해 이것저것 산일을 하거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오제의 봇카들 중에서도 중심적인 존재인 이가라시는 오제를 떠나겠다는 생각이 없어 보인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고 난 뒤 듣는 감사인사와 수고했다 한마디에 발걸음 가벼워지는 귀갓길이면 그는 카메라로 습지의 정취를 꾸준히 기록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봇카 수입만으로는 생계가 넉넉하기 힘들다. 일을 못하는 기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주변 농사일을 거들며 알바를 하지만 오제의 여유로운 속도를 닮은 부부는 평화롭게 만족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가라시는 자녀들도 쉬는 날엔 함께 트래킹을 하며 자신의 생업을 익숙하게 만들고, 오제의 자연문물을 알려준다. 아이들은 새와 곤충과 식물의 이름을 배우고 공존하는 삶을 익혀나간다.

두 번째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시타카는 7년차 중견 봇카다. 상대적으로 젊은 그는 생각도 많고 궁리도 부지런하다. 봇카란 직업에 애착은 있지만 1년 중 절반만 일할 수 있고 정규 직장처럼 보험이나 월급을 기대할 수 없는 점을 극복하기 위해 봇카 청년단체를 꾸리고 비수기에 다른 지역에서 일거리를 만들려 틈틈이 도쿄 등 여러 곳을 방문하곤 한다. 이가라시가 영화의 전반적인 기조와 맞닿는 무위자연에 더불어 동화되어 만족하는 삶, 슬로 라이프를 상징한다면 이시타카는 갈수록 급변하는 세상에서 속도를 따라가기 위한 고민과 전망을 담아내 보여주려는 그릇과 같은 존재다.

둘의 기본적인 포지션과 상황 차이는 꽤나 극명하게 대비된다. 서로의 입장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편이지만 감독은 개인과 개인의 대비보다는 영화의 데세, 2/3(이나 4/5)는 이가라시의 일상을 통해 전달하려는 오제의 아름다운 풍광과 지키고 보살펴야할 자연유산에 할애한다.

사실상 영화의 제목인 '행복의 속도'에서 속도 담당이 이가라시라는 건 누가 봐도 뚜렷하게 확인된다. 가장 정통파 붓카라 할 만한 이가라시의 젊은 시절 자유로운 도시생활 모습이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하고, 현재의 이가라시가 곧이어 경건하게 짐을 실어 옮기는 붓카가 되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 "행복의 속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이시타카의 고민과 모색들을 갈무리해 선보인다. 외부 변수가 너무 많은 데다 갈수록 가팔라지는 세상 속에서 어쩌면 오제의 붓카들은 마치 변화를 거부하는 반지의 제왕 속 로스로리엔 요정왕국의 결계 속 엘프들 같은 존재는 아닐까? 이시타카를 통해 감독은 관객에게 각자의 답을 찾아보게 만든다. 이가라시에 비해 이시타카는 보다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방법론을 주로 택하는데 이는 오제, 그리고 그 수호자인 봇카들의 위태로운 미래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태도를 끌어낸다. 이시타카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봇카 문화를 다른 산악지대에도 퍼뜨려 오제에 국한된 봇카들의 행보를 전국 확산시키려는 포부를 놓지 않는다.

사실 이시타카가 '봇카'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표상하는 역할을 작품 속에서 배분받았을 뿐, 이가라시 역시 동일한 고민을 갖고 있다. 새 봇카 희망자가 있어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다음해 봇카 일자리 수요를 예측해야 하는 상황을 난처하게 겪는 중이다. 봇카 선배에게 미래 방향을 물어보지만 뾰족한 수 없다. 당장 내년에 봇카와 화물운송을 양분하는 헬기노선이 유지되느냐 축소 폐지되느냐가 봇카 일거리 총량과 신규인력 진입의 관건이다. 정답을 내기가 곤란한 숙제는 모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지만 그저 관점과 태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오제의 현 상황은 모두 별로 다르지 않게 인지하고 있다.

4_붓카의 현재와 미래를 정할, 극장의 치명적 매력

새해 초입 둘은 각자 가족과 함께 본가를 찾는다. 하지만 분위기는 영화 내내 그랬던 것처럼 퍽 색다른 풍경을 선보인다. 한쪽에선 이가라시가 연로한 어머니에게 자신이 일하던 중 오제를 틈틈이 찍어둔 사진을 모니터에 연결해 보여주고 있다. 화산과 자연이 빚어낸 실로 아름다운 현실 습지대의 아름다움이 광채를 발하고,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풍광을 안주처럼 나누기 시작한다. 소박한 술과 맛있는 새해 정월 오세치 음식을 곁들여 이가라시 가족은 덕담을 나눈다.

다른 쪽에선 이시타카 가족이 부모님을 방문 중이다. 정월 축하와 만찬을 나누는 건 엇비슷한 풍경이지만 이들의 대화는 다른 지점을 조명한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은 이시타카의 건강과 체력을 걱정하고 '그래도 안정된 직장이 낫지 않냐?'고 묻는다. 그분들이 보기에 이시타카의 봇카 일은 너무 불안정하다. 이시타카는 가족들에게 봇카 일에 대한 애착과 자신이 기울이는 노력을 설파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쌓여가는 고민은 온전히 숨길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불안은 이시타카가 특별히 유약해서는 절대 아니다. 봇카의 현재와 미래를 골고루 조명하려는 감독의 연출의도에서 그 롤을 맡은 것뿐이다.

그렇게 정월이 지나고 봄이 늦게 찾아오는 오제 습지에도 슬슬 얼음이 녹아가면서 느릿느릿 봄이 찾아온다. 잠들어 있던 대지가 기지개를 켜는 느낌이다. 그리고 나면 봇카들의 생명 줄이자 순례길인 트래킹 코스에서 이가라시가 솔선해 나무계단에서 눈을 치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올해 산장 오픈을 위해 가장 먼저 필수품을 짊어질 자신들을 위한 이동로를 정비하며 봇카들은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오제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은 찬란한 빛을 발한다.

<행복의 속도>는 백번 설명을 듣는 것보다 한번 제대로 관람해보는 걸 추천한다. 혹시나 영화를 찾아볼 심산이라면 이 영화는 꼭 극장환경 괜찮은 데에서 큰 화면으로 보시길 권한다. 수많은 트래커들을 매료시킨 오제의 진면목을 일부분이라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작품정보>

행복의 속도 Speed of Happiness
2020|한국|다큐멘터리
2021.11.18. 개봉|114분|전체관람가
감독 박혁지
주연 이가라시 히로아키, 이시타카 노리히토
출연 이가라시 노조미, 타다 쇼헤이
제작 (주)하이하버픽쳐스
공동제공 영화사 진진
배급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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